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좋은 기회로 #문학과지성사 의 새 단행본 시리즈 『SF 보다―Vol. 1 얼음』 가제본 서평단에 선정되었다.
요즈음 SF에 관심이 있기도 하고, 동일한 소재인 '얼음'을 주제로 한 6편의 소설이 이 한 권에 실려 있다는 게 흥미진진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남유하의 작품이 가장 좋았는데, 나머지 소설들도 완성도 있게 잘 쓰여진 편이라 가볍게 각각의 소설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얼어붙은 이야기 / 곽재식
트럭과 추돌하여 교통사고 당할 위기에서 생사귀와 만난 '나'. 죽을 위기인 '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은하개 10개, 몇조 개 정도 되는 별들을 죽여야 한다면서 '나'의 인생에 대하여 묻는 생사귀와 함께 '나'는 비밀리에 수행해 온 업무와 그로 인하여 받게 된 '징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나'는 진짜로 생사귀를 만났던 것일까, 죽을 위기에서 '아픔'을 경감하는 환상에 빠졌던 걸까, 소설 속 '아이스'라 불리는 마약에 당하여 환상을 겪는 걸까. 발랄한 문장과 흥미로운 서사가 이 소설 안에 담긴 추악한 비극에 대하여 더 서글프게 생각하게 한다.
채빙 / 구병모
냉동인간의 상태로 의식만 깨어난 나, '신성한 존재'처럼 떠받들어지던 시대에 얼음새꽃 한 송이를 가져와 안부를 묻던 '따스한 사람'을 기억하지만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저마다의 소원과 욕망을 빌며 저들끼리 다투는 인간들만이 보인다. 또 한번 세월은 흐르고, 보다 문명화된 세상이 도래했을 때 나는 '리오케미컬 컴퍼니의 유일한 생존자'로 일컬어진다. 냉동인간을 만들 정도로 발달된 기술을 가진 세계가 한번 멸망하고 또 다른 '문명'이 시작된 것일까. 옴싹달싹 할 수 없이 '얼음'에 갇혀 있는 '나'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인간을 바라보는 '스산함'이 매력적인 소설이다.
얼음을 씹다 / 남유하
120여 년 전, 빙하기가 시작된 이래 몇 손가락 안에 들만큼 혹독한 혹한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죽은 자를 먹으며 생을 영위해 왔다. 남편이 죽었을 때 나는 죽은 자의 언덕에 대려가서 시체를 덕장에 매달아 놓았다. 얼었다 녹는 과정을 거쳐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고기'가 되었을 때, 가족들은 그것을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5살 난 딸이 죽은 순간, 나는 당연시 된 '식인'을 거부하고 딸의 시체를 갖고 도망친다. 허나, 굶주림에 '인육'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시체사냥꾼과 단지 '유희'로 인육을 먹는 자들이 함께하는 이 세상에서 나는 '범죄자'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처절한 디스토피아 환경 속에서 아이를 애도하는 어머니인 '나'의 마음과 갈등, 이들의 상황을 둘러싼 싸움이 촘촘하게 이어지다가 결말에 도달한 순간, '탄식'하게 만드는 '한 방'이 있었다.
귓속의 세입자 / 박문영
월드컵 개최국 이탈리아로 회사 차원의 '휴가'를 떠나자고 선언한 대표를 따라 축구 응원단의 신세가 된 해빈. 갑갑한 인생사에 지친 채로, 사람들과 거리 두는 편을 선호하던 해빈은 '기이한 존재'를 만나며 색다른 일상을 보낸다. 해파리와 우파루파를 조금씩 닮은 반투명체는 "나를 당신 몸에 잠시 머무르게 해주세요"라고 말하며, 시공간을 얼릴 수 있는 자신의 장기를 자랑한다. 해빈의 왼쪽 귀 안에서 살기로 한 기묘한 세입자와 함께하며 조금씩 천천히 변화해가는 해빈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큰 변화는 없고, 사건이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소소한 위트포인트가 있는 소설이었다.
차가운 파수꾼 / 연여름
세상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면서 '영구동토층'이라는 차가운 땅 위에 서 있는 건물들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해빙이 계속되면서 나날이 붕괴하는 빌딩을 떠날 수 없는 선택지를 가진 사람들이 그 땅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로 어쩐지 먹먹한 소설이다. 햇빛에 닿으면 몸에 치명상을 입는 노아, 노아가 사는 건물 지하에서 제가 가진 냉기로 건물이 무너지지 않게끔 하는 선샤인, 붕괴 사고로 집을 잃고 이곳으로 대피해 온 이제트까지 중심인물들끼리 나누는 정과 정서가 이 소설을 끝까지 읽게 했다.
운조를 위한 / 천선란
낮에는 암소를 죽이고 밤에는 고양이를 얼렸다는 소개 한 줄로 운조를 설명할 수 있을까. 수의사 운조는 출산을 도왔고, 장성하여 불임 판정을 받은 암소를 윗선의 지시에 따라 죽였고, 죽을 위기에 처한 고양이를 자신이 죽을 때까지 얼려 달라는 고객의 명에 따라 고양이에게서 안락한 죽음을 빼앗았다. 삭막한 일상을 보내다가 '냉동 보존' 기술을 상용화시킨 마거릿의 연구소로 향한 운조, 기묘한 액체가 담긴 구멍에 빠지면서 따듯한 정이 살아 있는 공동체 환경으로 '타임리프'한다. 지구가 분명한데 인간의 외양을 하지 않은 그들과 함께하며 행복해진 운조, 그 결말은 해피엔딩일까. 구체적인 묘사와 차분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저마다의 장점이 확실한 소설들이었다. 다만, 개인적인 취향을 가미하자면 남유하의 소설을 제외한 나머지 소설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들이 분명히 있었다. '얼어붙은 이야기'의 경우, 메타소설의 형식을 취하는 느낌이라 처음엔 흥미진진했는데 뒤로 갈수록 상황과 이야기는 던져지는데 '하나로' 잘 모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채빙'의 경우, 냉동인간을 만들 기술력이 있던 문명이 멸하고 다른 문명이 나타나도 인간이란 비슷하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건지 개인적으로는 다 읽고 난 뒤에 남는 것이 부족했다. '귓속의 세입자'의 경우 '얼음'이라는 소재에 가장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위트포인트는 있지만 나와는 결이 좀 달랐다. '차가운 파수꾼'의 경우 흥미로운 관계도를 설정하고 배경도 재미있었는데 결말이 갑자기 닥쳐온 느낌이다. 조금 더 친절했다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했다. '운조를 위한'의 경우 너무 탄탄한 묘사와 세계관이 인상적이었는데, 역시 결말이 아쉬웠다.
개인적으로는 남유하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이 소설집은 내게 너무나 큰 의미가 있다. 세계관과 상황에 대한 명확한 설정, 인물에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보여주는 주인공의 서브텍스트, 내 아이를 먹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처절하게 반항하던 주인공이 사건이 진행될 수록 어떻게 변화해가는지 속도감 있게 잘 보여줬고, 결말 역시 납득 가능하면서도 서글퍼서 다 읽고도 여운이 많이 남았다.
테마가 있는 SF 소설을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통하여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의미 있었던 #SF보다_얼음 이 책이 단행본 시리즈라고 들었는데 이것이 계속 출간된다면 나는 꾸준히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앞서의 아쉬운 점은 말 그대로의 아쉬운 점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되었다. 나는 본디 액션을 좋아하고, 갈등 구조가 명확하면서 처절한 상황에 놓이는 것에 가슴 뛰는 사람이니까. 좋은 기회로 읽게 된 만큼 관심 있는 독자들도 이 책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리뷰를 마무리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소설을 흥미진진하게 읽었을지 궁금해서 리뷰들을 찾아보게 될 것 같다. #SF보다 #SF보다_서평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