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저널리스트 : 카를 마르크스 ㅣ 더 저널리스트 3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영진 엮음 / 한빛비즈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 마지막 편은 카를 마르크스다. 앞선 두 편에서 소설가인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을 소개한 것과 비교하면 다소 튀는 선택처럼 보이기도 하다. 어째서 사상가로 유명한 마르크스를 선택한 것일까?

기사를 엮고 한글로 옮긴 번역가는 프롤로그에서 그 이유를 제시한다. 번역가가 제시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념 편향적으로만 소비되어 온 마르크스의 이미지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소개하고 싶어서. 둘째, 좀 더 읽기 쉽고 명확한 번역을 제공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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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르크스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당시 낸 기사들을 엮어서 저널리스트로서의 마르크스를 조명하고 있다. 사상가가 아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작성한 글을 확인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또한 정부의 검열과 압박에도 저널리스트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던 마르크스가 당대 사회와 현상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성한 기사들은 그 당시의 시대상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사상이 구체화되어 가는 과정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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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마르크스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작성한 기사들 중 17개를 골라 묶었다. 사건, 사고에 대한 논평보다는 그 당시 외교 문제나 무역 문제, 노동 계급에 초점을 맞추고 논평한 기사들이 주로 실려 있다. 2부는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제목의 글로 마르크스가 당시 운영하던 <신라인신문>에서 연재한 기사를 묶은 글이다. 마르크스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강의 내용을 기반으로 해 작성한 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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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기사로 포착해 논의하는 것들은 조금씩 다르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강제 추방을 당하는 서민들의 현실, 활발한 자유무역과 그것을 찬양하는 신봉자들, 영국이 인도와 중국에 침략해 착취를 저지르는 현실 등 그 당시 나타나던 다양한 사회적 현상들이다. 마르크스는 예리한 시선으로 사회적 현상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논의한다. 기사를 통해 드러난 그 당시 시대상은 비극적이며 처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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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무역이 활성화되면 빈곤층들이 줄어들 거라는 자유무역 옹호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노동자, 서민 계층의 삶은 곤궁하지 그지없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산다는 말도 이들에겐 사치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몸을 누일 곳을 찾지 못하고 거리를 떠돌다 허름한 헛간에서 죽음을 맞이한 바늘 제조공이나 조상이 대대로 살던 곳에서 지주와 경찰의 폭력으로 쫓겨난 소작농들, 공장에서 초과근무에 시달리고 열악한 근로환경 때문에 신체를 위협받지만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해 가난에 허덕이는 노동자들, 노동법으로 보호받지 못한 채 근무하는 여성, 아동 노동자들. 지주나 공장주에게 시달리고 국가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현실은 처참하다는 말로도 표현을 못 할 정도로 열악하다.

마르크스는 기사를 통해 이런 현실을 고발하면서 이들을 착취하는 부르주아와 국가, 그리고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노동자들이 이와 같은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서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개개인의 힘을 조직화해 전국적으로 단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 계급이 조직화되어 정치적인 영역까지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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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글을 집필하고 연재한 이유는 바로 그런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노동자들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계층 문제를 파악할 수 있도록 그는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글을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신라인신문>에 연재했다. 노동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 및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의 구조를 풀어냈다. 노동자들이 단결해 조직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자신들이 겪는 불합리함을 각성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저널리스트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진정성 있게 활동한 마르크스를 확인해볼 수 있었다. 정부의 검열과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기사를 작성한 이력이나 기사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주장을 내세울 때 그걸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통계자료를 하나씩 나열하며 꼼꼼히 분석하는 서술 방식은 그가 얼마나 진정성 있게 기자일에 임했는지를 알려준다.

아무리 쉽게 작성했다지만 그의 저작을 읽어본 적도 없고 경제학 분야에 무지해 글을 이해하는 데 이전 시리즈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양심 있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마르크스의 열정만큼은 깊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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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삼킨 소년
트렌트 돌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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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열두 살 소년 엘리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소설을 읽기 전 성장소설이라는 수식어와 작가가 어린 시절 경험을 깊이 녹여냈다는 설명을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교과서적인 성장소설일거라는 예상은 책을 몇 페이지 읽는 순간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마약 배달을 하는 보호자, 살인범과 전설의 탈옥수라는 악명을 가지고 있는 베이비시터 할아버지, 온종일 책만 읽고 술만 마시는 아버지, 주변에서 일어나는 마약 밀매와 폭력적인 사건들. 엘리의 주변 환경들은 거칠다 못해 암흑에 가까워서 당혹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뿐만 아니라 이후로 끊임없이 엘리를 위험과 절망에 빠뜨리는 난관들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육백 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주인공인 엘리가 뿜어내는 특별한 에너지였다. 혼란스럽고 어두운 주변 환경 덕분에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엘리는 때로는 흔들리고 크게 절망하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의 좋은 점을 발견해 좋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는 엘리는 읽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난관을 외면하지 않고 우직하게 돌파한다.

엘리가 그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주변 인물들도 눈에 띈다. 전설의 탈옥수, 살인범이라는 무거운 과거 이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감옥에서 터득한 지혜를 엘리에게 고스란히 전달해 주려고 노력하는 슬림 할아버지, 어릴 때 난 사고 이후 말을 하지 않지만 허공에 계속 단어와 글을 적으며 엘리와 소통하는 형 오거스트, 엘리의 말을 경청해 주는 범죄부 기자 케이틀린 스파이스, 감옥에 갇혀 있으며 엘리와 펜팔을 주고받는 알렉스 아저씨까지. 엘리의 곁에서 도움을 주고 그를 지켜봐 주는 이들이 있었기에 엘리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책 띠지에 적혀 있는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에서 어린 제제에게 밍기뉴, 뽀르뚜가 아저씨가 있었던 것처럼 엘리의 곁에는 그들이 있다. 그들을 설명하는 수식어나 과거, 직업이 다소 범상치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엘리는 그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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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집필한 작가의 역량도 도드라진다. 한없이 어둡고 우울해질 수 있는 환경임에도 소설이 마냥 무거운 톤으로 흘러가지 않는 건 초현실주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와 시적인 문장과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작가 덕분이다. 형 오거스트가 허공에 뜻 모를 단어들을 적는 점이나 소설 초반부에 엘리가 계속해서 꾸는 꿈은 미스터리하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며 독자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책을 계속 읽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후반부에 이르러서 수수께끼 같은 장면들과 장치가 풀리게 되는데 이것이 내면에 깊숙이 들어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엘리가 엄마가 갇혀있는 감옥으로 몰래 침입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한없이 무겁게 그릴 수 있음에도 사실적으로 그리기보다 마치 액션 영화를 보는 것 같이 호쾌하게 묘사한 것이 인상 깊었다. 파편적인 정보들만 나열해보자면 우울하기 그지없는 장면들뿐이지만 이렇게 판타지적인 연출을 사용해 서술한 덕분에 소설은 무거운 와중에도 동화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이미지를 유지해나간다.

이 책은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데뷔작임에도 육백 페이지가 넘는 긴 분량의 완급조절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자신만의 문법을 통해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미지를 구축해낸 작가의 차기작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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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끄는 짐승들 - 동물해방과 장애해방
수나우라 테일러 지음, 이마즈 유리.장한길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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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 먼저 표지를 집중해서 보자. 연두색 배경에 짙은 파란색으로 그려진 실루엣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왼편에 위치한 실루엣은 소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오른 편에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 어떤 사람인지 특정할 수 없는 실루엣이지만 그 시선은 어쩐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에게 닿아있는 듯 보인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소 실루엣 끝에 바퀴가, 사람의 실루엣 뒤에 몸집이 꽤 큰 짐승의 꼬리가 그려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실루엣에 대한 의문은 표지 디자인을 설명하는 작가의 말을 보면 단박에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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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이미지를 더 오래 들여다보면 인간의 머리 위에 있는, 형태를 특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사실 소의 꼬리와 엉덩이이고, 소 뒷다리 쪽의 바퀴가 인간이 탄 휠체어에 달린 것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림의 양쪽 끝이 이어지는 듯한 효과를 내는 셈이다. 즉 우리는 이것을 분리된 두 개의 실루엣으로 볼 수도 있고, 서 있는 소의 엉덩이 쪽에 인간이 탄 휠체어가 이어지는 하나의 전체 이미지로 볼 수도 있다. -- [표지 설명]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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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을 교차해서 이야기하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책의 핵심을 담아내고 있는 표지 디자인이다. 이처럼 감각적인 표지 디자인, 그에 대한 설명, 그리고 어릴 적 목격했던 충격적인 장면을 시작으로 작가는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을 교차시켜 논의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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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선천적 다발성 관절 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관절 굽음증은 신생아 3000명 중 한 명꼴로, 비교적 드물게 나타나는 장애라고 한다. 장애운동가이면서 동물운동가로 활동하는 작가는 장애학과 동물해방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이라는 두 가지 논제를 바라보고 탐색한다. 장애학의 시선으로 동물을 바라보기도 하고, 동물 억압을 비판하는 시선으로 장애를 바라보기도 하는 등 시선을 다양하게 교차시켜가며 두 가지 논제를 동시에 논의한다.

작가는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먼저 장애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것으로 질문을 시작한다. 그는 장애가 사회가 인위적으로 규범화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인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라고 언급한다. 그는 장애를 부자연스러운 것, 이상적이지 않은 것, 의존적이고 나약한 것으로 판단하는 비장애중심주의 시선이 우리 사회에 전체적으로 스며들어 있다고 말한다. 자신 역시도 어릴 적 내면에 비장애중심주의가 있었다는 고백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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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중심주의(ableism) : 장애가 없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고 정상이며, 반대로 장애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상정하는 가치관이자 이데올로기다. 이를 처음 문제 제기한 장애운동 진영과 연구들은 이 용어를 통해 장애를 '이상'으로 분류하면서 비장애를 '정상'으로 규범화하는 사회를 비판하고자 했다. '능력/할 수 있음'을 뜻하는 단어 'able'에서 파생됨. --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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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부족한 것으로 낙인 짓는 이 행위는 그대로 동물에게로 향한다.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동물에게 그대로 투사하는 것이다. 비장애 중심주의, 그리고 거기에 더해 사람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동물을 열등하다고 바라보는 비인간화가 더해지면서 동물은 억압당하고 착취당한다. 의사소통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직립보행을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들은 동물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다. 인도주의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이들조차도 동물들이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착취에 일조한다.

그런 인간들 때문에 공장식 축산업에 동원된 동물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착취당하며 온갖 장애와 질병을 얻는다. 좁은 칸에 갇혀 끊임없이 알을 낳아야 하는 닭, 사람들의 높은 고기 소비율 때문에 공장식으로 도살당하는 소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뿐만 아니라 의학의 발전을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수많은 동물들이 실험도구로 다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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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불편함을 느꼈었는데 그것은 이 책이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비장애중심주의를 마주 보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육식을 즐기고 장애를 시혜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그동안의 태도가 책을 읽는 내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동안 동물해방과 장애해방에 무관심이었던 게 무의식중에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기 싫어 자기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한 건 아닌가라는 성찰도 해보게 되었다.

지금 당장 바뀌자는 주장을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동안 내재되어 있던 편견을 자각해보고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그것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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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걸스 - 강렬하고 관능적인, 결국엔 거대한 사랑 이야기
엘리자베스 길버트 지음, 아리(임현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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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40년 여름, 모든 과목에서 낙제해 대학에서 쫓겨난 비비안은 극장을 운영하는 페그 고모가 있는 뉴욕으로 향한다. 그녀는 집에서 두고 보기 힘들어 한 부모님이 쫓아내듯 보낸 뉴욕이지만 비비안의 눈에 비친 뉴욕은 한없이 매력적이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부모님과는 달리 자유로운 고모, 그리고 고모가 운영하는 릴리 플레이하우스 극장 생활은 비비안에게 신세계나 마찬가지다. 비비안은 자유로운 극장과 뉴욕 생활에 푹 빠져든다.

연극 <시티 오브 걸스>를 제작하는 과정에 참여한 비비안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매혹적인 남자 안소니를 만나 뜨거운 연애를 이어나간다. 한껏 들떠서 자신에게 주어진 젊음과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던 비비안.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즐거운 생활은 비비안이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해 삐거덕거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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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걸스』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낸 신작이다. 전작인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수많은 독자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던 베스트셀러였던 만큼 이번 신작이 어떨지 기대하는 마음이 컸었다. 아쉽게도 전작을 읽어보진 못해 이번 신작과 비교를 해볼 순 없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어떠한 편견이나 의식 없이 신작을 읽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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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시대적인 배경은 1940년대 미국이다. 그중에서도 뉴욕의 극장이 중심 배경으로 나오는데 그런 만큼 소설에서는 그 당시 뉴욕 분위기와 시대적 상황, 그리고 극단의 분위기가 굉장히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소설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소설 속 이미지들은 극적이면서 화려하고 생생하다. 시간과 배경의 묘사 속에서 움직이는 주인공과 주변 캐릭터들은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뛰어난 가독성을 지닌 소설은 책을 잡는 순간 손에서 떼지 못하게 만든다.

여자들은 살면서 부끄러워하는 게 지긋지긋해지는 때가 온다.

그제야 비로소 그녀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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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배경 묘사만큼이나 눈 여겨볼만한 요소는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다. 주인공인 비비안을 포함해서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동성애, 싱글맘, 자유로운 연애생활 등 그 당시 시대상을 앞서 나가는 캐릭터들이 거침없이 뉴욕과 그 시대를 활보하는 모습은 묘한 해방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뭐'라는 태도로 그 당시 관습이나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들은 비장하기보다는 쾌활하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주인공 비비안의 변화는 놀랍도록 아름다우면서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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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른이 되려면 어른의 자리에 서야 해. 당연히 그런 기대도 받게 되고. 자기만의 원칙과 신념도 지켜야 하고. 희생도 필요하단다. 사람들은 널 판단하겠지. 실수를 하면 해결해야 하고.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보다 충동을 자제하고 더 고상한 입장을 취해야 할 때가 있을 거야. 물론 많이 아프겠지만 그렇게 때문에 어른의 자리가 힘든 거란다.

498쪽

소설은 노인이 된 비비안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비비안이 과거를 회상하고 설명하는 대상은 그녀에게 편지를 보낸 안젤라라는 인물이다. 맨 처음 등장하는, 자신의 아버지와 무슨 사이였는지 설명을 요구하는 안젤라의 편지는 소설을 읽는 내내 안젤라의 아버지가 누구일지 추리하게 만드는 재미를 부여한다. 자신보다 어린 안젤라에게 그 시절 시대상과 자신의 행동,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조곤조곤 설명하며 회상하는 방식은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더 쉽게 빠져들고 이입할 수 있는 효과도 만들어낸다. 1940년대 미국 사회를 잘 모르는 독자들도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조다. 거대한 역사 흐름 속에서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들이 개개인으로 움직이다 역사에 맞물리는 순간을 지켜볼 수 있는 점도 흥미롭다.

우리는 세상이 특정한 방식으로 돌아간다고 배우며 자라잖아요. 규칙이 존재한다고, 어떤 일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똑바로 살기 위해 노력해요. 하지만 세상은 똑바르지 않아요.(···) 세상은 그냥 제멋대로 굴러가 버린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사람들은 그런 세상을 헤치며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거고요.

528쪽

『시티 오브 걸스』라는 소설 제목은 소설 속에서 페그 고모와 비비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준비하는 연극 제목이기도 하다. 그들이 준비하고 공연한 <시티 오브 걸스>는 대공황으로 전 재산을 잃고 생계를 위해 저택을 카지노와 매춘굴로 바꾼 과부 엘레노라 앨러배스터 부인의 이야기다. 작가가 굳이 이렇게 소설 제목과 소설 속 연극 제목을 시티 오브 걸스로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거대한 도시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드러내기 좋은 제목이어서 그런 선택을 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수적인 공간과 생각에서 벗어나 뉴욕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며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고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비비안은 지극히 아름답고 행복하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와 그로 인해 생겨난 상처를 보듬어 안은 채 부유하다 자신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이를 만나 소통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공유한 그녀는 진정한 자신을 찾았기에 그 누구보다도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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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장면 ㅣ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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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전 R는 5미터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겪는다. 그 사건으로 인해 R는 이전의 기억들을 잃어버렸다. 그는 아내의 목 어디쯤에 점이 있는지, 자신에게 모욕적인 말과 행동을 한 상사의 성이 무엇인지, 아내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내가 사라진 건지 아닌지, 자신이 어디서 어떻게 떨어진 건지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는 자기 자신조차도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한다. 과거의 기억은 파편적으로 떠오를 뿐, 현재와 뒤섞여 혼란만 유발한다. R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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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엄지 작가의 전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나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에는 방향성이나 목표도 없고, 어떤 욕망이나 욕구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며 무기력함을 느끼는 모습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번 소설에서도 그런 비슷한 점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별 특이점이 없는 평면적인 스토리 진행과 깊은 사유나 욕망 없이 살아가는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R는 사고로 기억을 잃어 과거를 제대로 기억해 내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는 적극적으로 삶을 살거나 기억을 찾으려는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맥락 없이 떠오르는 파편적인 과거 장면들은 현재와 뒤섞이고 그는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지는 못한다.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니 지금 살아가는 공간과 그 속에 놓여있는 물건들, 그리고 긴밀한 관계인 사람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R에게 그저 의미 없이 부유하는 현상일 뿐이다. R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의미를 모르는 그것들과 함께 허공을 부유하는, 수동적인 자세뿐이다.

얼음 바닥을 내려다보며 빠지고 싶다는 생각만이 R에게 남아있는 욕구일 뿐이다. 이것이 소설에서 그나마 R에게 느낄 수 있는 강렬한 욕구인데 이마저도 R는 스스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아내가 그의 머리를 그 속에 집어넣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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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번 소설에서는 어쩐지 그 두 전작과는 조금 다른 인상을 받기도 했는데 아마 두 전작과는 다른 시간 구성이 그러한 느낌을 주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단조로운 일상을 변주도 없이 시간 순대로 늘어놓은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와 달리 이번 『겨울장면』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R는 몇몇 과거의 장면들을 조각조각 떠올려 보지만 불분명한 시간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나 전후 상황을 파악하는 일을 어렵다. 평면적인 스토리와 일상이지만 R의 과거와 현재가 뒤죽박죽 섞이기 때문에 이러한 흐름이나 서술이 이전보다 좀 더 난해하다고 느껴졌다.

내밀한 관계일 거라고 추측하는 아내와의 관계 역시 불분명하기만 하다.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R의 기억으로 인해 아내와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내가 그를 떠난 건지 아닌 건지, 혹은 그 모든 게 R의 망상인 건지, 안개가 잔뜩 낀 길처럼 모호하기만 하다.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현상들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R는 거기서 어떤 것도 읽어내지 못한다. 아내가 자신에게 남긴 쪽지도 R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소통과 관계가 두절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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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문장 자체는 어렵지 않다. 건조하고 단문으로 이루어진 문장들은 과거와 현재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한 채 살아가는 R과 그 이미지들을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기 힘들고 시와 같이 이미지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 소설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소설 속에서 맥락 없이 떠오르는 과거를 타인인 것처럼 낯설게 바라보고, 그를 치료하는 의사가 조언한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R의 모습에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사람들과의 단절, 소통의 오류, 그리고 현실을 부유하고 있을 뿐인 R에게서 현실을 살아갈 때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을 겹쳐볼 수 있었다.

지난 소설에서 의미를 쉽게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그 속에서 느껴졌던 분위기에 이입했던 것처럼, 이번 소설 역시 완전히 이해를 하긴 어려웠지만 소설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와 이미지들에 완전히 빠져들 수 있었다. 소설 표지에 그려진 얼음 구멍을 R처럼 한동안 응시해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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