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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추리소설 속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1 ㅣ 추리소설 속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1
고수고수 / 황금가지 / 2023년 4월
평점 :
길을 걷다가 웅덩이에 빠졌는데 '조선시대', 죽은 줄 알았는데 판타지 세계 속에 와 있다는 류의 이야기는 너무도 익숙하다. 근래에는 한발 더 나아가 소설 속 주인공이나 엑스트라로 빙의하는 '책빙의물'이 꽤 인기였다. 이 소설 <추리소설 속 피해자가 되어버렸다>는 제목에서 이미 느껴지듯 '책빙의물'의 구성을 따르되 정통 미스터리/추리 서사로 풀어낸 이야기라 읽기 전부터 설렜다. 주인공 버프, 범인 버프를 어느 정도까지나 쓸 수 있을 뿐, '말이 되는, 증거가 있는 상황'에서 논리를 바탕으로 풀어야만 하는 추리 장르와 라이트한 형태의 '웹소설식 구성'이 어울릴까 하는 의문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적이었다. 나는 하차하지 않고 끝까지 단숨에 달렸고, 완독 후 책을 덮으면서 '이만 하면 좋은데'라고 생각했다. 아쉬운 점이 없다는 게 아니다. 셜록홈즈 시리즈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조심스레 말하자면 꽤 많았지만, 그걸 상쇄시킬 만한 장점이 확실했다는 이야기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앞서 소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명탐정 윌 헌트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자 <밀른 가문의 참극>이라는 제목의 웹소설에 들어와 있다는 걸 깨닫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얼마 전 완결이 난 소설을 몰아서 읽고 잠이 들었다가 깨보니까 소설 안이었다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이 소설에서 살해 당하는 6명 중에서도 2번째로 살해 당하는 레나 브라운의 모습으로 깨어난 '나'는 스스로를 세계의 신이라고 칭하는 '누군가'를 만난다. 소설 속 문장으로 짧게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 소설의 작가는 그쪽 세계에서 인기 없는 추리소설을 몇 편 썼을 뿐이야. 하지만 일단 소설이 완성이 되면 이 드넓은 우주에 그 소설을 배경으로 하는 또 하나의 세계가 생겨나게 되거든. 새롭게 생겨난 세계에서 작가는 신이 되는 거야. 난 그렇게 해서 이 세계의 신이 되었지.
소설이 완결되고 난 뒤에 우주 어딘가에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에서 '신'으로 활동하는 존재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을 길게 늘어놓고는 하나의 미션을 준다.
- 알다시피 이건 추리소설이야. 범인을 잡아. 사건을 해결해. 대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주면 보상으로 너에 대한 설정을 다시 해 줄게. 어마어마한 부자? 세계 최강의 외모? 뭐든 가능해. 새로운 설정으로 네가 살던 세계로 돌려보내 주지.
끌리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신적인 존재와의 거래가 성립된 이후 머릿속에 있는 소설 내용들을 바탕으로 사건을 직면하려고 했던 '나'의 다짐은 순식간에 산산조각난다. 레나 브라운이 죽었어야 했던 2번째 살해현장에서 의외의 인물이 발견된 거다. 밀른 가문의 가주 에드거 밀런의 이복 동생이자, 밀른 3자매의 숙부인 에드워드 밀른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문제는, 에드워드 밀른이 본래 소설에서는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점이다.
진범이 죽어버렸다니. 1번째 피해자는 진범이 죽였다고 하더라도 진범은 누가 죽였단 말인가. 소설을 읽은 독자인 '나'도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피해자는 계속해서 나온다. 본래는 2번째 피해자로 죽었어야 할 레나 브라운의 역할은 탐정 윌 헌트의 '조수'로 바뀐다. 윌 헌트를 따라다니며 그의 추리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지만, '결정적으로' 주인공은 범인을 찾지도, 그 어떠한 단서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로 그저 그런 '조연'의 배역을 소화한다. 이래서야 세계의 신이 말했던 것처럼 주인공이 범인의 뒷다리도 잡을 수 있을까, 갑갑해 할 즈음에 주인공 역시 깨닫는다. "아, 내가 지금 한 게 아무것도 없구나!"하고.
바로 이 지점이 내가 생각했을 때 이 소설의 '강점'이다. 단순히 범인을 좇는 추리극이 아닌, 주인공의 성장 서사라는 점이다. 이쯤하면 되겠지, 우연히 그렇게 됐다고 하자! 라고 넘어갔다면 지체 없이 '망작'이 되었겠지만, 주인공은 끝없이 고민하며 결국엔 범인을 찾고야 만다.
단순히 책 속의 어떠한 인물에게 '빙의'된 객체가 아니라, 이 세계의 창조주에게 이야기 속 캐릭터로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도 된다는 '작가의 포지션'을 받았기 때문일 테다. 즉, 이 소설 속 주인공은 보다 더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웹소설 형태를 취한 추리소설이라는 '구성'을 잠시 접어두고 주인공의 '성장담'이라는 것에 집중하여 2권의 소설을 다시 보자면 크게 3가지 파트로 나뉜다.
1. 진범이 죽고 난 뒤에도 거듭 터지는 연쇄살인에 혼란스러워하지만, 기존에 읽었던 소설 내용과 레나 브라운의 기억에 의지해 윌 헌트를 서포트하는 시기
2. 소설과는 다른 살해방식에 혼란스러워하면서 윌 헌트가 사람들을 모아두고 '범인을 잡았다!'고 선언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는 '맹한' 시기
3. 스스로 각성하여 윌 헌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추리력'으로 진범을 찾아내는 '각성의 시기'
솔직히 말하자면 2번 구간이 꽤 힘들었다. 1번의 경우 계속 터지는 사건과 기존과는 달라진 내용들을 주인공이 찾아내는 것에 몰입하기 좋았다. 2번 단계에서는 주인공이 주도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윌 헌트가 추리하는데 너무 엉망진창이라 피곤했다. 공감가지도 않고 비논리적인 데다, 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자신이 찾아낸 범인에 대해 주르륵 나열했을 때는 머리가 지끈지끈해질 정도였다.
작가가 의도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독자가 윌의 추리를 따라갈 수 있을 만큼의 떡밥은 던져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윌의 추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향하더라도 '그럴 만 하다'라고 생각했다면 훨씬 재밌었을 거 같은 내용이랄까. 주인공 윌 헌트가 떠먹여주는 맛없는 음식을 계속 먹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그게 결말부인데, 뭔가 더 있을 거 같긴 했다. 전자책으로 보고 있어서 더 잘보였는데 아직 분량이 많이 남아 있어서다. 그 잔여 분량에 대한 기대감으로 나는 좀 더 읽을 수 있었다.
기대감이 있더라도 뒷받침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면 힘들었을 텐데, 이 소설의 강점은 주인공이 순간순간 끼어들어서 해대는 '말들'에 있다. 흡사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를 연상케 하는 말투로 주인공은 적절한 순간마다 나타나서 세계관과 캐릭터에 대한 설명 아닌 설명을 해준다. 그때 여타 추리소설들에 대한 주인공의 생각이 곁들여져서 더 재미있었다.
다만, 주인공의 마지막 추리 역시 독자의 입장에선 아쉬웠다. 말은 되는데, 말이 되게 맞춘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완성도는 있지만 '한 뼘'만 더 나아갈 순 없었을까, 좀 더 기막힌 '물리적인 증거'가 나올 순 없었을까, 앞에서 스치듯 나온 '실마리'가 밝혀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말 그대로의 아쉬움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진범이 누구일지 나는 1권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증거가 그 사람을 가리켰고, 그 외의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증거가 부족해서 조금 더 헷갈리게 해줬으면 좋았을 거 같다는 아쉬움도 있다.
허나, 좋았다. 방금 전까지 아쉬운 거 줄줄이 말해놓고 뭔 말이냐 싶을 수 있겠지만... 미스터리와 추리, 느와르, 하드보일드 장르를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도 이 소설은 재밌었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을 읽으며 한동안 잊어왔던 그 장르의 책을 다시 꺼내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상에 치어 잊고 살던 내 안의 불꽃을 이 책이 다시 '틔워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아쉬웠던 부분들은 사실 발랄하고 해맑은 '웹소설 버프'가 많이 커버치기도 했다. 연쇄살인범이 이 책의 세계관 안에서 누구나 다 아는 동요의 내용을 재연하는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도, 그 동요를 만든 사람이 밀른 가문의 가주와 '거의 원수 관계'에 있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전반적인 세계관과 캐릭터들에 대하여 다 알고 있는 주인공이 캐릭터면서 동시에 '서술자'의 방식을 취하는 독특한 '책빙의물'이어서 이 장점이 더 살아났는지도 모른다.
재밌는 거 + 재밌는 거 하니까 더 재밌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본다. 어디까지나 개인 의견이고 취향이 반영된 만큼 읽어보는 사람들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궁금증이 생겼다면 한번 읽어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