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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라면 날 사랑하겠어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장혜경 옮김 / 갈매나무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호어스트 에버스, 헤드뱅잉을 꿈꾸는 이 매력적인 대머리 아저씨를 처음 만난 것은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라는 책이었다. 베를린을 욕하며 베를린을 사랑하는 이 삐딱한 독신남이 이번에는 여자 친구와 아이와 함께 나타났다. 여전하시다. 빈 샴푸통에 마요네즈를 넣는 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창의성을 일취월장 시키는 육아 비법을 갖고 있으며, 벼룩시장에서 천천히 사람의 마음을 녹여 싸게 물건을 구입하는 처세술을 부리려다 오히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일이 다반사이시다. 20년 전에 헤어진 여자 친구와는 소식이 끊겼지만 그 어머니에게서는 매년 치커리 소시지를 택배로 받는다. 맛있다는 예의성 발언이 가져 온 20년의 결과를 딸아이가 데리고 올 남자친구에게 유산처럼 물려줄 날을 꿈꾸며.
주변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침소봉대의 과장법으로 확장시켜 희화화시키면서 삐딱한 시선으로 삐딱한 농담을 툭툭 던지지만 냉소적이지 않다. 굳이 착하게 살 생각 따위 없다. 멍청하게 살 생각은 없지만 멍청이 취급도 받는다. 삐딱하게 다른 사람을 조롱하지만 정작 본인이 조롱거리가 되어 바이킹 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가 되기도 한다. 세상은 훨씬 더 영악하니까.
‘일상의 책임’이라는 에피소드를 잠깐 건드리자. 아침에 현관문을 여니 복도에 시체 한 구가 누워 있다. 이 시체를 신고하면 이런저런 불편한 일에 휘말릴 게 뻔하니까 다른 이웃이 발견하고 신고하기를 기다린다. 이웃이 신고를 하지 않으니 이웃에게 전화를 걸어 왜 신고를 하지 않느냐고 따진다. 그런데 이 시체가 일어나 벨을 누른다. 어느 구역에서 시체가 빨리 발견되는지를 조사하는 조사원이다.
아, 정의롭지 않아서 좋고 사악하지 않아서 좋다. 나 하나 편하자고 꾀를 내지만 그 꾀에 넘어가서 좋고, 성공 따위 추구하지 않아서 좋고, 우울과 비련 따위 개나 줘버려서 좋다. 헤드뱅잉할 기회를 잃어버린 채 대머리가 되었지만 언젠가 틀림없이 헤드뱅잉을 할 것 같아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