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맞춤 맛보기

문 밖으로 걸음을 떼는 일은 신발 끈을 끌어당기고 끈 구멍 끝까지 괄약근처럼 조이는 것으로 시작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바깥 오프라인이 끝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신발 끈 풀기였다. 집 안에서 온라인에 오르려고 클릭을 하는 것은 나는 양탄자를 타고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유선 모니터는 큰방에서 무선 넷북은 작은방에서 제 불빛을 밝히고 제 쥔을 안내했다. 실내에서 모녀가 모니터를 각자 앞에 놓고 메신저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컬러 무비를 보다가 흑백 영화를 보는 운치가 우러났다.  
_봉 아페티!(bon appetit!)
_폴 A. 새뮤엘슨 교수가 경제학 책 서문에서 쓴 적이 있었어요. 
_별세했다면서?
_뉴스에 났어요?
_MIT 홈페이지에 속보와 상보가 났어. http://web.mit.edu/newsoffice/2009/obit-samuelson.html
_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Sarah Chang)이 반한 신발 컬렉션은 주세페 자노티(the Giuseppe Zanotti) 것이었네요.
_뉴스에 났니?
_트위터(twitter)에 올려서 폴로어(followers)에게 메시지가 날아왔었어요.
_140자 단문 트위터에 트이는 세상이 재밌어.
_메시지 원문 올릴게요.

I can't believe how beautiful the Giuseppe Zanotti shoe collection is this season! Gorgeous!!! 
3:54 AM Sep 26th from txt
http://twitter.com/sarahchang

_주세페 자노티 신발가게도 가보자.
_홈페이지를 복사해서 붙일게요.
http://www.giuseppe-zanotti-design.com/index.asp
_신발가게를 찾는 일은 키워드가 맡아서 해주는 세상이야.
_신발가게를 찾는 일은 겨울 산에서 봄꽃을 찾는 격이었다. 작가님 글이에요. 시위 현장에서 신발을 잃고 나서 신발가게가 그랬다는 뜻이에요.
_신발을 들여놓는 일 이야기를 해볼까.
_기대해요.
_법정(法頂) 스님(1932년생)의 어느 산문에 '폭풍의 언덕'이란 말이 스쳐가듯 나와. 그 부분을 한번 보고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할게.

오늘은 비바람이 몹시 휘몰아치고 있다. 앞마루에 비가 들이치고 창문에도 이따금씩 모래를 뿌리는 듯한 소리가 난다. 섬돌 위에 벗어놓은 신발을 들여놓으려고 밖에 나갔더니 대숲은 머리를 풀어 산발한 채 폭풍우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날 내 산거(山居)는 그야말로 폭풍의 언덕. 재미가 없다.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자꾸만 성이 가신다. 부엌에 끓여 먹으러 들어가기도 싫다. 숲속에서 지저귀던 새소리도 끊어지고 비바람소리만 심란하게 들릴 뿐. 내 생애가 이런 날만이라면 나는 허락받은 나머지 세월을 미련없이 반납하고 기꺼이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한때일 뿐. 변함없이 한결같이 지속되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게 마련이다. 흐린 날이 있으니 개인 날이 있고, 궂은 세월이 있는 그 대가로 좋은 세월이 있을 수 있다. 산상의 맑은 햇살과 툭 트인 전망을 내다보려면 오늘 같은 폭풍우도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햇볕과 온기를 받아들이려면 천둥과 번개도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니까. 아름다운 장미꽃을 보려면 귀찮은 진딧물도 보아야 하듯이.

오늘처럼 비바람이 거센 날은 망망한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나 다름없는 산중. 언젠가 낯선 나그네가 찾아와 스님은 이런 산중에서 무슨 재미로 혼자서 사느냐고 묻던 말이 이런 날은 새삼스레 되살아난다.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그렇다, 사람이니 사는 재미가 있어야겠지. 무슨 재미로 사는지 아직도 잘은 모르지만, 조그만 일에서 즐거움을 누리면서 내 식대로 살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또 지극히 선한 것들을 지켜보면서 함께 있음에 감사를 드리면서. [하략]

출처는 '이 비바람이 개이면'이고, '산방한담'이라는 책 속에 실려 있어. 이 책은 샘터사에서 1983년에 초판을 펴낸 이래, 몇 번 책 모습을 바꾸면서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이야.

법정 스님이 쓴 이 산문(散文)의 앞 부분(♧)과 에밀리 브론테가 지은 소설 '폭풍의 언덕' 제1장(*)을 비교해 본다. 같거나 비슷한 뜻의 키워드(keyword)가 등장하나 글을 쓰는 곳의 임장감은 색다르다. '폭풍의 언덕' 우리말 옮김은 기존 몇몇 번역판을 참고하여 옮긴 것이다. 참고로 해당 원문을 달았다.

♧ 대숲은 머리를 풀어 산발한 채 폭풍우에 시달리고 있었다.
* 폭풍의 언덕 집 가에 제대로 자라지도 못 한 전나무 몇 그루가 쓰러질 듯이 서 있는 것으로 봐서 언덕 등성이를 타고 몰아닥치는 된바람이 얼마나 드센지 가늠할 수 있다.
([전략] one may guess the power of the north wind, blowing over the edge, by the excessive slant of a few, stunted firs at the end of the house; [후략])

♧ 부엌에 끓여 먹으러 들어가기도 싫다.
* 부엌은 아예 다른 쪽으로 쑥 들어가 있도록 해 놓았다.
([전략] the kitchen is forced to retreat altogether into another quarter: [후략])

♧ 산상의 맑은 햇살과 툭 트인 전망을 내다보려면 오늘 같은 폭풍우도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씨에는 폭풍의 언덕 집은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정면으로 그 폭풍우를 받아야 한다. 정말로 이 집 사람들은 그 꼭대기에서 사시사철 맑고 상쾌한 바람을 쐬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전략] the atmospheric tumult to which its station is exposed in stormy weather. Pure, bracing ventilation they must have up there, at all times, indeed: [후략])

♧ 망망한 바다로 둘러싸인 섬
* 날씨가 좋은 한 달을 바닷가에서
([전략] a month of fine weather at the sea-coast, [후략])

♧ 사람이니 사는 재미가 있어야겠지.
* 나는 무뚝뚝하기로는 나보다 몇 수 위일 듯한 사람에게 더욱 재미가 났다.
( [전략] I felt interested in a man who seemed more exaggeratedly reserved than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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