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아, 사람아, 그냥 갈 수 없잖아
사석원 지음 / 푸른숲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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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날이 궂으면, 그래서 금세 비라도 내릴 것처럼 하늘이 잔뜩 흐리면 술 못 먹는 나도 괜스레 술 생각이 나더라구. 이래서 술 마시나 보다 싶어지면 어김없이 그분을 찾는 전화가 와. 어이, 술 한 잔하지 하고 그분 찾는 전화가 두서너 통 씩 꼭 오더라구.“

몇 해 전 돌아가신 그분에 대해 직장 동료가 내게 들려준 말이다. 노염도 타지 않고, 남의 노염도 부르지 않고 늘 붉은 얼굴로 허허 웃으시던 분.  이 책을 읽고 나니 새삼스레 그분 얼굴이 떠오른다.

술에 얽힌 이야기라면 누구나 한둘 이상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술집에 얽힌 이야기라면 또 누구나 저마다의 술집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술집에서 그 사람과 마시던 그 술을 또 어느 술자리에서 퍼올릴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 나에게도 취기를 빌려 이야기하고 취기를 빌려 위안을 받던 술 이야기가 있건만 어쩐 일인지 이 책은 ‘나’가 아니라 ‘그분’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 나온 조지훈 시인의 주력 18단계에 의한다면 9급과 8급수 밖에 안되는 나는, 그러니까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잘 안 먹고, 술을 마시긴 하나 술을 겁내는 나는 그래도 나름대로 ‘청춘’이라고 부르던 시절에는 비 오면 비 온다고, 해 짱짱하면 너무 짱짱하다고 날씨를 핑계 삼아 술을 마시곤 했었다.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며 기분 좋다고 시끄럽게 마시기도 하고, 힘들고 꿀꿀할 때는 그냥 한없이 가라앉으면서 울기도 하고 쓸데없이 누군가에게 전화질을 하면서 마시기도 했었다.

다 지난 일이다. 이젠 기력(?)이 쇠하여 별로 낯익지 않은 사람들과 떼로 어울려 부어라 마셔라, 누군가를 씹고, 씹히고 하면서 과잉감정에 달하고 마는 술자리는 언제부터인가 몸을 사리게 된다. 그렇다고 지난날의 술자리가 그리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요즘 들어 슬쩍 술생각이 난다. 그냥 허울없이 익숙한 친구 한둘과 조분조분거리며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술자리가 문득문득 그리워진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다. 바람아, 사람아 그냥 갈 수는 없잖아, 라고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그분 생각이 나고 말았다.

그림 탓일까.     신선이지만 속세 일은 물론 신선 일(그러니까 근엄하게 폼 잡는 거)도 나 몰라라 하고 얼큰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유하게 웃고 있는 주당들의 얼굴에서 그분을 본 탓일까. 지금도 다른 세상 대폿집에서 얼큰하게 취해 있을 것만 같다.

처음엔 대폿집 기행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어디 좋은 술집 있으면 가봐야지 하는 얄팍한 마음에 책을 집어 들었다. 나중에야 ‘대폿집 기행’이 아니라 ‘대폿집 연가’임을 알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대폿집, 그 대폿집에 대한 한량의 연가. 아마 내가 아는 그분도 이 책에 나오는 대폿집 어딘가에서 홍탁을 즐기며 술맛에, 홍어맛에, 이야기 맛에 젖어있던 한 분이었을 게다.

그리고 이제, 내가 지나가면 잡을 게다. 이 사람아, 그냥 가면 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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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은12살 2005-05-3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이 궂으면 궂은 대로,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를 노상 불러내는 친구가 있어, 실연이 있어, 시름이 있어 분주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주성치님의 글을 보니 나도 모르게 그때가 생각나는군요...

로드무비 2005-06-01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 또한 마음에 쏙 드는 책이었어요.
다 읽고 나면 절로 술생각이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