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B - 역경에 맞서고, 회복탄력성을 키우며, 삶의 기쁨을 찾는 법
셰릴 샌드버그.애덤 그랜트 지음, 안기순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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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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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릴 샌드버그는 세계 최대 SNS 서비스인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이자, 베스트셀러 <린인>의 저자이자, 여성의 사회생활을 독려하는 비영리 조직 LeanIn.Org을 설립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에 앞서 구글에서는 글로벌 온라인 판매 및 운영 부회장으로, 재무부에서는 수석보좌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실감 없이 대단한 이력이라, 가끔씩 뉴스에 등장하는 셰릴 샌드버그를 볼 때면 마치 영화 속에 등정하는 멋진 여성 캐릭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지난 2015년 셰릴 샌드버그의 남편이 휴가지에서 급사했다는 기사를 봤을 때, 영화 속 캐릭터가 갑자기 현실 세계의 사람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영어 뉴스 사이트에서 그 기사를 보고, 내가 내용을 잘 못 이해한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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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옵션 B>는 하루 아침에 남편을 잃은 셰릴 샌드버그의 개인적 경험과 통찰에, 그녀의 친구이자 유명 심리학자인 애덤 그랜트의 연구를 더해, "역경에 맞서고, 회복탄력성을 키우며, 삶의 기쁨을 찾는 법"을 정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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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션 B>에는 예고없이 남편을 잃은 셰릴 샌드버그 개인의 경험을 포함해, 다양한 사람들이 겪은 '역경'이 담겨있다. 하나같이 큰 충격을 수반하는 것들이지만, 사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겨내야 하는 일들이다. 당연하게 여겼던 '옵션 A'가 당연하지 않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옵션 B'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p.12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시간이 지나고 작은 방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의사가 들어와 책상에 앉았다.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의사가 방에서 나가자 필의 친구가 다가와 내 뺨에 살짝 입맞추며 "애도를 표합니다"라고 말했다. 애도의 말과 의례적인 입맞춤을 받고 있자니 마치 미래에 일어날 장면의 한복판에 서있는 것 같았다. 이런 순간을 앞으로도 계속 반복해서 겪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중략)

이렇게 데이브가 없는 삶이 시작됐다. 그때도 지금도 결코 내 자의로는 선택하지 않았을 삶이고, 철저하게 무방비 상태에서 맞닥뜨린 삶이었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삶이었다. 아들과 딸을 옆에 앉혀놓고 아빠가 하늘나라에 갔다고 말해야 하다니. 아이들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듣고 있다가 나도 그만 따라 울었다. 장례식을 치렀다. 사람들은 과거시제를 써서 데이브에 대해 말했다. 집을 꽉 메운 낯익은 얼굴들이 줄줄이 다가와 내 뺨에 입을 맞추며 "애도를 표합니다"라고 똑같이 말했다.

 

/p.18

회복탄력성이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내게 그런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있느냐고 애덤에게 물었다. 애덤은 회복탄력성의 양은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그보다는 어떻게 해야 회복탄력성을 갖출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회복탄력성은 개인이 역경에 반응하는 힘과 속도를 뜻하는데, 우리는 이를 개발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척추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척추를 감싸고 있는 근육을 강화하는 것이다.

 

/p.22

데이브가 세상을 떠난 지 몇 주 되지 않았을 때다. 나는 데이브가 더 이상 해줄 수 없는 아버지 역할에 대해 필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데이브의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을 찾기 위한 계획을 세우다가 필에게 "하지만 내가 원하는 사람은 데이브에요"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필은 팔을 둘러 나를 안으며 "옵션 A가 없으니 까짓것 발로 차버리고 옵션 B를 선택하면 돼요"라고 위로했다.

삶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옵션 B의 삶을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우리를 끌어내리려는 삶을 발로 차버리도록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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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션 B>에서는 셰릴 샌드버그 본인이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다시 즐거움을 느끼고, 다시 사랑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며 '역경'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지금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나, 일기를 적거나, 하루에 잘한 일을 기록해보는 것 등이다. 단순히 어떠한 방법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셰릴 샌드버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더 잘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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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릴 샌드버그 역시 한 순간에 아픔을 훌훌 털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매 순간 남편의 빈자리를 느껴야 했고, 아빠를 잃은 두 아이를 키워야 했으며, 회사로 돌아가 일을 해야 했다. <옵션 B>에는 그 과정이 담담하면서도 솔직하게 담겨져 있다.

 

/p.91

데이브가 세상을 떠나고 페이스북에 복귀한 첫날, 나는 마크와 함께 페이스북 홍보팀과 회의를 했다. 그때 내 의견의 핵심을 설명하기 위해 제품 및 엔지니어링 담당자 보즈(Boz)에게 "우리가 구글에서 함께 일할 때 추진했던 업무를 기억해봐요"라고 말했다. 보즈가 나와 함께 구글에서 일한 적이 없다는 점만 빼면 쓸 만한 발언이었다. 보즈는 당시 구글의 경쟁사였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했다.

나는 다음 회의에서는 어떻게든 업무 진행에 확실히 기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동료에게 질문하자 나는 얼른 끼어들어 대답했고, 계속 그런식으로 행동했다. 회의가 한창 진행되는 중에 내가 좌충우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날 밤 늦게 마크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정말 어리석게 행동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두 번 실수를 저지른 것은 확실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마크가 이렇게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요. 당신이라면 보즈가 구글에서 일했다고 예전에도 충분히 착각했을 테니까요." 퍽이나 위안이 되네요!

사실 위안이 됐다. 하지만 설사 내가 예전에 그런 종류의 실수를 했더라도, 지금 실수를 저지르고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게 문제였다. 그러자 마크가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데 회의 시간에 내가 제시한 의견 몇 가지를 거론하며 핵심을 잘 겨냥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내가 항상 논리적이고 옳은 생각만 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듣고서 나는 스스로에게 좀 더 합리적인 기대를 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태도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마크가 연민을 품고 내게 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자신을 연민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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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션 B>는 셰릴 샌드버그의 개인적 경험을 담은 에세이이자, 애덤 그랜트의 연구를 담은 심리학 서적이자,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실용서이다. 회복탄력성을 키운다는 것은 곧 절망 내지는 우울의 늪에 빠져있는 시간을 줄인다는 의미이다. 이 책은 주변인의 상실과 같은 큰 역경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곳곳에서 마주하는 장애물들을 넘는 힘을 기르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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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섭의 글쓰기 훈련소 - 내 문장이 그렇게 유치한가요?
임정섭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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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고 글을 쓰려니 손이 무겁다. <임정섭의 글쓰기 훈련소>에서는 글쓰기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특히 어른이 어른다운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메일이나 보고서 등 여러 종류의 글을 써야하는 직장인들에게 필요한 내용들이 알차게 담겨있기 때문에, 글쓰기로 고민하는 직장인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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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글을 쓰는 것 보다 분석하는데 익숙하다. 학교에서 분석 위주로 수업을 듣고, 그걸로 시험을 치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글을 하나하나 뜯어가며 분석할 일은 거의 없다. 그에 반해, 글을 써야 할 일은 수 없이 많다. 지인에게 문자나 메일을 보내는 것도 글쓰기에 속한다. 글쓰기는 단순히 문장을 지어내는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머리 속에 담긴 여러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즉,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글쓰기를 위해서는 생각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p.20)
그렇다면 글쓰기 훈련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생각의 확장'입니다. 글은 머리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근원적으로 생각의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팔 굽혀 펴기, 누워서 다리 들기, 턱걸이, 윗몸일으키지 같은 운동을 해 보셨는지요? 처음 시작할 때는 참 힘듭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횟수가 늘어나면서 쉬워집니다. 근육 덕분입니다. 몸의 근육처럼 생각에도 근육이 붙습니다. 매일 생각 근육을 다져야 문제 해결 능력과 창의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p.21)
저는 평소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앞으로 글쓰기는 영어보다 더 큰 경쟁력이 될 것이다." 이에 공감할지 아닐지는 각자의 몫일 테지요. 그런데 직장에서 영어를 많이 쓰십니까, '글'을 많이 쓰십니까? 당신의 일상에 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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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섭의 글쓰기 훈련소>는 크게 4가지 훈련으로 구성된다. 1단계 '오답 노트'에서는 어른답지 못한 글쓰기 사례를 살펴본다. 습관처럼 사용하는 표현들이 눈에 띄어서 혼나는 기분으로 읽었다. 2단계 '이론 학습'에서는 글을 쓰기에 앞서 숙지해야 할 내용들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 3단계 '실전처럼 연습하자'에서는 직장인에 특화된 글쓰기 특강이 이어진다. 특히 기본 보고서, 공지문, 기안문, 이메일, 기획서 등 9가지 장르별 글쓰기 노하우가 남겨있어서 좋았다. 마지막 4단계에서는 글을 잘 쓰기 위한 8가지 습관을 소개해준다. 신문 사설이나 칼럼 요약, 필사, 어휘 공부, 하루에 하나씩 아이디어 기록하기(1일 1상)와 같이 알고는 있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실천하지 않는 것들이다. 이 책을 읽은 김에 조금씩 습관화하는 노력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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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라고 하면 시나 에세이와 같은 문학적인 글쓰기가 먼저 떠오르는데, 이 책에서는 업무 보고서나 이메일과 같이 실용적인 글쓰기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룬다. 이 책의 내용을 숙지하고 꾸준히 글을 쓰다보면, 회사에서 글을 쓰면서 막막함을 느끼는 빈도가 줄어들 것이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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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술과 차가 있는 중국 인문 기행 2 중국 인문 기행 2
송재소 지음 / 창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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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원래도 큰 나라였지만, 요즘에는 점점 더 그 존재감이 커지고 있음을 느낀다. 서점에서는 어렵지 않게 중국 작가의 책을 볼 수 있고, TV에서 중국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하고, 예능 프로그램에 중국인이 나와 인기를 얻기도 한다. 물론 이전부터 있어왔던 일이지만, 그 빈도와 비중이 확연히 늘어났다. 하지만 나에게 중국은 여전히 '' 나라이다.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4년전 쯤 중국 황산에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아는 것이 없다보니 그냥 한국과 다른 모습에 신기해하는 것이 전부였다. 마음 한 구석에 중국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뿌리가 '관심'이 아니라 '필요'에 있다보니 이렇다 할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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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 출판된 <중국 인문 기행2>에는 '시와 술과 차가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시도, 술도, 차도 나름 관심이 있는(!) 분야인지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펼쳤다. 이 책의 저자는 한시의 대가이자 애주가이며, 다도가인 송재소 교수님이다. 저자에 대한 설명을 먼저 읽어서인지, 책을 읽으면서 묘하게 문장이 차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로서는 구사하기 어려울 것 같은 '고급진' 문장이라, 책 내용과 더불어 문장에도 감탄을 느끼며 읽었다. 앞서 말했듯 중국에 대한 기본 지식이 거의 전무한지라 사실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90%가 생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문장이 읽기 쉽게 쓰여져 있고 정리가 잘 되어있는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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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문 기행2>에서는 절강성 소흥과 강소성 의흥이라는 도시를 다루는데, 이 두 도시는 특히 인문학적 유산이 풍부한 곳이라고 한다. 책 이름에 '기행'이 들어간데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각 지역을 둘러보는 느낌으로 진행된다. 특정 지역에 얽힌 이야기나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으로 책이 전개되어 지루하지 않고, 곳곳에 관련 사진이 실려있어 해당 장소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와신상담'에 얽힌 이야기나, 중국 근대 문학의 거장인 '노신(루쉰)',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인 '서시'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있어서, 관련 챕터를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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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책을 한 번 읽었다고 해서 중국에 대한 지식이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중국과의 거리감이 조금이나마 줄어든 느낌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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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트레일스 - 길에서 찾은 생명, 문화, 역사, 과학의 기록
로버트 무어 지음, 전소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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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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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트레일스>는 '길의 기원과 의미'를 생각해보는 책이다. 이 책은 길을 누가 만들었는지, 왜 생겼는지, 애초에 길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그 답을 찾아 3200킬로미터에 이르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고, 탄자니아와 말레이시아를 하이킹하기도 하고, 모로코까지 이어지는 국제애팔리치아트레일을 걷는다. 이 책에는 그 '탐험'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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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트레일스>에는 그 제목에 걸맞게 '트레일'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 트레일은 사람, 동물, 심지어는 고대 생물이 지나간 흔적까지를 의미한다. 사실, Chapter1에서 길의 기원을 찾는 저자의 여정이 수억년 전에 형성된 화석 트레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는 적잖이 당황했다. '길의 기원'이라는 것을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접근할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개인적으로 역사에는 나름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과학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지라, 초반부터 이 책을 무사히 읽어나갈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과정을 풀어가는 저자의 문체는 또 문학적이라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솔직히,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지금도 이 책을 어떻게 재미있게 읽은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은 분명히 재미가 있었다. 허헛.


/p.88
영어권 화자들이 이동의 선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들, 예를 들어 trails, traces, tracks, ways, roads, paths 등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의미들이 서로 얽혔다. 나 역시 이런 혼동에 대한 책임을 부정할 수 없는데, 이 단어들의 의미가 그것들이 각각 표상하는 물리적 대상들만큼 서로 종첩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다. 그러나 트레일의 기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단어들을 자세히 분해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trail과 path가 내포하는 의미는 조금 다르다. path는 품위와 위엄이 있고 당당하면서 약간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반면, taril은 무계획적이고 단정하지 않으며 제멋대로인 느낌을 준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자들은 트레일을 "대충 만든 path"라고 다소 교만한 태도로 정의했다. 그들이 지적하듯, 트레일은 오직 야생의 지역에만 존재할 뿐 문명화된 지역에서는 결코 볼 수 없다. 가령 '정원의 트레일'을 따라 산책하고 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면, trail과 path의 핵심적인 차이는 방향성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path는 앞으로 뻗는 반면, trail은 뒤에 남겨진다(이 두 단어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하려면 달려오는 코끼리의 path에 누워 있느냐, 아니면 그 trail에 누워 있느냐를 생각해보면 된다).

 

/p.89
리처드 어빙 도지(Richard Irving Dodge) 대령은 1876년 <<대서부의 평원(Plains of the Great West)>>에서 자신의 트레킹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편리한 정의를 내렸다. 즉, 트레일은 믿고 따라갈 수 있는 "흔적(sign)"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정의를 좋아한다. 트레일이 가늘고 좁은 맨 땅과 동의어라는 거대한 전제를 무너뜨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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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길의 기원이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도시에 살고 있는 지금,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길은 대부분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나마 자연에 가까운 산 속의 길도 안전을 고려해 '지정된' 것들 뿐이다. 그 길을 벗어나는 것은 곧 위험을 의미한다. 길은 일종의 사회적 규칙이기 때문에, 굳이 그 기원이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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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온 트레일스>를 통해 저자가 길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기원을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기존에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을 처음부터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실 한 권의 책에 담긴 정보의 양이 너무나 방대해서,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눈으로 문장을 따라가는 여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물론 저자가 트레일과 함께한 여정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일반인의 눈에서 볼 때 트레일을 종주하는 과정은 마치 극기훈련처럼 들린다. 게다가 글을 잘 써서인지, 번역이 잘 되서인지, 아마도 둘 다겠지만, 마치 소설을 읽듯 나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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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트레일스>를 읽는 건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ㅁ;!!

 

 

[ #책속문장 ]

 

 

/p.21
어느 날 밤에 쓴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인생이 전적으로 자애롭지만은 않은 신에게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없는 순간들이 있다. 능선을 내려갔더니 다시올라가야 하고, 가파른 산봉우리를 기껏 기어오르고 보니 돌아서 오는 길이 또렷이나 있고, 한 시간 동안 똑같은 강을 세 번이나 건너면서 발을 다 적셨지만 그랬어야 할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을 겪다 보면 말이다. 누군가 어디에서 길이 이렇게 나야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겪게 되는 것이다."

 

/p.22
어떤 측면에서 보면, 길은 특히 암울한 형태의 결정론이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지만, 결국 자연이 이미 정해준 길로 항상 돌아오게 되어 있다"라고 괴테는 말했다.

 

/p.25
최대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길은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하나의 지형을 통과해 가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선택 가능성은 차고 넘치며 함정도 그만큼 많다. 길의 기능은 이 바글거리는 대혼란을 이해할 수있는 선으로 압축시켜놓는 것이다.

/p.38
뉴욕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세상을 스루하이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의 반년을 산악지대 숲에서 보내고 나니 뉴욕 시는 엄청나게 경이로운 동시에 흉물스러워 보였다. 인간의 손에 의해 이보다 더 철저하게 변화된 장소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 경직성에 놀랐다. 직선, 직각, 시멘트 도로, 콘크리트 벽, 철제 빔, 강요되는 가혹한 규칙, 쓰레기는 넘쳤고, 모든 것이 망가져 있었다. 나는 좋은 설계란 오래된 연장과 고전 민담처럼 트레일의 지혜가 흐른다는 것을 애팔래치아 트레일에서 배웠다. 즉 좋은 설계는 효율, 유연성, 내구성의 균형을 맞춤으로써 공동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p.129
헉슬리의 주장처럼, 모든 과학적 진보의 기저에 그와 똑같은 패턴이 존재한다. 먼저 대담하게 최근접 추측이 시도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점점 더 정답에 가까운 추측이 된다. 이런 식으로 트레일이 진화한다. 직감은 주장으로 강화되고, 주장은 대화를 일으키고, 대화는 논쟁으로 날카로워지고, 논쟁은 합창으로 부풀어 오른다. 합창은 충돌과 반향, 그리고 기이한 새로운 화음으로 가득 차오르며 점점 더 커진다. 그리고 그 각각의 새로운 목소리는 부른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이쪽으로……

 

/p.224
 "제가 보기엔 거의 모든 종류의 동물이 트레일을 따라갈 것 같습니다. 그게 찾아가기가 훨씬 더 쉬우니까요. 버팔로 트레일을 보세요. 웬만해서는 트레일 위에서 걷는 게 더 쉽잖아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한참동안 말을 멈추고 있다가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듯 점점 생기를 띠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 생각엔 인간이 가장 분명한 트레일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여기 이 빌어먹을 주간고속도로처럼 말이지요. 제기랄. 만약 인류가 멸망한다면, 만 년 후 언젠가 어떤 생물이 여기 다시 와서 이 콘크리트 다리의 잔해를 보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모든 동물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트레일을 남기는 셈 아닐까요."

 

/p.277
걷기는 트레일을 만든다. 트레일은 다시 지형을 형성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지형은 공동체 지식과 상징적 의미의 기록 보관소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가 지금까지 '원주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대충 뭉뚱그려 하나로 묶은 다양한 문화들은 "트레일 위를 걷는 문화"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분류를 연장해 적용하면, 현대 서구 문화는 "도로 위를 차로 달리는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유럽인들이 사육된 동물만 활용하고 마차, 나중에는 기차나 자동차 같은 차량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신세계의 식민지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기계 덕분에 현격하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종종 과거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바로 그 트레일 위를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발과 땅 사이의 근원적인 끈을 잃어버렸다.

 

/p.285
하이킹이라는 단어를 하나의 의미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하게 된 과정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두리 현대인과 트레일이 마침내 숲이라 불리는 그 이상한 것을 포용하게 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p.350
흔적을 누군가가 따라가면 트레일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트레일은 기술에 의해 변화하면서 도로, 고속도로, 비행 경로가 된다. 구리선, 전파, 디지털 네트워크가 된다. 새로운 기술 혁신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가고싶었던 곳에 더 빠르게 더 곧바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점을 취할 때마다 상실감이 뒤따른다.

 

/p.409
결국 우리는 모두 존재론적 길잡이다. 우리는 인생이 허용하는 길들 중에서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길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필요에 따라 고치고 개량한다. 여기서 기묘한 점은 우리가 길을 고치고 있을 때, 그 길 역시 우리를 고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현상을 애팔래치아 트레일에서 직접 목격했다. 트레일은 하이커들이 내딛는 각각의 발자국에 의해 변화했지만, 결국 트레일이 우리의 경로를 결정했다. 우리는 트레일을 따라감으로써 그 조건에 맞춰 능률화되었다. 즉 체중이 줄었고, 소지품을 버렸으며, 매주 속도가 붙었다. 이와 똑같은 규칙이 우리 인생의 길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집단으로서 인생의 길을 만들지만, 개인적으로는 길들이 우리를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

 

/p.458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대혼란의 들판을 방황하지만, 아무런 희망 없이 길을 잃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이모두 저마다 흔적을 남기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모든 길, 이야기, 실험, 네트워크를 아우르는 지구상의 모든 종류의 트레일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더 좋고 더 오래 지속되며 더 유연한 방식으로 지혜를 나누고, 그것을 미래를 위해 보존하려는 인류 공동체의 거대한 열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길 위를 방랑하고 길에 대해 숙고하면서 보낸 한산의 삶에서 물려받은 지혜는 우리를 멀리까지 대려가줄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밖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홀로 탐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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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번역가 수업 - 호린의 프리랜서 번역가로 멋지게 살기 프리랜서 번역가 수업
박현아 지음 / 세나북스 / 201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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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번역가'라는 말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프리랜서에, 번역가라니. 한 때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샘솟아서 이것저것 찾아본 적이 있다. 잠시나마 번역 학원에 등록해 수업도 들었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학원에서도 특별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인맥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텐데, 지금보다도 요령 없는 사회생활을 했던 그 때의 나는 그냥 번역일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지금은 일본어를 따로 공부하는 시간조차 내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번역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질척거리게 된다.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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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번역가 수업>은 프리랜서 일본어 번역가로 일하는 박현아님의 책으로, '프리랜서 번역가'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특히 1강 '번역가에 대해 궁금하다' 부분에는 프리랜서 번역가를 꿈구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머릿속에 떠올렸을 다한 질문에 대한 박현아 번역가님의 답변이 제시되어 있다.
-. 어학 자격증이 필요할까?
-. 꼭 언어 전공이어야 번역가가 될 수 있을까?
-. 통번역 대학원을 반드시 나와야 할까?
-. 안정된 번역가가 되려면 어느 정도 기간이 걸릴까?
-. 번역 자격증이 필요할까?

2강 '프리랜서 번역가 되기'와 3강 '프리랜서 번역가 라이프'의 내용은 더 본격적이다. 어떻게 번역 일감을 찾아낼 것인지부터, 지속적으로 일감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하는지, 그리고 프리랜서 번역가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내용이 알차게 담겨있다. 프리랜서는 일반 직장인에 비해 일하는 장소와 시간이 자유롭다는 장점을 지니지만, 그 대신 수입이 다소 불안정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직장인이라고 해서 모두 안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생활의 주도권을 온전히 본인이 잡고 있는 프리랜서의 삶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단순히 프리랜서 번역가의 삶이 멋있고 좋다고 이야기하지만은 않는다. 특히 책 말미에 담긴 프리랜서 번역가 8인의 인터뷰를 읽고 있으면, 번역가들이 마주한 현실이 녹록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훅 와닿는다.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는 것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렇게 현실적인 내용이 담긴 책이 나온 것은 참 반가운 일이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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