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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 교유서가 소설
박이강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9월
평점 :
#어느날은유가찾아왔다
#박이강 소설집
#교유서가
제목에 등장하는 ‘은유’의 정체가 궁금했다. 사람의 이름 같지만, 메타포라 불리는 그 ‘은유’일지도?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이면 재미없다. ‘어디 한 번 맞혀봐.’라고 하는 듯 아리송한 제목은 독자의 읽기 전투력을 상승시킨다.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이 책의 마지막 글에서야 나는 ‘은유’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은유’의 존재는 ‘나’를 생동감 넘치고 살아있게 했지만, 내 삶에 큰 부작용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숨 가쁜 서바이벌 게임이 반복되는 직장 생활은 ‘나’의 웃음을 빼앗았다. 나는 ‘그냥 다 재미가 없어’져 무작정 찾은 제주에서 ‘은유’를 만난다. 처음에 ‘은유’가 당연히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제주에서 만났던 은유가 느닷없이 서울 ‘나’의 사무실에 나타날 때부터 그 본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글로벌 기업에서 치열한 직장 생활을 했던 경력의 박이강 작가는 ‘소설을 쓰는 일로 기업 세계에서의 삶을 견디는 시간을 지나왔다’고 한다. 퇴근 후에도 늦은 밤까지 카페에서 글을 쓰고 집에 돌아온 날은 ‘삶의 무의미와 열심히 싸우다 돌아가는 기분에 종종 가슴이 벅찼다.’고 한다. 그런 작가였기에 영혼 없이 바쁜 삶과 진짜 나를 살게 하는 일의 대립, 그에 대한 고민을 누구보다 잘 알았나 보다. 일에 찌든 삶은 일상이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고군분투는 관성처럼 생기는 것일 뿐, 단편 속 주인공들이 진짜 원하는 목표인지 의구심이 든다.
<흔들리는 것들>, <오피스>, <도시는 밤>, <파라다이스 리조트>, <방문객>, <디디를 기다리며>, <2백만 원어치 마음>, <무탈>,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아홉 편의 단편 중, 두 개의 글을 빼면 모두 젊은 직장 여성의 주인공이다. 거기다 대체로 남의 문제에 끼고 싶지 않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에 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정해 보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쉬는 것을 일보다 어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각각 다른 상황에서 비슷한 내적 갈등을 겪지만, 선택은 달리한다. 누군가는 ‘은유’를 찾아 떠나고, 다른 누군가는 치열한 일상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찾는다.
독백을 통해, 혼잣말을 통해, 관찰을 통해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인물들의 내적, 외적 갈등은 설득력 있고 독자도 함께 고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흔들리는 것들>에서 호텔에 불이 나는 바람에 급하게 짐을 싸 떠나게 된 상황에서 마사지사 하스나의 원망을 들으며 함께 어쩔 줄 몰랐다.
<오피스>에서 세영이 꽃을 몽땅 버릴 때, p이사의 방문을 쾅 닫을 땐 속이 시원했고, <방문객>에서 미스터 자파가 남기고 간 ‘뱀 형상’의 흔적으로 부부가 받은 충격이 그들에게 어떤 후폭풍을 불러일으킬지 궁금해졌다. (작가님 후속편 없나요? >.<)
<2백만 원어치 마음>에서 혜린이 처한 불합리하지만 피하기도 어려운 진퇴양난의 상황에 나까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라면 혜선에게 질질 끌려갔을지도 모르겠다.
<무탈>을 보며 ‘무탈하다’라는 그 기준이 지극히 상대적이란 사실을 새삼 느꼈다. 아이가 말을 너무 안 들어 혈압이 최고치에 달할 때는 그게 내 마음을 탈 나게 하지만, 정작 아이가 아프면 아이가 떼쓰고 말 안 듣는 것쯤이야 ‘무탈’에 속하니 말이다.
단 한 명, 이해해주고 싶지 않은 미운 캐릭터는 <파라다이스 리조트>의 희수다. 나는 무례한 사람이 싫다. 희수는 갑에겐 약하고 을에겐 강한 내가 가장 혐오하는 스타일이지 않나?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비뚤어지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없기에 난 희수를 그냥 미워하기로 했다.
흡인력 있고, 문장도 매력 있다. 거기다 내가 좋아하는 심윤경 작가님이 대산창작기금 심사위원이셨고 추천사까지 쓰셨다니 더 좋아지기도 했다. 박이강 작가님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어쩌면 잘 산다는 건 헛된 믿음을 헛되지 않다고 믿으며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깁스를 풀면 기타를 칠 수 있게 될 거라고 믿는 것처럼.」 _228
「이봐, 겉늙은 누님같은 표정은 제발 좀 그만하고, 놀이를 한 번 해보는 게 어때? 너의 일상을 다른 말로 바꿔보는 놀이, 일명 은유 놀이. 재미있을 거야. 」 _243
「회사란 마조히스트로 훈련된 새장이다. 그 새장 속에서는 영혼이 빠져나가 머리가 작아져야만 가볍게 훨훨 날 수 있다.」 _255
#교유당서포터즈 자격으로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개인의 주관적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