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고수의 고품격 

  오피스텔 복도 창 너머로 청와대 푸른 기와지붕이 흐린 날이라도 낮에는 눈에 들어오곤 했다. 이날은 그 위치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깃털처럼 눈이 퍼부었다. 시내버스가 시속 30km 전후로 속도를 죽여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한 자 가까이 눈이 쌓이고 있었고 등산화를 신고 미끄럼을 밀어냈다.
나무들은 가지가 휘고 있었고. 설해목이 되기까지에는 여유가 남아 있었다. 백색 도시도 공포에 떨기까지 시간적 거리가 있었다. 창밖 백설에 전망을 잃고 욕설 유머 한마디가 새해를 꾸몄다.
_새해 인사를 받은 80대 명사 옹이 미국 아무개를 가리키고 그놈은 480년 하고 잤다고 말했어.
_480명이라는 구체적 숫자가 사실을 의심하게 해요.
_그놈은 사방팔방 이년저년 하고 잤다는 것을 480이란 숫자로 바꾸어서 표현한 것이 아닐까.
_황석영 작 '삼포 가는 길' 주인공 백화가 한 말이 생각나네요.
_내 배 위로 사단병력이 지나갔어.  

_무성한 잡초 속에서 실파처럼 줄기들이 솟아올라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줄기 끝에 조그만 흰 꽃들이 매달려 있었다. [중략] 나는 실란 앞에 쭈그리고 앉아 흰 꽃들을 들여다보았다. 곧 어두워지려 하고 있어 흰빛이 창백해 보였다. 작가님 글에서요.
_실파, 실란. 흰빛, 창백. 어울리네.
_두보 시구가 생각나네.

淸夜沈沈動春酌(청야침침동춘작) 
燈前細雨첨花落(등전세우첨화락) * 첨: 詹에 대 죽 머리가 있는 한자.

번역을 찾아본다.

맑은 밤 고요한데 봄 술잔을 드니
등불 앞 가는 비에 처마의 꽃 떨어진다. 

'두보 초기시 역해'(이영주/박석/이석형/김만원/김성곤 역해, 솔출판사, 1999), 467쪽에서. 박석 교수 기명이 되어 있다. 첨화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첨화’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처마 근처의 꽃이라고 보는 설이고, 하나는 처마 앞의 밤비가 가는 것이 꽃과 같다는 설이고, 하나는 처마의 물이 떨어지는데 등잔불빛 때문에 꽃과 같이 아름답다고 보는 설이다. 여기서는 첫 번째의 설을 취한다. (같은 책, 472쪽에서.)
이 역해서를 참고로 하여 졸역하고 덧글을 달아보았다.

맑은 밤 침침한데 봄 기분 잔을 들고
등불 앞 가랑비에 박꽃이 처마 아래로 떨어지고

淸夜沈沈動春酌(청야침침동춘작) 
燈前細雨첨花落(등전세우첨화락) * 첨: 詹에 대 죽 머리가 있는 한자.

맑은 밤이다. 빛이 약하여 어두컴컴하다. 침침하다. 봄 기분 술잔을 든다. 등불 앞에 가랑비가 내린다. 지붕 위에 올린 박의 흰 꽃이 처마 아래로 진다.

_난해할 수도 있는 시구이네요. 이백(李白)의 ‘山鳥下廳事/첨花落酒中’, 논어(論語) 양화(陽貨) 편의 '포과공현'(匏瓜空懸)은 이해를 도와주네요. * 첨: 詹에 대 죽 머리가 있는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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