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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귀신 부르는 심부름집의 일일 - 이소플라본 연작 기담집
이소플라본 / 황금가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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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귀신 부르는 심부름집의 일일>은 실로 귀신과 관련된 일들을 해결해주는 ‘심부름사무소’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죽은 승려의 손, 기이한 일을 부르는 절밥, 무당 엄마가 만든 팔찌와 같이 의뢰자의 사연을 듣고 가진 통찰력이나 신통력을 발휘해 그 일들을 해결해주는 에피소드의 연속, 즉 옴니버스식 구조를 갖고 있는 장편소설이다.
재밌는 것은 단지 에피소드의 묶음 혹은 나열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1화부터 16화까지 이야기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주인공 승환과 사무소의 사장이자 5백년을 살아온 반신 혜호의 사연이 함께 보여진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이 귀신 들린 상황을 혜호와 승환이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했고, 그 다음엔 승환과 혜호의 속사정이 궁금해졌으며, 마지막에는 혜호가 ‘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 두 사람의 관계는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3가지 질문을 좇아서 읽으면서 나는 몹시 만족했다. 오랜만에 잘 읽히고 흥미롭고, 각 질문마다 그럴 싸한 답을 해낸 소설을 만난 셈이어서다.

스포하지 않는 선에서 간단하게만 소개하자면, 혜호는 아픈 동생을 살리고 자신도 살기 위해 장승을 베어 팔아넘기는 죄를 저질렀고, ‘어째서 신은 사람을 구하지 않느냐’라고 울부짖다가 500년의 형벌을 받게 됐다.
제 손으로 베어버린 장승을 대신하여 500년간 지상을 떠돌며 사람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세월이 흘러 현대에 오면서 그는 심부름 사무소를 차리게 되었고, 승환 역시 사무소 일을 하다가 만나 수족처럼 부리게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연은 ‘이러한 현재‘에만 머무르진 않고, 머나먼 과거와도 연결이 되어 있다. 결말에 가까워올 수록 설마? 했던 게 역시! 가 되면서 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 키워줬기 때문에 사연은 비밀로 가려두겠다.

승환과 혜호가 해결하는 개별 사건도 흥미진진했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소설은 모름지기 ’겉이야기‘와 ’속이야기‘를 갖고 있어야 매력적이라고 여긴다. ’겉이야기‘가 심부름 사무소의 일일과 두 사람의 사연을 파헤치는 일이었다면, ’속이야기‘는 ’신과 인간에 대한 물음’이었다. ‘신들은 우리를 사랑하는가?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라고.

나는 이따금 생각했다. ‘신은 존재하되 관여치 않는다’라고. 마치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국의 군주처럼. 존재하되 지켜보는, 자애롭다기보다는 단호하고 냉정한 그러면서 동시에 따스하기도 한 오묘한 존재라고 여겼기에 더 이 질문이 흥미롭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여러 기묘한 에피소드를 통하여, 혜호와 승환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를 담담하게 보여주며 서서히 자신만의 ‘답’을 보여준다. 이 답이 정답이라 할 순 없다. 하지만 일리가 있었고, 몹시도 따스한 시선이었다. 결말을 덮고 난 뒤에 뭉클했던 건 이 속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작가가 얼마나 고민했을지, 고심하고 답을 갈구했을지 느껴져서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통통튀고 흥미롭지만 동시에 묵직한 울림까지 주는 소설은 흔치 않다. 이 소설은 간만에 한 번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 목마름’을 채워주었다. 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가에 대해 작가가 준비한 답변은 비밀로 가려두겠다.
사실 내가 내린 답은 작가의 답과는 다르다. 언젠가 내가 찾은 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쓰게 될수도 있겠지. 이렇듯 깊이 있는 고민을 해볼 기회를 주어서 또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혜호가, 승환이 애달팠다. 독자가 주인공에게 감응하고 그를 응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만큼 캐릭터를 잘 구현해냈다는 의미기도 하다. 설명하기보다는 장면화하여 보여주었고, 옴니버스 구성의 장점을 잘 살린 소설, 궁금하면 한번쯤 읽어보도록.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알게 될 테다. 오늘 밤 새서 읽을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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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의 봄
이인애 지음 / &(앤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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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소재로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장애를 가진 이를 대할 때는 더더욱 조심스럽다. 장애인, 장애우라는 표현을 갖고도 한동안 사회적인 부딪힘을 겪었을 만큼 조심스럽다. 선천적인 케이스도 많지만, 후천적인 케이스도 그에 못지 않게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알게 모르게 장애를 가진 이들을 불편해 하고, 꺼려 한다. 어쩌면 자주 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설 <연아의 봄>을 읽으며 나는 오랜만에 그들에 대해 생각했다.

자주 마주하고, 그들의 불편이 불행이 아니라 그저 ‘불편’일 뿐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학창시절에 우리반에는 지적 장애를 가진 친구가 하나 있었다. 대체로 특수 학급에 있었지만 이따금 수업시간에 함께하면서 소리를 질러대서 그 시간의 수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20대 중반에 나는 자폐를 앓는 청소년들의 현장학습 인솔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적 있는데 덩치가 꽤 큰 남자아이와 한 조가 돼서 좀 무서워했던 기억이 난다. 평상시엔 얌전한 편이었던 그 아이는 특히 덥거나 시끄러운 걸 견디지 못했는데, 더울 때는 그 아이 어머니가 챙겨준 얼음물병을 목 뒤에 댄다던가, 잠깐 쉬어가며 윗옷을 갈아 입는 걸 도와준다던가 하는 정도로 됐지만 시끄러운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현장학습을 갔던 곳이 체육시설이라 소음이 꽤 큰 편이었는데 그 아이는 자신이 소음이나 더위를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면 극도로 불안해하며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날에 나는 체육시설 안의 계단을 오르다 밀쳐져 아래로 떨어질 뻔했고,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는 옆자리에 앉았는데 나를 계속 때려서 그 아이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말려야 했다. 그 부드러운 경고는 대체로 통하지 않았다. 고작 몇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을 했다.

귀가하고 아이들을 돌려보내는 장소에서, 그 건물 앞에서 서성이던 수많은 어머니들 사이에서 그 아이 어머니를 봤을 때도 기억난다. 참 곱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보이는 분이었다. 나를 연신 살폈고, 혹시 아이가 불편을 끼치진 않았을까 염려하던 눈빛에서 알았다. 소음이나 더위가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울 때만 빼면 조용하던 아이의 태도가 어디서 왔는지... 하지만 교육은 어디까지나 교육일 뿐이고, 충동은 억제하기 어렵다.

대체로 지적 장애와 지체 장애를 뭉뚱그려 생각하지만 나는 언제나 지적 장애가 지체 장애보다 더 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왔다. 신체적인 이슈가 있더라도 말이 통하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지만, 지능이나 인지에 문제가 있는 경우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워서다. 이 소설 <연아의 봄>에 나오는 연아가 바로 지적 장애의 케이스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연아는 어릴 적에 버려졌고, 시설의 도움을 받아 교육을 이수하여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땄지만, 정규직으로 일하기란 쉽지 않다.


​낯설지만 우리 곁에 있는 존재, 잘 보이지 않는 발달장애인 연아가 독자에게 조금 더 쉽게 닿을 수 있었던 건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 경력 단절 여성인 선애여서다. 경제력이 없어 양육권은 아이 아빠에게 빼앗기고 근근이 살아가던 선애가 입사한 첫날, 본래 업무 외에 추가적으로 맡아야 하는 업무로 연아의 관리감독 일을 맡게 되면서다. 정은 많지만 고집이 세고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연아를 버거워하던 선애는 서서히 연아의 삶 속에 함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 안의 상처도 치유하게 된다. 서로 다른 듯 비슷한 두 여인이 삶의 한 순간을 나누며,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익숙하지만 이 소설이 더 좋았던 건 ‘시의성’이 느껴져서다. 산후우울증을 겪던 선애가 사이비에 빠진 것이 ‘이혼의 결정적 이유‘라는 데서 특히 그렇다.

과거에 우리는 사이비에 빠지거나,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하는 종류의 일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 개인을 탓했다. 나약하고 덜 떨어져서 그렇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수근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인 아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감기에 걸리거나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처럼 정신적인 질환에도 마찬가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리고 나는 그것을 긍정적이라 본다.


이 소설 역시 그와 같은 따스한 시선을 지니고 있다. 선애를 탓하거나 섣불리 교과서적인 답안을 내밀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줄 따름이다. 출산우울증으로 인하여 사이비에 빠졌고, 아이들을 데리고 거리 포교활동에 나섰다가 이혼 당하고 아이마저 빼앗긴 채 홀로서기를 시작한 경력단절 여성과 태어난 순간부터 타고난 장애 탓에 버림 받고 언제나 사회 밖으로 내몰릴 위기에 놓여 있는 장애 여성이 불편한 만남으로 시작됐다가 서로 얽히게 되는 이야기를 통해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지금 아프지 아니한가, 당신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나는 그 두 사람의 ’얽힘‘이 찐득찐득하지가 않아서 좋았다. 이를 테면 연아가 시설에서 내보내지게 된 상황에서 선애는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평생 책임질 수 없다면, 섣부른 기대와 실망은 더 아프게만 할 따름이어서. 선애는 한 걸음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연아를 바라볼 따름이다. 연아가 어쩌면 일평생 살게 될 시골 마을에 주기적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그녀가 일하는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처럼... 나는 그 서늘한 위로, 느슨한 연대가 좋았다. 섣부르고 가벼운 동정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일시적인 말과 행동은 가볍고, 상처만 남길 따름이다.

장애에 대한 말을 쓰는 건 언제나 어렵다. 조심스럽고 주저하게 된다. 그 무게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중증장애에 대한 고려는 거의 없다는 소설 속 이야기에 나는 공감했다. 특히나 일자리의 경우에 그러하다. 연아가 회사에서 잘린 뒤에 선애가 연아의 일자리를 찾아보는 일화가 나온 페이지에 나는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지적 장애와 지체 장애의 경쟁이라면 당연히 사업장에선 지체 장애를, 중증보단 경증을 선호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장애에 대한 문제는 대체로 ’그 가족‘이 져야 할 짐 혹은 무게로 남아 있는 게 실정이다. 이게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바로 그래서 이 소설이 더 많이 읽히길 바란다. 판단하거나 탓하거나 섣불리 동정하지 말고 그저 질문을 던져보자. 이 춥고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나면 연아의 봄은 찾아올까, 그때의 봄날은 어떠할까. 연아는, 선애는 웃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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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쓰기, 좋은 글에서 더 나은 글로 - 논문에서 대중서까지 공부하는 작가를 위한 글쓰기, 편집, 출판 가이드
윌리엄 제르마노 지음, 김미정 옮김 / 지금이책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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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작업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동감하겠지만, 글을 시작하는 순간은 오히려 쉽다. 새하얀 백지는 막막하기도 하지만 어떠한 '도전 의식'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하나의 원고가 대략적으로 완성된 이후는 더 어렵다. 생각보다는 별로인 글을 앞에 두고 고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거, 고쳐? 말아? 선택은 저마다의 '직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고쳐서 좋아질 글 마저 퇴고의 두려움 앞에서 '고치길' 망설이는 분들에게 이 책이 좋은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신림역 인근의 카페에서 읽기 시작해, 영등포의 집과 근처의 카페 그리고 잠실나루 역 인근의 카페에서 이 책을 다 읽었다. <고쳐쓰기, 좋은 글에서 더 나은 글로>라는 제목처럼 '고쳐쓰기'에 대한 고민이 많아서인지 한 문단, 문단이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꼭꼭 씹어서 먹는 듯한 마음으로 이 책을 평소의 속도보다 조금 더 천천히 읽었다.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이다. 글을 읽을 때도 속독하는 편이며, 마음에 들면 한번 더 읽는 형태로 독서한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생각나는 장면과 이미지, 캐릭터가 있다면 대략적으로 전체 구성을 짜고 바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구조를 짜는 시간에 머물러 있는 게 길어지면 그 아이디어에 대한 흥미를 잃는다. 어째서 나는 좀 더 시간을 들여서 구성이나 캐릭터를 '디자인'하지 못하는가 고민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답을 찾았다. 


이 책에 따르면 <이어 맞추는 스타일>과 <다듬는 스타일>이 있다. <이어 맞추는 스타일>은 한 번에 한 문단 혹은 한 단락씩 작업하면서 다음 조각들로 넘어가는 저자이며, 개별적인 '완성'을 취하기보다 전반적인 완성을 우선시한다. 단계별로 자신의 목표를 빨리 알아차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다듬는 스타일>의 저자는 문장, 문단, 페이지를 쓴 뒤 곧장 검토하며 여러 번 글을 살피며 끝없이 개선한다. 


전자는 글을 쓰는 속도는 빠르나 막판에 보다 꼼꼼하게 고쳐야 하고, 후자는 속도는 느리지만 완성도 있는 글을 만드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이어 맞추는 스타일>이라 생각하고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개별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지니까 '이래도 될까' 했는데, 어차피 글은 초고에서 크게 변화하기 마련이고 버려진다 생각하는 무수한 조각들도 결국 '어떠한 순간'엔 쓰임새 있게 쓰여지니까. 


또 하나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은 '뒷심'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고쳐쓰기란 오류를 고치는 것보다는 글의 의도를 더 분명히 벼리고 나의 글을 바닥부터 찬찬히 생각해봄으로써 내가 하는 작업, 내가 가려는 방향, 독자를 특정 방향으로 이끌려는 이유를 명확히 하는 일에 가깝다.> 단순히 몇몇 오류를 정정하는 것도, 완전한 재창조도 아닌 내가 처음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 보며 방향성을 '바로 잡아가는' 일이다. 


글의 형태, 어떤 의도였는지 생각하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적확한' 어휘와 문장, 이야기를 활용해서 고쳐가는 이유, 모든 글은 결국 '독자'에게 읽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야기 안에서 생각할 만한 최소 한 가지의 '알맹이'가 있기를 바라고, 흥미롭기를 기대한다. 저자는 독자와 '책'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소통하는 것이며, 저자가 갖고 있는 지식이나 이야깃거리 중에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읽히기 좋은 방식으로 '구조화'하여 제공하는 것이다. 글을 통하여 아낌없이 '화제, 이야깃거리'를 던지고 독자가 기꺼이 본인이 쓴 책이라는 바다 안에서 항해하기를 기대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내게 남은 한 가지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끝없이 점검하며 '바른 방향'을 잡아가는 여정이 고쳐쓰기라는 깨달음을 다시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퇴고, 고쳐쓰기가 참 부담스러웠는데 1번 고칠 때 '완벽해야 한다'라는 압박이 있어서다. 


초고 단계에서 완벽하다면 퇴고를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완벽을 기하다가 중도 포기해버린 원고들이 무수하다. 그럴 바엔 걍 쓰고 보자는 생각을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책은 이렇게 헤매는 저자들을(저자의 꿈을 가진 이 모두) 다독이며 고쳐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실질적인 방향에 대한 가이드 역시 세심하게 전해준다. 


소설이나 창작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글쓰기에 '적용 가능한 고쳐쓰기'라는 점에서도 유용했다. 자기소개서, 친구에게 전하는 편지글, 소소한 SNS 등 우리의 일상에는 우리의 글이 필요한 순간들이 참 많다. 내일부터 바로 적용해 볼 것은 <초안을 소리 내어 크게 읽어보겠다>라는 것이다. 몇 주째 고민하며 쓰고 있는 글이 있는데 완성 목표는 30일이다. 


완벽한 원고가 아니어도(당연히 아닐 것이다, 초고니까) 괜찮다. 마음을 탁 내려놓고 부끄러움도 벗어버리고 소리내서 읽으며 체크하고, 내용을 앞뒤로 이동해보거나 문장을 삭제하는 방향도 생각해볼 생각이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길게 늘어지는 문단이나 챕터를 줄이기 전에 제 몫을 하는 부분부터 표시한다'라는 이 책의 조언이었다. 


살릴 엑기스만 먼저 표시해보고 삭제할 구간을 싹 지우고 읽어볼 것이다. 그렇지만 완전한 삭제는 아닐 것이다. 2고, 3고쯤 돼서는 다시 쓰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1번, 2번 만에 내 글이 '완벽해질 거란' 기이한 강박은 버릴 작정이다. 여러 번 반복해서 고치되 어느 정도 되었다 싶으면 공모전이 되었든 SNS가 되었든 연재 가능한 플랫폼이 되었든 일단 한번 꺼내볼 생각이다. 노출하면서, 써내면서 성장하는 법이니까. 


이 책의 저자는 참 많은, 좋은 조언들을 남겼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거다. 


<결국 유일하게 중요한 버전은 여러분이 세상에 선보이는 마지막 버전, 글로써 만들어낸 마지막 형태, 여러분의 텍스트가 시도하는 마지막 비행이다. 그 글에 담긴 여러 층위와 내력, 그리고 최종본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지나온 모든 고쳐쓰기의 경로들이 여러분이 수행해온 모든 작업의 면면을 이룬다. 이것이 저자로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일들이다. 하지만 독자는 최종적으로 여러분이 선보이는 글만을 보게 된다. 첫 페이지부터 시작해 뒤따르는 모든 페이지까지 가능한 한 최고의 글을 만들어보자. 그러고는 놓아버리자.> 


쓰레기와 같은 초고는 내 마음 안에 영원히 살아 숨쉬나, 그 모양 대로 독자에게 보여줄 순 없다. 가능한 고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되 미련 없이 놓아버리자. 그 다음의 일은 '독자'의 일이다. 요즈음 참 많은 고민이 있고 콱 막힌 기분이었는데 조금은 탄산을 마신 듯 속이 뚫렸다. 하지만 완벽하게 '시원'해지진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최선을 다했고, 고쳐쓰기를 수행하며 '깨달아가는 것'은 이제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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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맨을 찾아서
리처드 치즈마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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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부기맨을 찾아서>를 읽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 문장들 때문이었다. 


- 나는 거기 있었다. 나는 목격자였다. 그리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 그 괴물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됐다.


괴물을 지켜보다 스스로 괴물의 이야기에 들어가게 된 스토리는 무얼까. 궁금해서 첫 장을 넘겼고, 단숨에 몰두하여 한 자리에서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잠시 다큐멘터리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을 떠올렸다. 담고 있는 내용도, 주제도, 결론도 다르지만 하나는 똑같아서다. <서칭 포 슈가맨>에서 '슈가맨'으로 통하는 가수 로드리게스를 찾는 이들과 <부기맨의 찾아서> 속 주인공 리처드 치즈마의 심리가 참 닮았다. 너무도 찾고 싶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서 무얼하는지 라는 추적의 '심리' 말이다. 


또 하나 더, 추적자가 된 그들은 그들이 쫓던 이들과 '삶'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의 추적자들은 슈가맨의 '삶' 일부로 들어가서 그의 삶 전체와 마주했고, 소설 <부기맨을 찾아서>의 추적자 리처드 치즈마는 연쇄 살인마, 부기맨 그 괴물의 이야기가 어느새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으니까. 이는 두 작품을 지켜보는 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칭 포 슈가맨>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존재'를 몰랐던 슈가맨을 영화 중반부가 넘어가면서부터는 나도 미치게 찾았으니까. 영화 중반부가 지나고 나서야 그가 '존재'를 드러냈을 때 나는 흡사 내 아이돌을 만난 것처럼 흥분했다. 소설 <부기맨을 찾아서>에서도 나는 그러한 종류의 연쇄 살인마를 만나본 적 없으면서, 심지어 그 마을과 비슷한 마을에 살아본 일도 없으면서 그 마을 주민들과 함께 두려워했고, 부기맨에 분노했으며, 부기맨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에는 약간의 충격에 빠졌다. 


추적하는 이야기는 이렇게나 몰입감이 높다. 주인공이 왜 그 자를 쫓는가, 그 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나면 주인공에게 이입하기 편해지니까. 슈가맨 로드리게즈처럼 '모두의 아이돌'인 케이스와 연쇄살인마인 부기맨처럼 '모두의 적'인 케이스는 겉보기엔 달라보인다. 사랑과 열망 혹은 증오와 두려움으로 '감정'의 키워드가 다르니까. 동시에 흡사한 감정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원초적인, 본능에 가까운 감각'을 깨운다는 데서는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몰두한 키워드인 '감정적 몰입'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다소 돌아 왔다.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이유는, 이 소설이 우리가 흔히 접하는 '스릴러' 혹은 '범죄물' 소설과는 다른 궤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88년 미국 메릴랜드 에지우드다.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독립출판의 길을 걷기로 한 리처드 치즈마는 결혼을 앞두고 잠시 고향의 본가에 머물기로 한다. 그 시점에 공교롭게도 10대 소녀가 자택에서 납치 돼 살해되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이미 1-2년 전부터 주택에 무단 침입해 여성들을 추행하던 일명 '팬텀 폰들러'가 마을에 공포심을 자아내고 있었기에 모두 두려움에 떨던 한편, 또 한번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팬텀 폰들러가 아닌, 독자적인 방식으로 '연쇄 살인'을 이어가는 범인에게는 '부기맨'이라는 별명이 생긴다. 부기맨은 우리에겐 낯설지만 미국의 가정에서는 친숙한 존재로 침대나 벽장 속에 숨어 있는 귀신으로 자주 일컬어진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데서 우리나라의 망태 할아버지와 흡사한 듯도 하다. 정체가 명확치 않고, 얼굴마저 제대로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부기맨과 정체를 알지 못하고 수사망을 피해가는 소설 속 연쇄 살인마의 모습은 아주 닮아 있고, 동시에 너무도 두려운 존재다. 


주인공 리처드 치즈마는 범죄 미스터리와 공포물의 열렬한 편이자 몇 편의 단편을 발표한 작가이며 동시에, 잡지를 출간을 준비하는 독립출판업자로 조용하던 마을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부기맨을 추적한다. 저자의 이름과 주인공의 이름이 동일하고, 저자의 고향마을을 배경으로 하며 동시에 주인공의 약혼자이자 아내 이름 역시 저자의 아내와 동일하기 때문에 이 소설을 읽는 중반부에는 이것이 소설인지 르포 형태의 기록물인지 헷갈리기도 하다. 실제로 이 소설 내에는 꽤나 많은 사건과 관련한 자료 사진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궁금해 할 만한 내용이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가 이어지는 만큼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는 더더욱 내용에 몰입한다. 앞서 기존의 스릴러 소설과 느낌이 다르다 했는데 빌런인 부기맨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게 아니라 리처드 치즈마와 그 주변 인물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어서다. 사건은 발생하고 있고, 그로 인한 추적과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이어지는 건 동일한데 일상과 마을에 포커스가 계속 맞춰져 있다. 정말... 소설이 아니라 일기 혹은 르포 기사를 보는 것 같은 작법이다. 


조금 더 리드미컬하고 액티브한 사건 전개와 추적이 있길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다면 처음엔 조금 실망할 수 있지만, 여러 사진 자료들을 보면서 책을 읽는 마인드 자체가 달라진다. 넷플릭스와 같은 OTT나 유튜브를 통해 가끔 보고는 하던 범죄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으로 흥미진진하게 봤다. 소설에서 다큐멘터리를 볼 때의 기분을 느끼다니 정말 새로웠다. 범죄의 장으로 소비되고 있는 이 한 마을에 대해서, 그 마을의 피해자와 유가족과 목격자 그리고 가해자의 가족들에 대해 생각하며 빠르게 읽다 보면 엔딩부에 가까워 온다. 


마지막 시점에 우리는 가해자가 누군지 드디어 알게 된다. 다소 충격적이나, 미스터리/추리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예상 가능한 범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KEY는 가해자가 밝혀지고 난 이후에 오는 반전이다. 스포를 막기 위해 이야기하지 않겠다. 가해자와 주인공 사이의 인터뷰가 진행되고 난 뒤에 무언가 찜찜한 상태로 이야기가 막 내리나 했더니 모든 생각을 뒤짚을 만큼 흥미로운 에필로그였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에 나는 간만에 웃었다. 아, 추리/추적/범죄 소설을 이런 형태로 써도 되겠구나... 하면서 나는 첫장을 잠시 다시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모두 생각하게 될 거다. 이 소설을 '소설'로 완성하는 건 여러분과 같은 독자들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될 테니. 중간에 다소 늘어지는 부분도 있고 불필요한 장면도 많다 생각했으나 소설이 취한 구성이 그 단점을 어느 정도 덮어줬다 생각한다. 마지막 팁을 하나 주자면, 마치 <페이크 다큐>와 같은 소설이었다. 


- 나는 거기 있었다. 나는 목격자였다. 그리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 그 괴물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됐다.


이 이야기는 독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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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의 일곱 개의 달
셰한 카루나틸라카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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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은 책 소개에서부터 마음을 뒤흔들었다. 삶과 죽음, 동서양의 경계를 허무는 '저승 누아르'라니! 삶과 죽음에 원래 관심이 많아서 저승을 소재로 한 저승국 로맨스라는 웹소설을 써보기도 했던 나였다. 공모전에도 수상했지만 그 뒤를 이어갈 용기가 없어서 글쓰는 것을 중단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꽤 힘을 얻을 거 같아서 서평단 신청을 했고, 감사하게도 당첨됐다. 


2022년 부커상 수상작에 빛나는 이 책의 줄거리를 한 줄로 말하자면, '이유 모른 채 죽은 채 깨어난 유령 말리 알메이다(이후 말리)가 자신이 왜 죽었는지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사후 세계에 대한 설정이 재미 있었는데 일곱 번의 달이 지기 전에 빛으로 들어가야 다음생으로 갈 수 있고, 일곱 번의 달이 다 지기까지 중간계와 현세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유령인 상태로 말리가 애인과 친구들을 찾아가고 자신의 죽음에 대한 힌트를 알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는 서사도 흥미로웠지만, 스리랑카 내전과 대학살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잘 버무렸다는 것이 신기했다. 


소개 글에서 인용된 <뉴욕타임스>의 소개에 따르면 '기존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부수고 낯설고 광활하며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성을 드러낸다'라고 하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스토리텔링을 부순 걸까,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에 역사적 배경 그리고 죽음 이후에 자신이 왜 죽었는지 추적하는 미스터리까지 더해진다면 복잡할 텐데 어떻게 구성을 짰을까 가장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소 어지러웠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둔 소설이었다. 


흥미로웠던 3가지 지점과 아쉬웠던 2가지 점을 뽑아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첫째, 사후세계의 풍경이 흥미로웠다. 


눈을 뜨자 '유령'이 된 걸 깨달은 말리. 갑작스레 '망자'의 신세가 돼서 다른 망자들과 함께 '저승 카운터' 앞에 줄을 선다. 그 카운터에는 망자의 항의에 쪄들어 있는 안내원이 있고, 영문을 모른 채 절차를 따르던 말리는 또 다른 '기묘한 유령'(이름은 밝히지 않겠다)에게 홀려 '정상 궤도'를 벗어나는 선택을 하고, 자신의 죽음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죽음 추적'이라는 탐정소설의 요소가 있어서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는데,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사후 세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꾸준히 서술돼서 스리랑카인 작가가 사고하는 '사후'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다. 환상의 영역이기에 구체적인 '상상'과 '설정'이 중요한데 그 부분에서 잘 해낸 느낌이었다. 


둘째, 망자의 시선을 따라가기에 '건조'한 분위기 속에서 느와르를 체험할 수 있다. 


느와르가 어떻게 표현될까 궁금했는데 스리랑카 내전과 관련한 과거의 사건, 현재의 사건을 잘 엮어서 '액션적'으로 풀어낸 게 인상적이었다. 스포를 막기 위해 자세히 서술하지는 못하지만, 스리랑카가 어떠한 비극의 역사에 놓여 있는지 몰랐던 사람의 입장에서 읽어도 시각적으로 잘 그려졌다. 느와르라는 장르에는 액션과 의리, 사랑이 공존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역시 그랬다. 주인공의 정체성이 '퀴어'여서 다양한 차원의 사랑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으나, 너무 '성적인 차원'에 머물렀던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다. 


셋째, 현재와 과거 그리고 사후 세계와 인간계를 마구 오가는데 이해하기 쉽다. 


구성이 잘 짜여져 있다는 의미다. 일단 7번의 달이 다 지기까지 세상을 헤매는 여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책의 장 역시 8개로 나뉘어져 있는 점이 좋았다. 첫 번째 달에서는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면 두 번째~일곱 번째 달까지 나머지 장을 통해서 장 별로 사건을 전개하는 형태로 잘 분리하여 이해하기 쉬웠다. 맨 마지막 장은 '빛'으로 별도의 제목을 취하고 있는데, 일곱 번의 달이 다 지나고 난 뒤에도 '환생'을 택하지 않았던 주인공이 어떻게 '환생'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는지 잘 보여줬다. 


특히 말리 알메이다에 대한 소개가 시니컬하면서도 재미있었는데, 소설에 나오는 문장을 잠시 인용하자면 하기와 같다. 


"네게 명함이 있다면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말리 알메이다 사진작가, 도박꾼, 걸레. 묘비가 있다면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말린다 앨버트 카발라나 1955-1990". 주인공의 시점을 따르나 주인공을 '너'라고 2인칭으로 지칭하는 지점도 흥미로운데, 동시에 이 유령이 '육신'에서 분리되어 있는 타자의 신세라는 걸 독자에게 꾸준히 알려주는 거 같아서다. 


이번에는 아쉬운 2가지 지점인데, 사실 이 2가지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꽤 자주 멈췄고 이따금은 집중력을 잃기도 했다. 


첫째, 불필요한 사건과 장면까지 포함되어 분량이 너무 길다. 


이 소설을 처음 보는 순간 두께가 꽤 두껍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꽤 긴데 읽다 보면 말리의 죽음을 쫓아가며 만나는 스리랑카의 현실과 느와르적인 스토리라는 메인 서사 외에 곁다리 이야기가 꽤 많이 등장한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말리의 성적 취향, 퀴어에 대한 스토리는 좀 줄였어도 괜찮지 않나 싶었는데... 그다지 이 소설 내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밝히진 않겠지만) 말리의 죽음과 결정적인 관련이 있기야 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많이 나올 필요는 없다... 라는 생각이었다. 


둘째,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외부 서사'가 많아서 정작 메인 스토리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졌다. 


스리랑카의 역사적 배경과 사건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지만, 그 역사적이거나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 지면이 너무 많이 할애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경우 '잘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동시에 '잘 모르기 때문'에 길게 쓰여 있을수록 집중력을 잃기 쉬운 이야기다. 핵심만 탁 남겨줘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말리가 왜 죽었는지 말리의 친구들은 어떠한 위험에 처한 건지 궁금해서 읽기 시작한 건데 유령 사회에서도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외치는 무리들이 나오고, 관련 내용이 다수 나오면서 정작 말리라는 주인공에 대해서는 잘 보여지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사지에 가면서까지 사진을 찍고, '중간자'의 입장에서 사진을 판매하는 사진 작가 말리에 대해서, 그의 죽음과 그 이후가 궁금했던 건데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말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외부적인 설명은 많았지만 정작 그의 내면에 대해선 잘 보이지 않아서다. 유령이고 '너'라는 시점을 취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아쉬웠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내전과 대학살이라는 끔찍한 현실과 사후세계를 엮어낸 것, 저승 누아르라는 색다른 장르, 마술적 리얼리즘과 부조리한 유머가 섞여 있는 게 한 책 안에서 가능한 일이구나 하는 것에서 놀랐다.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며, 여러 차례 고쳐가면서 이 소설을 썼을 것이라 생각한다. 스리랑카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어 봤는데 이후에도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더 말하지 못한,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여러 환상과 이미지들 그리고 비유가 이 소설 안에는 많다. 


혹 이 리뷰를 보고 이 소설이 궁금해졌다면 한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앞서 말한 아쉬운 점들 때문에 중간중간 멈춰가며 읽어야 될 수도 있지만, 다 읽고 난 뒤에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는 감탄하게 된다. 죽음 이후에 바라보는 삶이란 이다지도 다채롭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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