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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 - 초기 기독교의 예수 신앙에 대한 역사적 탐구
래리 허타도 지음, 박규태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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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두터운 분량에 비해서 매우 단순한 명제를 가지고 있다. 출판사 소개글이나 여러 학자들의 추천사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처럼 1913년에 출간된 Wilhelm Bousset의 <Kyrios Christos>의 명제를 반박하는 책이다. Bousset는 소위 종교사학파(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의 일원으로 그의 주장은 Jesus Devotion(예수 경배/헌신/섬김)이 이레나이우스를 거쳐서 2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Larry Hurtado는 이 주장에 반박하며 Jesus Devotion의 출발점을 1세기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이 단순한 테제를 위해서 저자는 1,000페이지가 넘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왜 이렇게 방대한 증거가 필요할까? 일단 저자의 초점이 "역사적인 현상(historical phenomenon)"이기 때문이다. 신앙적인 현상(religious phenomenon)이 아니다. 저자는 오늘날 남아있는 역사 사료들과 각종 증거들의 토대 위에서 작업하기 때문이다. 그 토대에 대한 해석은 잠잠히 합의를 이루기 보다는 여전히 폭발적으로 논쟁이 들끓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저자의 방대한 저술 속에는 수많은 학자들의 논의가 담겨 있다. 그 방대한 논의를 저자는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이런 탁월함이 오히려 집대성하기 불가능해보이는 작업을 성취했고, 따라서 엄청난 분량의 저술이 쏟아진 것이다. (참고로 저자의 참고문헌 목록만 67페이지 분량이다)

다른 방대한 저술의 서평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이 책의 요약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핵심 요약은 이미 언급했다. Jesus Devotion은 2세기 말이 아니라 1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저자는 본문에서 평범한(!) 독자가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호흡곤란으로 질식할 정도로 치밀하고 섬세하고 논의를 펼치지만, 다행히 직접 매 장마다 요약 및 결론을 제공해주는 친절함을 베풀어준다.

어쨌든 이 책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도록 핵심 요약보다는 구체적으로 저자의 입장을 확인해보자. 저자가 Jesus Devotion이 1세기부터 태동했다고 주장할 때, 근거로 제시하는 원동력/요인들은 다음과 같다(pp.158-9).


 

1. 유대교의 배타주의적 유일신론
 : 가장 중요한 정황이자 강력한 형성 동인이다.

2. 예수가 끼친 효과들, 특히 그의 행적이 초래한 양극화 효과
 : 한 극단에서는 예수를 정면으로 저주하고 유죄를 선고했고, 다른 극단에서는 소위 예수 운동의 최초 집단들이 이후에 지속적으로 예수를 긍정적 주체로 부각시켜 나가는 데 핵심적으로 기여했다.

3. 계시적 신앙 체험들
 : 이 체험들은 두 가지 확신을 가져왔다. (1) 예수가 하늘의 영광을 받으셨다는 확신, (2) 섬김/헌신의 삶을 통해 예수에게 특별하게 경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예수 운동 집단들에게 심어주었다.

4. 더 커다란 종교 환경과의 만남
 : 특별히 유대인들의 논박에 맞서고 당시 종교 환경에서 대세를 이루던 이방 종교의 관행에 맞서 그리스도인들의 Jesus Devotion이 갖는 차별성과 정당성을 논변하는 역동성이 이 Jesus Devotion 흐름을 더욱 촉진했다.

 


이 고찰은 모두 1장에서 제시된다. 저자는 네 가지 요인들은 2~10장까지 광활한 작업 속에서 독자들에게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준다. 바꾸어 말하면, 이 책을 1장만 읽어도 책 전부를 읽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도 있다. 학자는 예외적이겠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아마도 숨을 고르면서 이 논의를 추적하기도 벅찰 수 있다. 이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받은 인상을 두서없이 열거하겠다.


첫째, 너무나 당연하게도 역사 증거로서 바울 서신과 복음서에 가장 많은 초점이 맞춰진다. 1세기의 역사 사료는 요세푸스나 타키투스 같은 고대 저술가를 제외하면 이 주제에 쓸모 있는 사료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저자의 입장에서 이 사료들은 바울 서신이나 복음서에 필적하는 수준이 아니다. 어쨌든 3장에서 사도행전이 다루어 지는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했다. 1세기 Jesus Devotion의 가장 선명한 고백 중 하나인 스데반 집사의 언변에 저자가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각주에서 언급되는 수준에 불과하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보다 "헬라파와 히브리파"에 더욱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 상당히 의아하다.

둘째, 의외로 이 책은 매우 감동적이다. 언뜻 보기에는 학문적 논의만 점철되어 있는 것 같지만, 책 도처에서 저자는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나님으로 이해했는가?"를 대답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답변은 필연적으로 신앙고백적이기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에게 경배하는 독자들의 마음 안에서 여전히 동일한 고백으로서 반향을 일으킨다. 이 울림은 저자가 책의 후반부에서 1세기의 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 AD c. 35 or 50 – 98 to 117)의 에베소 서신을 인용할 때, 절정에 도달한다. 저자는 헬라어 본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고, 더구나 출판사에서 원문을 수록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서 그 원문과 번역을 한 번 확인해보자.

εις ιατρος εστιν, σαρκικος και πνευματικος, γεννητος και αγεννητος, εν ανθρωπω θεος, εν θανατω ζωη αληθινη, και εκ Μαριας και εκ θεου, πρωτον παθητος και τοτε απαθης,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ο κυριος ημων. [에베소 서신 7.2]

치료자가 한 분 계시니, 육신을 지니셨으나 영이신 분, 낳은 바 되셨으나 태어나지 않으신 분, 인간 안에 계신 하나님, 죽음 안에 계신 참 생명, 마리아에게서 동시에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 처음에는 고난 아래 나중에는 고난 위에 계신 분,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Hurtado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고백하는 1세기 가장 뛰어난 문장"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이 문구의 마지막에 책 제목이 들어있다. 주=Lord=ο κυριος, 예수=Jesus=Ιησους, 그리스도=Christ=Χριστος. 이 고백이 21세기에 독자의 마음에 울려퍼지는 원동력은 아마도 위에서 언급했던 세 번째 요인, 즉 "계시적 신앙 체험"에 해당될 것이다.

셋째로 최신의 학술 논의를 독자들에게 제공해준다. 2003년에 이 책이 나온 만큼 그 당시까지 신약학에서 이루어진 최신 정보가 모두 집약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외경이나 최신 성서학계의 동향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많이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 가장 격렬하게 논의되는 주제는 오늘날 여전히 논쟁이 끝나지 않은 "인자" 해석이다.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저자가 결론 내리는 입장만 간단하게 인용해보겠다.

" 인자는 결코 칭호가 아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Jesus Devotion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특징. 어휘론(Lexicology)의 관점에서 인자는 예수가 인간으로서, 유일무이한 인간/인간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1세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인자를 신앙 고백 때 예수를 부르는 칭호로 사용했거나, 이 표현 자체가 그 본질상 기독론과 관련된 어떤 주장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인자에 대한 오늘날 학자들의 폭발적인 논의들이 펼쳐지지만, 결국 저자는 이 저술의 주제에 입각해서 1세기로 범위를 한정시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학자들은 "인자" 문제를 기독론의 칭호 문제와 연결짓는다. 그러나 저자는 증거를 토대로 신중하게 유보한다. 여기서 이 책의 독서를 위해서 한 가지만 제안하자면, 독자가 저자가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 결정하는 해석을 모두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자는 이 걸출한 학자의 방대한 작업 속에서 역사 사료를 어떻게 다루며 어떻게 해석하며 어떻게 다른 입장을 비평하고 어떻게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지 그 과정은 마음 속에 각인시킬수록 유익할 것이다. Larry Hurtado는 섣불리 결론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그는 아우를 수 있는 모든 사료와 주장들을 검토한 다음에 자신의 입장을 내세운다. 이런 치밀한 국면은 일반적인 신앙서적이나 전문적인 신학서적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종류에 속한다. 더불어 여러 외경들과 전승들과 나그함마디 문서 등 방대한 자료들을 집약적으로 다루는 저자의 솜씨도 감탄을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방대한 저술의 짤막한 서평을 매듭짓겠다. 이 책은 무려 1200페이지 분량이다(원서는 약 770페이지). 우리는 21세기 학자의 1-2세기 해석이 주는 의의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무슨 목적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할까?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기존의 그리스도 이해, 기존의 성서 해석, 기존의 초기 그리스도교 이해에 얼마나 많은 변화를 야기시킬 수 있을까? 역사적이고 학문적인 저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섣불리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역사 현상을 다루는 저술이라고 신앙의 차원을 분리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저자의 주장이 맞다면, 이 역사 현상 역시 "신앙 체험"에서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가장 행복하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1-2세기의 Jesus Devotion 신앙 체험과 동일한 정체성을 경험하는 독자일 것이다. 역사와 신앙은 직결되는 문제일 수 있다. 아마존닷컴에서 어떤 서평자는 이 책을 명백히 편견이라고 혹평했다. 마찬가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1세기에도 있었다. 고 기독론(High Christology)을 고수하는 저자에 따르면, Jesus Devotion의 역동성은 이런 입장과 조우할 때마다 더욱 촉진되었다. 이그나티우스의 말을 반복하겠다. "그는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덧붙임(1) 흥미롭게도 Larry Hurtado는 자신이 반박했던 Bousset의 <Kyrios Christos> 2013년 영어 번역본에 서문을 작성했다.


덧붙임(2) 번역자는 주요 현대 신학자들을 소개하는 엄청난 노고를 독자들에게 기꺼이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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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처치 - 예수님을 따라 신실하게 일하는 인격적 교회론
크리스토퍼 스미스 외 지음, 김윤희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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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빌 하이벨스의 윌로우크릭처치의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자신에게 충고해준 워렌 위어스비의 한 마디로 이 책의 탄생을 대변한다.

“이것 하나만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복은 절대로 프랜차이즈 형태로 받을 수 없습니다.” 

저자는 이 고민으로부터 출발해서 '슬로 푸드' 아이디어를 통해서 <슬로 처치>를 탄생시켰다. 이 책은 제목이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내용이 간단명료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책을 따로 요약하지는 않겠다. 엄청난 찬사를 받아온 이 책의 매력을 나름대로 세 가지로 평가하고, 그 매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도 살펴보는 것이 이 서평의 목적이다.

1. <슬로처치>는 뜬구름잡는 이야기가 아니다. 교회에 대한 고민이며, 그 고민이 현실(!)에 뿌리내려서 영글어진 열매이다. 그 고민의 주체는 두 저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는 많은 신자들의 고민이다. 그 고민은 성서를 양분으로 현실의 험난한 토양을 뚫고 나와서 자라나고 있다. 현실은 언제나 강조되어야만 한다. 저자는 현실의 상황을 지켜보고 대화한다. 현실의 사람들과 소통한다. 현실의 교회들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다. '슬로 푸드'가 단지 이론 작업이 아니라 현실의 변화를 꾀하는 운동인 것처럼, '슬로 처치' 역시 이론에 머물지 않는다. 이 책이 교회 이론에서 교회 현실을 끄집어 냈다면, 그저그런 책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교회 현실을 성서 그 자체에서 취했으며, 그 현실을 다시 이론으로 정리한 책이기 떄문에 여타의 교회 관련 도서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위치에 서 있다. 복잡한 사상과 논리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은 결코 어렵지 않고, 모든 내용의 토대가 항상 현실이기 때문에 다른 책들보다 훨씬 실제적이다.

2. 이 책은 교회를 논의하지만 기존 담론들을 답습하지 않아서 신선하다.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미 교회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궁금증은 교회성장도 아니고 교회의 참된 표지도 아니다. 주일성수가 교회의 회복이라고 광야에 나가서 소리치고 싶은 충동도 없다. <슬로처치> 이런 담론들이 지겹거나 신물나는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그렇다면 그 신선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 가지는 위에서 언급했던 '현실성'이다. 다른 한 가지는 저자 특유의 '접근법'이라고 평가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독자들은 저자가 인용하는 책의 대다수가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는 단지 독서만으로 성서에 입각한 창조적인 담론이 탄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 마디로 저자는 대중적인 책을 읽고서 남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생각을 성찰했고 적용했다.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슬로 처치'라는 저자의 해결책이 아니라 '슬로 처치'에 도달한 고민의 접근법이다. 예를 들어, 기존의 교회 담론에서 식사는 성찬에 비해서 얼마나 소외당했는가? 교회에서 사람들은 노동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이 책의 매력은 이처럼 다수에게 홀대 당한 요소들을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아주 구체적인 현실을 배경으로 말이다. 이런 접근 방식이 바로 참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비밀인 셈이다.

3. <슬로 처치>는 완성이 아니라 과정을 강조한다. 기존 담론들의 빈곤한 상상력은 어쩌면 완성된 그림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파생된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는 완성과 성취를 기다리는 과도기에 있다. 그 도상에 초점을 맞추는 저자의 고민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느림'이 핵심인 것이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지만, 인간에게는 하루가 하루 같고 천년은 천년 같다. 하루는 하루다. 우리는 주님의 날을 앞당길 수 없다. 저자는 마지막 날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이전의 나날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교회의 윤리와 생태와 경제를 말하는 것이다. 여전히 일부 사람들에게 교회의 윤리는 개인의 경건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개별성과 공동체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생태와 경제는 공동체가 공동체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그려나가야 할 그림들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많은 교회들이 완성에만 열광할 뿐 공동체로서의 이런 생태와 경제를 대부분 외면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깨달을 것이다.

<슬로 처치>는 이렇게 매력이 넘치는 책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대로 접목하기 어려운 요소가 있다. 바로 지역성(Locality) 문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종일관 지역 커뮤니티를 강조한다. 그러나 편의점 개수보다 더 많은 교회들이 난립한 한국에서는 서울이나 경기도나 강원도나 부산이나 대다수의 교회들이 지역성을 고민하기 어려운 맥락 속에 있다. 농어촌에 있는 교회들이라면 오히려 지역성이 선명하지만, 도봉구나 노원구에서 지역성의 차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다음으로 한국 교회에서는 복잡한 이해타산의 관계가 문제다. 사역자들은 저자처럼 사역하려면 개척교회 이외에는 답이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소위 담임교역자와 부교역자들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들의 이해타산 관계도 한국은 미국과 실정이 다르다.

여전히 <슬로 처치>가 풀어주지 못하는 고민들을 한국 목회자들과 신학자들과 성도들의 숙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깊은 통찰과 창조적인 적용으로 인해서 저들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토의 문제를 극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지적한 아쉬운 점들을 조금 더 생각하고 조금 더 논의해서 미국과 한국 사이의 간극을 이으려는 훌륭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워렌 위어스비의 말은 <슬로 처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슬로 처치라는 프랜차이즈로 교회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 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저자는 이 질문을 재고하도록 독자들에게 도전하며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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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신학
그레고리 빌 지음, 김귀탁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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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방대한 두께와 크기는 물리적으로 독자를 압도하기 쉽다. 따라서 서평은 최대한 간결하게 정리한다. 

1. 이 책은 통전성을 추구한다. 신약의 각 권을 개론하는 통상적인 ‘신약개론’의 방법론이 내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저자는 줄거리(storyline)을 중심에 놓는다. 

2. 이 책의 주제는 종말론이며, 방법은 줄거리이고, 도구는 ‘신약의 구약 사용’이다. 

3. 다음 줄거리의 확장과 요약이 이 책의 전부다. “예수의 생애, 고난, 죄인들을 위한 죽음, 특히 성령에 의한 부활로써 종말론적 ‘이미와 아직’의 새 창조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시작되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믿음으로 주어지며, 신자들에게 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세계적 사명을 주시고 불신자들을 심판하신다.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4. 책의 구성은 크게 여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구약(1-6장) - 신약(7-14) - 구원(15-16) - 성령(17-19) - 교회(20-24) - 성도(25-26). 

5. 목차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종말론’이라는 큰 주제 아래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6. 성경 해석은 구약의 경우에 창세기, 출애굽기, 시편,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이 압도적이다. 신약은 골고루 활용된다. 

7. 많은 저자들이 인용되지만 다음 저자들은 Beale의 주장의 토대를 세우는 디딤돌에 해당할 정도로 중요하다: 앨런 로스, 윌리엄 덤브렐, 톰 라이트, 김세윤, 리처드 개핀 Jr., 게할더스 보스, 막스 터너. 

8-1. 1,000페이지를 거의 다 읽었을 때, 성경이 예고하는 장엄한 대서사시를 풍성하게 맛볼 수 있다. 더불어 줄기차게 이루어지는 예언을 통해서 영혼이 다가올 마지막 날을 고대하게 된다. 그 소원은 저자가 구약의 성취를 암시하는 신약 성경 본문을 폭넓게 다루는 과정에서 더욱 간절해진다. 

8-2. 결론만 읽었을 때, Beale이 철저하게 구약과 신약을 주해하는 탁월성과 그 성취가 보여주는 소망과 감동을 맛볼 수 없다. 무엇보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그 방법론의 정수를 놓치게 된다. 근래에 이런 모본을 보여주는 저작은 달리 찾아볼 수 없다. 

9. 저자는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 이 책의 방대한 신학, 즉 종말이 손쉽게 소화될 수 없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수년간 전하고 가르칠 필요성을 역설한다. 

10. 15장 칭의는 새관점을 아우르면서 칭의의 장래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의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성서신학의 관점에서 로마서 3장 25절을 집중적으로 주해한다.

11. 가장 통찰력이 돋보이는 부분은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성취 사이에 반전이 있다는 고찰이다. 구약과 신약은 연속적이지만, 신약에서 실제 성취된 모습에서는 예상치 못한 전개가 두드러진다고 Beale은 강조한다. 이 특징은 인간이 비록 종말을 예견하지만, 그 예견을 뛰어넘는 현실을 하나님이 성취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수렴된다. 

12. <성전신학>,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인가>의 요약 챕터가 수록되어 있다. 두 저작을 읽은 독자는 이 책의 상당부분을 지나칠 수 있다. 반면 두 저작을 읽기에 부담스러운 독자는 이 책의 요약 챕터를 읽으면 된다. 또한 Beale의 신약주석서인 NIGTC의 요한계시록, 신약의 구약사용 시리즈의 골로새서가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신약의 구약 사용 핸드북>의 완벽한 실천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13. 한마디로 G.K. Beale 은 커다란 두루마기에 거대한 붓을 들고 종횡무진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자신의 모든 저작을 포괄하는 모습 속에서 필생의 역작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14. 원서에는 성구인덱스가 수록되어 있지만, 부흥과개혁사 번역본에는 제외되어 있다. 더불어 인명인덱스도 원서에 비해서 1/3 정도만 수록되었을 정도로 상당히 불완전하다. 무엇보다도 원서의 부제에서 “Unfolding”을 생략했다는 점은 치명적이다.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신약 성경 신학: 신약 안에서 구약의 펼쳐짐(Unfolding)>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자의 번역은 시종일관 매끄러운 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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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학
게르하르트 마이어 지음, 장해경 외 옮김 / 영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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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90년에 『성경 해석학』을 발간함으로써 그가 거부한 역사비평적 해석 방법론에 대한 적극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위의 문장은 저자 소개에서 가져왔다. 만일 이 책을 통해서 성경해석 기술을 습득하기 원하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에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 소개에 명시된 것처럼 이 책의 목적은 19-20세기에 독일 신학계의 주된 흐름 중 하나인 역사비평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며, 그 자리에 올바른 성경해석이라는 대안을 내세우는 것이다.



먼저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총 14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시 재구성한다면, 아래와 같이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I. 1~6장은 서론에 해당하며 해석학, 해석자, 해석의 역사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II. 7~11장은 성경의 영감 및 권위, 성경의 통일성과 역사성을 다루고 있다.  조직신학의 성경론과 상응한다.
III. 12-13장은 이 책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역사비평에 대한 검토와 비판에 해당한다. 더불어 역사비평에 대한 과거의 대안 및 대안의 검토도 포함된다. 
V. 14장은 종합적인 대안, 즉 결론이다. 




이제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고, 전체적인 평가로 마무리하겠다. 


먼저 저자는 한결같이 성경해석의 핵심을 전부 '계시'에서 찾고 그 권위에 호소한다. 


"우리의 원칙은 해석이 계시 자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자(p.90)." 그리고 저자는 성경 계시가 해석자에게 일어나는 방식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1)역동적으로(Dynamisch) 2)윤리적으로(Ethisch) 3)인식적으로(Kognitiv). 이 항목은 14장의 결론의 뿌리에 해당한다. 마이어는 여기서 신학자와 비신학자의 구분이 3)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본다. 더 나아가서 1)의 경우, 바꾸어 말하면 순종이나 행동의 차원에서는 비신학자들에 속하는 그리스도인이 신학자보다 훨씬 더 깊은 이해에 머물 수 있다고 본다. 더불어 3)의 항목이 1)과 2)의 항목보다 결코 우월한 것도 아니다. 마이어는 계시 앞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석자로서 동등하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 주장은 다분히 학문적인 접근으로 성경해석을 시도하려는 학자 집단에 경고하는 것이다. 결국 성경해석에서 계시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 특히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란 말인가? 이 함정을 마이어는 놓치지 않는다. 이외에도 해석자 및 해석작업의 정의를 통해서 불과 몇 페이지로 뛰어난 정의와 통찰력을 집약하고 있지만, 이 서평에서는 과감히 생략하겠다. 


둘째로 저자는 역사비평의 주요 근원을 합리주의 철학자들과 계몽주의에 기울어진 신학자들이라고 본다.


"본격적인 계몽신학의 형성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그밖에 영국의 이신론과 ... 신학자들의 아들들... 에 의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세기에 득세한 역사비평이 계몽주의의 아들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pp.298-300)."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역사비평의 뿌리, 과정, 결말, 상응했던 과거의 대안들을 차례차례 개괄한다. 여기서도 마이어의 탁월성이 드러나는데, 세부적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독자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자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미주의 방대한 분량과 비교했을 때 더욱 돋보인다. 마이어는 독일 신학계와 영미 신학계의 주요 저작들을 대부분 섭렵하고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다. 역사비평의 요약은 12-13장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요약하지 않겠다. 한가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마이어가 역사비평의 시대에 대안을 제시했던 자들을 '중도비평'이라고 정리하고 그들과 자신의 입장 차이를 명시한다는 점이다(pp.435-6). 


위의 두 가지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마이어는 역사비평의 가장 큰 모순점이 "무엇이 계시이고, 무엇이 계시가 아닌지 인간이 결정한다는 점"이라고 본다(p.309). 그는 여기서 두 가지를 제시하는데,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점과 성령과 새 피조물이라는 영적 차원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역사비평을 꾸짖는다. "내용 비평은 기껏해야 쓸모없는 수단을 가지고 쓸모없는 대상에 적용하려는 시도"이며 "인간자율"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결국 방법론적인 대안은 무엇일까? 추천사에서도 잘 언급된 것처럼 저자는 "종전의 ‘역사적-성경적 방법’(historisch-biblische Methode)이란 말 대신에 ‘성경적-역사적 방법’(biblisch-historische Methode)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이 방법의 내적-외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마이어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검증이 필요한 불완전성을 내적으로 가진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해석자로서 성경해석방법을 동원한다. 마이어의 첫 제안은 "정경이라는 최종 형태"가 기준점이다. 둘째로 "유비의 척도"를 옮겨야 한다. 계몽주의자들은 유비를 통해서 기적을 제거하고 초자연성을 제거했지만, 우리는 유비를 정 위치로 다시 옮겨서 기적과 초자연성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과정에서 마이어의 해석학은 여타 다른 정경 해석학에서 볼 수 있는 논의를 담고 있다. 그렇지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마지막으로 한 가지 특징은 "대화"이다. 성경과 성경 사이의 대화! 해석자 사이의 대화! 교회와의 대화! 세상과의 대화!! 이렇게 네 가지로 마이어는 이 책을 결론 짓는다. 




이제 간단히 정리하면서 서평을 마무리하겠다. 다시 말하지만, 우선 역사비평의 문제의식이나 역사비평에 커다란 관심이 없는 독자는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19세기와 20세기의 독일 성서신학의 흐름을 쉽게 개괄하고 싶다면 이 책은 가장 훌륭한 안내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구체적인 성경해석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항의하는 독자는 책의 본질을 오해한 셈이다. 


둘째로 마이어는 독창성은 돋보이지 않지만, 역사비평의 인솔교사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그 점은 1장과 5장에 돋보이며, 역사비평을 개괄하는 12-13장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셋째는 책의 단점에 해당한다. 구성의 중간 부분에 해당하는 조직신학적인 '성경론'은 소위 너무 지나친 요약이나 해설로 인해서 책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 부분을 숙독했을 때 얻는 유익은 분명히 역사비평의 검토 차원에서 필요하지만, 신학적인 수준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장황하게 느껴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소하게 아쉬운 사항이다. 번역과정 속에서 '과학'이라는 번역이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독일어 원어가 무엇으로 쓰였는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학문'으로 번역되어야 훨씬 자연스러운 문맥이 도처에 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이 점은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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