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의 무풍지대에서 바깥 세상의 바람이 점점 더 드세지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를 창 너머로 지켜본다. 날마다 입금하듯 금빛 잎을 덜어내던 은행나무의 우듬지에서 움죽거리던 잎이 중력을 이기고 공중부양을 보여줬다. 딸이 무중력 상태처럼 걸음을 거두고 식탁에 다가앉았다.

_나는 점점 더 굵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딸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읊조렸다. '눈송이'의 '눈' 부분에서는 페르마타(fermata) 악상 기호가 붙은 듯 늘여서 읊어내어 맛을 냈다.
_작가님 글이구나. 눈송이가 점점 굵어지고 시야를 가리면서 눈앞에 보이던 것이 점점 없어지고 면벽을 체험하겠네.
_생각을 가다듬는다고 했어요.

_겨울날이니?
지금 여기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서 목도리로 목감기를 하여 목감기도 안 하는 시기로 들어가고 있었다.
_문학전집을 순서대로 육십 권을 읽고 나니 삼월이었다.
_동문서답인가 우문현답인가.
_작가님이 글 앞쪽에 쓴  구절을 읊었어요.
_동안거를 마치고 나온 구도승이 이런 기분일까. 백일기도를 백 일 이루어낸 기분이 그럴까.
_순서대로 읽은 것이 평범한 방법이면서도 특별하다는 인상을 줘요.
_눈길을 끄는 제목이나 아는 작가에 먼저 손을 대는 것은 우선순위를 초보자 눈대로 매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있고 편식으로 병이 들어갈 수 있어.
_전문가의 안목으로 정한 순서를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죠. 순서대로 읽기는 골고루 먹기로 건강을 누리는 것과 같은 이점이 있어요.
_우직한 것이 우수할 수 있는 사례이구나. 공부 끝도 우직하게 하는 사람이 잘해.

_사 마일을 걸어서 히스클리프(Heathcliff) 씨 정원 입구 문에 다다른 순간에 깃털 같은 눈송이가 날리고 눈보라 조짐이 나타나요. 
_에밀리 브론테 소설 이야기이구나. 록우드(Lockwood) 씨였지.
_된서리가 내렸고 사지를 덜덜 떨 정도로 바람이 불어대었어요.
_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집이라서 폭풍우가 몰려오면 대기에 격동이 생기고 이 지역에서는 '워더링'(wutheirng)이라는 말로 나타내었다고 했지.
_집 이름이 워더링 하이츠(Wuthering Heights)로 불릴 만하죠.   
_날씨 때문에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스무 해 전에 죽은 캐시(Cathy)의 일기를 보면서 독자가 이야기에 빠지지.   

근린공원 정자 앞에 구청에서 비둘기가 날고 있는 도안을 그려넣은 쓰레기통을 놓아두었고 굴참나무 낙엽이 날아들어 늦가을 소식도 들어가는 통 입구에 착지하고 주인 부재 집에 들른 사람처럼 곧 떠난 참새 사진을 담아오고 참새 라틴어 학명 파세르 몬타누스(Passer montanus)를 메모한 남편이 천년 전 소설 '겐지모노가타리' 이야기로 맞불을 지폈다.
_일본의 고전문학에서 손꼽히는 '겐지모노가타리'(Genjimonogatari, The Tale of Genji, 원제 : 源氏物語)에 눈보라 몰아치는 밤 이야기가 나오더군. 겐지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왕자. 이 작품은 11세기 초두에 쓰여진 것으로 작자는 무라사키시키부(Murasaki Shikibu, 紫式部, 973~1014)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고. 에밀리 브론테 소설 속칭 ‘폭풍의 언덕’, ‘워더링 하이츠’(1847)와 비교를 해보면 대조를 보여. 불빛, 귀신과 유령, 잠 깨기와 졸음으로 나누어 이야기해볼게.  

 

불빛. 겐지 이야기에서는 기름불(유화 油火, 원문 : 大殿油 ohotonabura)이 꺼지고 말며 날이 샐 때까지 불이 꺼진 채 있는데, 록우드 이야기에서는 랜턴(lantern)을 꺼뜨리는 해프닝에 촛불(candle)을 켜며 책(일기 포함) 읽기를 해.

귀신과 유령. 겐지 이야기의 요괴는 생사람을 해코지하여 죽게까지 하지. 황폐한 집에 사는 요괴가 잘생긴 겐지를 사모하여 겐지의 애인(이름 : 박꽃[夕顔, 유가오])이 죽는 사건이 있었지. 한편 록우드는 애인(히스클리프)을 그리워하여 찾아온 유령(ghost, 죽은 캐시의 것)과 맞닥뜨려.
잠 깨기와 졸음. 겐지(당시 18세)는 비좁은 방, 주위에 인기척이 많은데도 불안해하며 잠이 자꾸 깨지만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고 날이 밝아와. 록우드는 이층 방에 홀로 졸다가 이십 년 동안 떠돌아다닌 유령과 만나는 사건이 생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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