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의 봄
이인애 지음 / &(앤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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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소재로 글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장애를 가진 이를 대할 때는 더더욱 조심스럽다. 장애인, 장애우라는 표현을 갖고도 한동안 사회적인 부딪힘을 겪었을 만큼 조심스럽다. 선천적인 케이스도 많지만, 후천적인 케이스도 그에 못지 않게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알게 모르게 장애를 가진 이들을 불편해 하고, 꺼려 한다. 어쩌면 자주 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설 <연아의 봄>을 읽으며 나는 오랜만에 그들에 대해 생각했다.

자주 마주하고, 그들의 불편이 불행이 아니라 그저 ‘불편’일 뿐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학창시절에 우리반에는 지적 장애를 가진 친구가 하나 있었다. 대체로 특수 학급에 있었지만 이따금 수업시간에 함께하면서 소리를 질러대서 그 시간의 수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20대 중반에 나는 자폐를 앓는 청소년들의 현장학습 인솔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적 있는데 덩치가 꽤 큰 남자아이와 한 조가 돼서 좀 무서워했던 기억이 난다. 평상시엔 얌전한 편이었던 그 아이는 특히 덥거나 시끄러운 걸 견디지 못했는데, 더울 때는 그 아이 어머니가 챙겨준 얼음물병을 목 뒤에 댄다던가, 잠깐 쉬어가며 윗옷을 갈아 입는 걸 도와준다던가 하는 정도로 됐지만 시끄러운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현장학습을 갔던 곳이 체육시설이라 소음이 꽤 큰 편이었는데 그 아이는 자신이 소음이나 더위를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면 극도로 불안해하며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날에 나는 체육시설 안의 계단을 오르다 밀쳐져 아래로 떨어질 뻔했고,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는 옆자리에 앉았는데 나를 계속 때려서 그 아이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말려야 했다. 그 부드러운 경고는 대체로 통하지 않았다. 고작 몇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을 했다.

귀가하고 아이들을 돌려보내는 장소에서, 그 건물 앞에서 서성이던 수많은 어머니들 사이에서 그 아이 어머니를 봤을 때도 기억난다. 참 곱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보이는 분이었다. 나를 연신 살폈고, 혹시 아이가 불편을 끼치진 않았을까 염려하던 눈빛에서 알았다. 소음이나 더위가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울 때만 빼면 조용하던 아이의 태도가 어디서 왔는지... 하지만 교육은 어디까지나 교육일 뿐이고, 충동은 억제하기 어렵다.

대체로 지적 장애와 지체 장애를 뭉뚱그려 생각하지만 나는 언제나 지적 장애가 지체 장애보다 더 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왔다. 신체적인 이슈가 있더라도 말이 통하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지만, 지능이나 인지에 문제가 있는 경우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워서다. 이 소설 <연아의 봄>에 나오는 연아가 바로 지적 장애의 케이스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연아는 어릴 적에 버려졌고, 시설의 도움을 받아 교육을 이수하여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땄지만, 정규직으로 일하기란 쉽지 않다.


​낯설지만 우리 곁에 있는 존재, 잘 보이지 않는 발달장애인 연아가 독자에게 조금 더 쉽게 닿을 수 있었던 건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 경력 단절 여성인 선애여서다. 경제력이 없어 양육권은 아이 아빠에게 빼앗기고 근근이 살아가던 선애가 입사한 첫날, 본래 업무 외에 추가적으로 맡아야 하는 업무로 연아의 관리감독 일을 맡게 되면서다. 정은 많지만 고집이 세고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연아를 버거워하던 선애는 서서히 연아의 삶 속에 함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 안의 상처도 치유하게 된다. 서로 다른 듯 비슷한 두 여인이 삶의 한 순간을 나누며,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익숙하지만 이 소설이 더 좋았던 건 ‘시의성’이 느껴져서다. 산후우울증을 겪던 선애가 사이비에 빠진 것이 ‘이혼의 결정적 이유‘라는 데서 특히 그렇다.

과거에 우리는 사이비에 빠지거나,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하는 종류의 일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 개인을 탓했다. 나약하고 덜 떨어져서 그렇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수근댔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인 아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감기에 걸리거나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처럼 정신적인 질환에도 마찬가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리고 나는 그것을 긍정적이라 본다.


이 소설 역시 그와 같은 따스한 시선을 지니고 있다. 선애를 탓하거나 섣불리 교과서적인 답안을 내밀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줄 따름이다. 출산우울증으로 인하여 사이비에 빠졌고, 아이들을 데리고 거리 포교활동에 나섰다가 이혼 당하고 아이마저 빼앗긴 채 홀로서기를 시작한 경력단절 여성과 태어난 순간부터 타고난 장애 탓에 버림 받고 언제나 사회 밖으로 내몰릴 위기에 놓여 있는 장애 여성이 불편한 만남으로 시작됐다가 서로 얽히게 되는 이야기를 통해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지금 아프지 아니한가, 당신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나는 그 두 사람의 ’얽힘‘이 찐득찐득하지가 않아서 좋았다. 이를 테면 연아가 시설에서 내보내지게 된 상황에서 선애는 섣불리 나서지 않는다. 평생 책임질 수 없다면, 섣부른 기대와 실망은 더 아프게만 할 따름이어서. 선애는 한 걸음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연아를 바라볼 따름이다. 연아가 어쩌면 일평생 살게 될 시골 마을에 주기적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그녀가 일하는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처럼... 나는 그 서늘한 위로, 느슨한 연대가 좋았다. 섣부르고 가벼운 동정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일시적인 말과 행동은 가볍고, 상처만 남길 따름이다.

장애에 대한 말을 쓰는 건 언제나 어렵다. 조심스럽고 주저하게 된다. 그 무게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중증장애에 대한 고려는 거의 없다는 소설 속 이야기에 나는 공감했다. 특히나 일자리의 경우에 그러하다. 연아가 회사에서 잘린 뒤에 선애가 연아의 일자리를 찾아보는 일화가 나온 페이지에 나는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지적 장애와 지체 장애의 경쟁이라면 당연히 사업장에선 지체 장애를, 중증보단 경증을 선호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장애에 대한 문제는 대체로 ’그 가족‘이 져야 할 짐 혹은 무게로 남아 있는 게 실정이다. 이게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바로 그래서 이 소설이 더 많이 읽히길 바란다. 판단하거나 탓하거나 섣불리 동정하지 말고 그저 질문을 던져보자. 이 춥고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나면 연아의 봄은 찾아올까, 그때의 봄날은 어떠할까. 연아는, 선애는 웃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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