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의 탄생 비화

"미국의 CIA와 일본의 내각조사실을 절충한 정보수사기관을 만든다. 셋이서 법을 만들어라."

정보만 다루는 것이 아니고 수사권, 즉 사람을 잡아 가둘 수 있는 힘을 가지는 한국 중앙정보부의 원형(原型)은 이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이는 박정희–JP가 합의한 구상이었다.


(1961년) 6월10일 중앙정보부법이 공포되었다.

실로 번갯불에 콩 볶듯이 만든 것이었지만 그 후의 이 나라 역사에 헌법만큼이나 중대한 의미를 갖는 법이었다.

5·16 쿠데타 주체들이 최초로 낸 법은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군인들이 3권을 장악하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었다. 한강다리를 건넌 지 20일 만인 6월6일 공포했다. 군정이 문서화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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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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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에서 노동이란 무엇일까. 각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 지나치게 신성시되기도, 천시되기도 하는 노동. 한국의 정치 상황에선 이데올로기와 결부되어 극한의 대립을 낳은 역사가 있지만 지금 젊은 세대에게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 장류진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은 노동 시장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젊은 소시민들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불행과 고통에 짓눌린 채 숨막혀하는 사람들이 아닌, 불합리한 구조 안에서 어떻게든 자구책을 마련해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내 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어떤 이는 자신이 운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합리성을 찾기도 하고, 어떤 이는 남들이 현실을 직시하라며 꾸짖는 소리에도 꿈을 꾸듯 살아가기도 한다. 그 중간 어느 지점에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서성이는 사람도 있다.

- 회사 생활에서 빚어지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나 대인관계의 사소한 부딪힘 같은 것들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묘사된다. 스타트업부터 대기업까지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듯한 일들에는 깨알같은 디테일이 묻어 나온다. 대표의 주재 하에 한없이 길어지는 스크럼 회의 장면이라든지 수평적 의사소통을 하겠다며 실명과 직함 대신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른다든지. 나 역시 실제로 겪어본 일들이어서 그런지 웃프게 느껴졌다.

- 가장 좋았던 이야기는 책의 끄트머리에 실린 <탐페레 공항>이었다.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낯선 외국인의 환대를 받고, 서로 이메일을 교환했던 기억이 몇 번 있다. 그러나 돌아와서는 한번도 메일을 보내지 못했다. 국제구호단체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아동을 10년 넘게 후원하면서 자동이체만 걸어두었지 아이의 엽서에 한번도 마음 따뜻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 한켠에 묻어둔 약속들이 마음에 빚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 주인공이 노인의 오래된 편지를 펼쳐 들고 눈물을 쏟는 순간, 나도 같이 울컥할 뻔했다.

- 회사 생활을 병행하며 틈틈이 쓴 소설이라니 놀랍다. 바로 옆을 돌아보면 있을 것 같은 생생한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 허를 찔린 듯한 대목이 많았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시대정신을 드러내며 짐짓 무겁고 어두운 격류를 그릴 때, 장류진의 세계에서는 거센 물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 징검다리를 사뿐사뿐 건너는 주인공들이 있다. 글에는 촌스러움이나 과함, 군더더기가 없다. 책에 실린 해설 제목처럼 ‘센스의 혁명‘이다.

- 단편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창비신인문학상을 받았을 때만 해도 절대로 전업작가가 될 생각은 없다던 장류진 작가는 첫 소설집이 나온 뒤 회사에 사표를 냈다고 한다. 그의 장편을 더 빨리 만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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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집 - 갖고 싶은 나만의 공간, 책으로 꾸미는 집
데이미언 톰슨 지음, 정주연 옮김 / 오브제(다산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디자이너, 건축가, 화가, 사업가 등 책 수집가들의 서재와 집안 곳곳의 풍경을 담은 책.
‘책을 꽂을 것인가, 쌓을 것인가?‘라는 고민부터 시작해 책의 보관과 진열에도 다양한 방식이 있다. 이 책에서 애서가들은 좋아하는 ‘책‘과 생활 공간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는지 보여준다.

거실과 서재 뿐 아니라 부엌과 식당, 손님용 방, 계단과 복도, 심지어 화장실과 욕실까지 책을 이용한 인테리어를 제시한다. 이케아로 대표되는 저가 가구부터 디터 람스 같은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까지 다양한 소재와 형태, 콘셉트를 보여준다.
임스 체어, 찰스 소파 같은 멋진 디자인의 가구들과 정돈된 책들의 센스 넘치는 조화들을 보면 황홀하기까지 하다.

현실적으로는 공간과 비용이 문제겠지만, 자신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장서로 채워진 집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번쯤 훑어봄으로써 대리만족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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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가의 말들

서재란 누군가가 평생 모아온 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개인의 진지한 관심사를 반영하여 구체화한 곳에 가깝다.
미국 성직자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은 읽지 않은 책들에서 책꽂이가 부족해 목수를 불렀을 때의 일을 이야기한다. 목수가 그에게 "정말 이 책들을 다 읽으셨어요?" 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도구 상자에 있는 도구들을 다 쓰시오?" 물론 아니다. 도구란 나중에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재는 읽은 책을 보관해두는 곳이 아니라 필요할 때를 대비하는 공구상자에 가깝다.

 "내 아이들이 집안 장식은 필요한 만큼의 책꽂이를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어른으로 자라면 좋겠다."(작가 애나 퀸들런 Aanna Quinalen) 
책은 정신만 풍요롭게 하는 게 아니라, 점차 눈을 더욱 즐겁게 하는 방향으로 디자인되고 있다. 탑 쌓기에서 예술품 진열까지, 색색의 시리즈물에서 가죽 장정까지, 아름다움을 위한 도구로서 책의 역할은 결코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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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나쁘게 보지 않기를.

그녀가 나쁜 의도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 세대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가치일 테니까.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테고 패브릭 소파와 소파스툴, 원목 거실장과 몬스테라 화분은 둘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거실을 통해 부엌으로 가려면 한가운데로 가로지르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피아노의 뒷면과 벽 사이로 겨우 지나가거나, 기어서 피아노 밑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단 한번도 충분하다거나 여유롭다는 기분으로 살아본 적 없는 삶이었다. 삼십대 중반, 이제서야 비로소 누리게 된 것들을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안정적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이십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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