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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렁증 예방 백신 - 사람들에게서 편안해지는 법
보르빈 반델로 지음, 장혜경 옮김 / 갈매나무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자동차 두 대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는 틈새를 바라본다. 내가 지나갈만한 공간일까 아닐까? 아, 괜히 지나갔다가 끼면 어쩌지? 끼는 건 그렇다치고 누가 그걸 보고 웃으면 어쩌지?
마침 여학생들이 지나간다.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괜스레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아 민망하다. 그냥 자동차를 돌아서 지나간다. 내 뒤통수로 까르르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러붙는다. 아, 쪽팔린다.
아마 그 여학생들은 자기끼리 수다떨다가 웃었을 뿐이고 지나가는 나에게는 눈길 한 번 안 주었을지도 모른다. 혼자 자격지심에 민망해하고 울렁울렁거렸을 게다. 안다,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대대적이지는 않더라도 이런 소소한 일상에서조차 남들의 시선에 신경이 쓰이고 그래서 위축되고, 뭔가 발표라도 하려면 가슴부터 울렁거린다.
학생 시절부터 그랬다. 선생님이 뭔가를 물어보면 아이들은 저요, 저요 손을 든다. 난 답을 알아도 조마조마하다. 나 시키면 어쩌지, 내가 말한 답이 틀리면 어쩌지.
크면 달라졌을까. 아니다. 여전히 소심하고, 그래서 뒷북치며 난 왜 이럴까를 반복하고 있다.
하여 대인기피증까지는 아니어도 낯가림이 심하다. 그러다보니 낯선 사람은 안 보려 하고 낯익은 사람만 보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갈수록 낯선 사람은 낯설고, 낯익은 사람만 낯익다. 인맥은 더이상 퍼져나갈 수 없고,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거리감은 백만 광년쯤 된다. 사람이 갈수록 폐쇄적이 된다.
자, 울렁울렁 울렁대는 이 마음을 어쩌란 말이냐. 사랑 앞에서 울렁대는 것도 아니고 사람 앞에서, 일 앞에서 울렁대는 이 가슴의 벌렁벌렁거림을.
<울렁증 예방 백신>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음...이건 어쩌면 타미플루 같은 건가 하고 쓰윽 지나치려고 했는데, 울렁증에 대한 이야기라니까 어디 한 번 하는 심정으로 집어들었다.
'문제-원인-치유'의 3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울렁증 경험담 같은 고민거리들을 읽어보니까 이거이거 내 이야기잖아 하고 읽게 된다. 누가 나와 같은 경험을 했지, 하고 보면 독일인이다. 어, 외국인들은 다 막 외향적이고 낯선 사람들에게도 막 말을 걸고 넉살 좋은 인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일세.
결국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한 모양이고, 울렁증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또 결국 사람들이 다 어느 정도는 떠안고 사는 문제인 모양이다.
내 이야기 같은 울렁증 이야기들을 읽고, 그에 대하 글쓴이가 내놓은 치유법에 공감도 하고 낄낄거리기도 하다가 어디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도 들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남의 시선 의식 하는 내가 남아 있고.
그러다가 책을 거의 다 읽어갈 즈음 뜬금없이 유재석을 떠올렸다.
이제는 국민 MC가 된 유재석은 지금도 방송에서 울렁증 이야기를 한다. 무한도전 같이 익숙하게 해온 프로그램에서는 울렁증이 없는 것 같은데 도전 형식으로 음악중심에서 라이브로 노래를 한다거나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오거나 할 때 보면 긴장한 티가 역력하고 숨을 몰아쉬면서 심호흡을 하고 심장 근처를 만지며 울렁증이 있어서...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자주 본다.
연예가중계 리포터였을 때 버벅거리며 말실수하면서 곤혹스러워하는 과거의 어린(?) 유재석의 모습도 종종 방송에서 보여주고는 한다.
그때는 초짜였으니까 울렁증도 심했겠지, 그런데 지금은 국민 MC인데도 여전히 울렁증이 있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울렁증이 있는 그의 모습이 심약해보이지만은 않는다.
방송 울렁증을 극복하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을 테고, 그리고 여전한 울렁증은 그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도 보인다. 대충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실수도 하고 싶지 않다, 아아, 실수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울렁증을 만들고, 그 울렁증이 더 노력하게 만들고 그렇게 올라간 프로그램에서의 모습은 그래서 나름대로 잔잔한 감동을 준다.
그러니까 울렁증은 병도 되지만 약도 된다. 내가 유재석이 되겠다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울렁증으로부터 편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울렁증 예방 백신>이니까 일단 백신은 받아둔 셈이다. 아직 투여 전이지만 뭐랄까, 어느 정도 안정은 된 듯한 그런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