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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의 일곱 개의 달
셰한 카루나틸라카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8월
평점 :
이 소설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은 책 소개에서부터 마음을 뒤흔들었다. 삶과 죽음, 동서양의 경계를 허무는 '저승 누아르'라니! 삶과 죽음에 원래 관심이 많아서 저승을 소재로 한 저승국 로맨스라는 웹소설을 써보기도 했던 나였다. 공모전에도 수상했지만 그 뒤를 이어갈 용기가 없어서 글쓰는 것을 중단했는데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꽤 힘을 얻을 거 같아서 서평단 신청을 했고, 감사하게도 당첨됐다.
2022년 부커상 수상작에 빛나는 이 책의 줄거리를 한 줄로 말하자면, '이유 모른 채 죽은 채 깨어난 유령 말리 알메이다(이후 말리)가 자신이 왜 죽었는지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사후 세계에 대한 설정이 재미 있었는데 일곱 번의 달이 지기 전에 빛으로 들어가야 다음생으로 갈 수 있고, 일곱 번의 달이 다 지기까지 중간계와 현세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유령인 상태로 말리가 애인과 친구들을 찾아가고 자신의 죽음에 대한 힌트를 알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는 서사도 흥미로웠지만, 스리랑카 내전과 대학살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잘 버무렸다는 것이 신기했다.
소개 글에서 인용된 <뉴욕타임스>의 소개에 따르면 '기존의 스토리텔링 방식을 부수고 낯설고 광활하며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성을 드러낸다'라고 하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스토리텔링을 부순 걸까, 삶과 죽음에 대한 고찰에 역사적 배경 그리고 죽음 이후에 자신이 왜 죽었는지 추적하는 미스터리까지 더해진다면 복잡할 텐데 어떻게 구성을 짰을까 가장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소 어지러웠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둔 소설이었다.
흥미로웠던 3가지 지점과 아쉬웠던 2가지 점을 뽑아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첫째, 사후세계의 풍경이 흥미로웠다.
눈을 뜨자 '유령'이 된 걸 깨달은 말리. 갑작스레 '망자'의 신세가 돼서 다른 망자들과 함께 '저승 카운터' 앞에 줄을 선다. 그 카운터에는 망자의 항의에 쪄들어 있는 안내원이 있고, 영문을 모른 채 절차를 따르던 말리는 또 다른 '기묘한 유령'(이름은 밝히지 않겠다)에게 홀려 '정상 궤도'를 벗어나는 선택을 하고, 자신의 죽음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죽음 추적'이라는 탐정소설의 요소가 있어서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는데,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사후 세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꾸준히 서술돼서 스리랑카인 작가가 사고하는 '사후'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다. 환상의 영역이기에 구체적인 '상상'과 '설정'이 중요한데 그 부분에서 잘 해낸 느낌이었다.
둘째, 망자의 시선을 따라가기에 '건조'한 분위기 속에서 느와르를 체험할 수 있다.
느와르가 어떻게 표현될까 궁금했는데 스리랑카 내전과 관련한 과거의 사건, 현재의 사건을 잘 엮어서 '액션적'으로 풀어낸 게 인상적이었다. 스포를 막기 위해 자세히 서술하지는 못하지만, 스리랑카가 어떠한 비극의 역사에 놓여 있는지 몰랐던 사람의 입장에서 읽어도 시각적으로 잘 그려졌다. 느와르라는 장르에는 액션과 의리, 사랑이 공존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소설에서도 역시 그랬다. 주인공의 정체성이 '퀴어'여서 다양한 차원의 사랑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으나, 너무 '성적인 차원'에 머물렀던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다.
셋째, 현재와 과거 그리고 사후 세계와 인간계를 마구 오가는데 이해하기 쉽다.
구성이 잘 짜여져 있다는 의미다. 일단 7번의 달이 다 지기까지 세상을 헤매는 여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책의 장 역시 8개로 나뉘어져 있는 점이 좋았다. 첫 번째 달에서는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면 두 번째~일곱 번째 달까지 나머지 장을 통해서 장 별로 사건을 전개하는 형태로 잘 분리하여 이해하기 쉬웠다. 맨 마지막 장은 '빛'으로 별도의 제목을 취하고 있는데, 일곱 번의 달이 다 지나고 난 뒤에도 '환생'을 택하지 않았던 주인공이 어떻게 '환생'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는지 잘 보여줬다.
특히 말리 알메이다에 대한 소개가 시니컬하면서도 재미있었는데, 소설에 나오는 문장을 잠시 인용하자면 하기와 같다.
"네게 명함이 있다면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말리 알메이다 사진작가, 도박꾼, 걸레. 묘비가 있다면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말린다 앨버트 카발라나 1955-1990". 주인공의 시점을 따르나 주인공을 '너'라고 2인칭으로 지칭하는 지점도 흥미로운데, 동시에 이 유령이 '육신'에서 분리되어 있는 타자의 신세라는 걸 독자에게 꾸준히 알려주는 거 같아서다.
이번에는 아쉬운 2가지 지점인데, 사실 이 2가지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꽤 자주 멈췄고 이따금은 집중력을 잃기도 했다.
첫째, 불필요한 사건과 장면까지 포함되어 분량이 너무 길다.
이 소설을 처음 보는 순간 두께가 꽤 두껍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꽤 긴데 읽다 보면 말리의 죽음을 쫓아가며 만나는 스리랑카의 현실과 느와르적인 스토리라는 메인 서사 외에 곁다리 이야기가 꽤 많이 등장한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말리의 성적 취향, 퀴어에 대한 스토리는 좀 줄였어도 괜찮지 않나 싶었는데... 그다지 이 소설 내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밝히진 않겠지만) 말리의 죽음과 결정적인 관련이 있기야 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많이 나올 필요는 없다... 라는 생각이었다.
둘째,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외부 서사'가 많아서 정작 메인 스토리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졌다.
스리랑카의 역사적 배경과 사건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지만, 그 역사적이거나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 지면이 너무 많이 할애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경우 '잘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동시에 '잘 모르기 때문'에 길게 쓰여 있을수록 집중력을 잃기 쉬운 이야기다. 핵심만 탁 남겨줘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말리가 왜 죽었는지 말리의 친구들은 어떠한 위험에 처한 건지 궁금해서 읽기 시작한 건데 유령 사회에서도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외치는 무리들이 나오고, 관련 내용이 다수 나오면서 정작 말리라는 주인공에 대해서는 잘 보여지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사지에 가면서까지 사진을 찍고, '중간자'의 입장에서 사진을 판매하는 사진 작가 말리에 대해서, 그의 죽음과 그 이후가 궁금했던 건데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말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외부적인 설명은 많았지만 정작 그의 내면에 대해선 잘 보이지 않아서다. 유령이고 '너'라는 시점을 취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아쉬웠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내전과 대학살이라는 끔찍한 현실과 사후세계를 엮어낸 것, 저승 누아르라는 색다른 장르, 마술적 리얼리즘과 부조리한 유머가 섞여 있는 게 한 책 안에서 가능한 일이구나 하는 것에서 놀랐다.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며, 여러 차례 고쳐가면서 이 소설을 썼을 것이라 생각한다. 스리랑카 작가의 소설은 처음 읽어 봤는데 이후에도 이 작가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더 말하지 못한,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여러 환상과 이미지들 그리고 비유가 이 소설 안에는 많다.
혹 이 리뷰를 보고 이 소설이 궁금해졌다면 한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앞서 말한 아쉬운 점들 때문에 중간중간 멈춰가며 읽어야 될 수도 있지만, 다 읽고 난 뒤에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는 감탄하게 된다. 죽음 이후에 바라보는 삶이란 이다지도 다채롭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