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은 설득하는 사람의 권위보다 설득당하는 사람의 형편과 의지에 더 의존한다. 말하는 사람이 효과적인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효과적인 말로 듣기 때문에, 그 경우에만 설득이 일어난다. 심지어 스스로 결정한 것을 추인받거나 이미 한 선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부의, 권위를 가진 목소리를 설득하는 자로 불러오기도 한다. (p.48)

도착하려는 의지는 시곗바늘에게 없다. 그런 게 있다면 어딘가에 멈춰 설 것이다. 걷는 자의 다리에도 이 의지는 없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뒤로 걷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앞을 향해 걷는다. 그런데 앞은 언제나 앞에 있다. 앞으로 가도 앞은 앞에 가 있다. 앞은 점령되지 않는다. 앞에 도착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걷는 사람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 없다. 땅을 밟고 떼는 두 다리에 의해 무엇인가가 밀려난다. 그뿐이다. 그러면 그때 밀려난 만큼 다가오는 것이 있다. 우리가 걸어서 거기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으면, 걸은 만큼 거기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가 두 다리로 부단히 걸어 그 시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단한 걸음에 의해 그 시간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여섯 시간을 걸었다. 나는 오늘 여섯 시간만큼 나를 밀어낸 것이다.(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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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여느 때와는 다르게 기도하는 것을 나는 느꼈고, 제대로 된 고해에의 욕구를 나는 자주 타는 듯 느꼈다. 그러면서 또한 내가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모든 것을 바로 말하고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먼저 느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 일을 다정하게 받아들이고 나를 몹시 아껴주며 실로 유감스러워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아직 열한 살도 안 된 아이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사람들도 더러 있을 줄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 일을 이야기하지 않겠다. 인간을 보다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다. 자신의 감정들의 한 부분을 생각 속에서 수정하기를 익힌 어른은, 어린아이에게도 나타나는 이런 생각을 잘못 측정하고, 이런 체험들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그 당시처럼 깊게 체험했으며 괴로워했던 때도 드물다.(p.48)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유년은 나의 주변에서 폐허가 되었다. 부모님은 어느 정도 당황하여 나를 바라보셨다. 누이들은 아주 낯설어졌다. 익숙한 느낌들과 기쁨들을 나에게서 각성이 일그러뜨리고 퇴색시켰다. 정원은 향기가 없었고, 숲은 마음을 끌지 못했다. 내 주위에서 세계는 낡은 물건들의 떨이판매처럼 서 있었다. 맥없고 매력없이. 책은 종이였고, 음악은 서걱임이었다. 그렇게 어느 가을 나무 주위로 낙엽이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비, 태양 혹은 서리가 나무를 흘러내린다. 그리고 나무 속에서는 생명이 천천히 가장 좁은 곳, 가장 내면으로 되들어간다. 나무는 죽는 것은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다. (p.91)

자네가 죽이고 싶어하는 인간은 결코 아무아무개 씨가 아닐세. 그 사람은 분명 하나의 위장에 불과할 뿐이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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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는 그런 종류의 행사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요즘같이 희한한 세상에 그런 게 없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한번 찾아보게 그 태블릿 좀 줘볼래요?」그가 알란에게 부탁했다.
「뭐라고?」알란이 소파에서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래, 이 걸 주고 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누가 자네에게 얘기해 줄 건데?」
「한 명도 없으면 더 좋지 않을까요?」율리우스가 맞받았다. (p.245)

알란은 지성이 약해지면 더불어 진실도 힘을 잃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전에는 참인 것과 참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은 아주 쉬웠다. 술은 좋은 거였다. 2 더하기 2는 5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게 되고 나서부터, 같은 것을 여러 번 말하는 사람이 진실인 세상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 기술을 완벽의 경지로 끌어올린 나머지 자기가 한 말을 몇 초 사이에 여러 번 되풀이할 수 있었다. 단 몇 초 사이에 말이다! (p.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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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과는 40명이었지만 모두가 강의에 출석하는 건 아니었다. 빨리 적응한 애들은 자신들이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 한다는 이유로 자주 수업에 빠졌다. 그런 이유라면 나 역시 충분한 조건을 갖췄지만 나는 학교 수업에 빠짐없이 들어갔다. 일단 기숙사에서 나와야만 혼자의 생활이 시작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 게 아니라 타의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 (p.84)

나는 맞은편의 본관 건물에 무심히 시선을 두고 있었다. 강의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 사이에 청소 아줌마의 모습이 보였다. 분필 가루가 두껍게 압착된 칠판지우개를 들고 나와 터는 중이었다. 순식간에 흰 가루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뿌옇게 허공을 덮었다. 학교 복도에서 저런 걸 입에 물고 벌을 받던 게 오래전의 일만 같았다.
그렇다고 멀리 떠나온 것 같지도 않았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회의와 비관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른바 청춘의 방황만이 아니었다.
지난 두 달 동안 나는 내 앞의 문을 열지 못하고 번번이 과거의 나로 굴러떨어지곤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세계의 부당한 규율에 복종했던 미성년 그대로였다. (p.86)

내 이름이 불리고 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는데 나는 전에 없이 엄마에게 말을 더듬고 있었다. 통화 요금이 계속 올라가고 있었지만 엄마는 기다려주었다. 나는 예상대로의 용건을 말한 다음 추석에 집에 내려가겠다는 말을 충동적으로 덧붙였다. 왠지 모르지만 인생이 커다란 감옥 같았고 거기에는 미래라고 이름 붙일 만한 출구도 없는 듯 했다. 과장된 절망의 포즈에 빠진 나머지 나는 퇴행적인 노스탤지어로 달아나야 했을 것이다. (p.242)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 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 되라는 뜻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관을 일삼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자신 같은 비관론자도 설득될 만큼 강력한 긍정과 인내심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유일하게 그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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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당신을 잡아간 이후로 ‘최근에‘ 라는 단어의 뜻이 바뀌었어요. 오늘 밤은 그게 언제였는지 말하고 싶지 않네요. ‘최근에‘ 라는 단어는 이제, 지나간 시간을 모두 포함해요. 그 말이 몇 주 전이나 그저께를 뜻할 때도 있었죠. (p.21)

희망과 기대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어요. 처음에는 그저 지속되는 시간에서만 차이가 있는 줄 알았죠. 희망이 좀더 멀리 있는 일을 기다리는 거라고 말이에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기대는 몸이 하는 거고 희망은 영혼이 하는 거였어요. 그게 차이점이랍니다. 그 둘은 서로 교류하고, 서로를 자극하고 달래주지만 각자 꾸는 꿈은 달라요. 내가 알게 된 건 그뿐이 아니에요. 몸이 하는 기대도 그 어떤 희망만큼 오래 지속될 수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는 나의 기대처럼요. (p.40)

자발적 용기는 젊은 시절에 시작되죠. 나이가 들며 생기는 건 인내예요. 세월이 가져다주는 잔인한 선물이죠. (p.105)

가난한 자들이 역경을 받아들이는 것은 수동적이거나 체념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역경 뒤에서 가만히 주시하고, 거기서 이름 없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받아들임이다. 깨진 것은 특정한 어떤 약속이 아니라, (거의)모든 약속이기 때문이다. 꺾쇠묶음 같은 무엇, 그냥 두면 무자비하게 흘러갈 시간에 괄호를 두르는 일.
그런 괄호들의 총합은 아마 무한함일 것이다.(p.116)

침묵은 언제나처럼 압도적이죠. 내가 받는 것은 당신의 응답이 아니에요. 있는 건 항상 나의 말뿐이었죠. 하지만 나는 채워져요. 무엇으로 채워지는 걸까요. 포기가 포기를 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선물이 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걸 이해한다면, 우리에겐 두려움도 없을 거예요. 야 누르, 사랑해요.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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