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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ㅣ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정신 출판사의 중편소설 시리즈 '소설, 향'에 오랜만에 새로운 책이 출간되었다. 이 시리즈의 첫번째 책인 김사과 작가의 『0영ZERO零』와 두번째 책인 윤이형 작가의 『붕대 감기』에 이은 세번째 책은, 김이설 작가의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이 장식했다.
처음 책 제목을 보자마자 '에세이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에세이 감성이 어린 제목이라고 느껴진다.
책의 첫 시작은 주인공이 이별한 전 연인과 다시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서로 사랑했던 그 마음 그대로라고 말하는 연인이 또 다시 주인공에게 반지를 건낸다. 헤어질 때와 다를 바 없는 장면이었다. 주인공은 또 다시 그 반지를 거절하고, 연인은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반지를 그대로 두고.
사랑했지만 이별을 고했던 연인을 만나고, 또 다시 연인의 마음을 거절하는 애절한 분위기 속에 이 두사람의 연애 이야기인가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뭔가 마음 한켠이 꽉 막히는 듯한 답답함과, 약간의 동질감, 여러가지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드는 책이었다.
주인공인 '나'는 부유하지 않은 집의 장녀로 태어났다. 하지만 고등학교 3년 동안 장래희망은 '없음'이었고, 대학도 모두 떨어졌다. 재수마저 실패했고, 아버지의 권유로 공무원시험을 위해 공부했지만 그마저도 3년간 하다가 그만뒀다. 그래서 부모님은 '나'에게 기대따위 가지지 않았다.
대신 동생은 '나'와 달리 착실해서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언제나 상위권에서 놀았던 동생은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무사히 입학했다. 대학원도 졸업하고 원하는 회사에도 입사했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꿈을 가지고 노력하며 살아가는데, '나'는 그런것이 없었다. 공무원 준비를 그만두고 25살이 되어서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동생만큼은 먼저 알아차려준 꿈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시'였다.
'나'는 동생의 권유로 29살, 야간전문대학의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등단은 그리 쉽지 않았고, 주변에는 능력있는 사람들이 많아 점점 초조해지기만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던 시간이기도 했다. 자주가는 동네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자신보다 6살이나 어렸던 그 사람.
그리고 '나'는 여전히 등단은 커녕 3년동안 시 한편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었다. 동시에 연인에게도 이별을 고했다. 모든 것은 3년 전, 여동생이 남편의 폭력을 피해 세 살과 갓 백일 지난 아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들어온 날 이후 '나'의 삶은 점점 더 초라해지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언 이후 동생은 다시 밤낮으로 일하며 집안의 경제력을 책임졌다. 늙은 엄마와 무기력한 아빠도 일을 나갔다. 그래서 두 조카들의 육아와 집안일은 오롯이 '나'에게 돌아왔다. 동생은 새벽 늦게 돌아왔으며 엄마는 집안일을 '나'에게 넘긴 이후로 정말 단 한번도 집안일을 돕지 않는다. 경비일을 하는 아빠는 아침에 들어와 잠을 자고, 다시 일하러 나간다.
'나'는 하루세끼 밥을 준비해 두고, 조카들을 등원시키고, 집안일을 하고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이 되어서야 필사를 한다. 글을 쓸 시간은 없다. 게다가 육아를 위해 사랑했던 사람에게 이별을 고했다.
동생은 밤낮으로 일해도 매번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들어 연애도 하는 것 같았고, 엄마는 집에 오면 쇼파에 누워 TV보기에 한창이다. 3년동안 '나'는 지쳤지만 그 누구도 자신에게 고마운 줄 모른다. 정말 뜻밖에도 아빠는 여전히 '나'를 생각해 주는 듯 하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뜨고 나서야 식구들에게 발목 잡히기 전에 그들과 거리감을 둘 공간을 찾기로 다짐한다. '나'는 쉴 곳이 필요했다. 가족으로부터 도망칠 곳이.
사실 처음에는 주인공이 참 답답하게 느껴졌다. 누가 조카들 양육하기 위해 자기 좋다고 기다리는 연인까지 포기해 버릴까 싶었다. 양육과 집안일을 모두 떠맡고, 이제까지 '시'에만 몰두하면서 그 어떠한 일 하나 제대로 해보지 못한 모습을 보며 이렇게 답답한 수동적인 인물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40세의 나이와, 한국의 장녀라는 주인공의 타이틀을 아직까지 내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더 답답하게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우선적으로 첫째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부담감을 겪은 적도 없으며(주변 인물의 말로는 첫째만이 가지고 있는 부담감이 존재한다고 한다. 첫째가 아닌 사람들은 의아해 했지만, 첫째들은 모두 동감했었다. 놀라울 다름) 나는 아직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것만 같은 20대니까 나이를 먹음과 동시에 점점 좁아져가는 기회의 문을 실감하지 못했다. 먼 훗날 이룬 것 없는 현실과 하루하루 늙어가는 내 모습을 보며 초조해 하는 날이 오겠지. 그렇다면 가족의 눈치를 보며 집안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설 곳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슬픔에 가득 차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 여전히 곁에 있다는 것이 부러워지는 책이었다. 결국 사랑이 전부. 자존감이 바닥을 쳐도 그 모습마저 긴 시간동안 지켜줄 사람만 있다면 성공한 삶이 아닐까...(부러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