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트레일스 - 길에서 찾은 생명, 문화, 역사, 과학의 기록
로버트 무어 지음, 전소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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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트레일스>는 '길의 기원과 의미'를 생각해보는 책이다. 이 책은 길을 누가 만들었는지, 왜 생겼는지, 애초에 길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그 답을 찾아 3200킬로미터에 이르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고, 탄자니아와 말레이시아를 하이킹하기도 하고, 모로코까지 이어지는 국제애팔리치아트레일을 걷는다. 이 책에는 그 '탐험'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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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트레일스>에는 그 제목에 걸맞게 '트레일'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 트레일은 사람, 동물, 심지어는 고대 생물이 지나간 흔적까지를 의미한다. 사실, Chapter1에서 길의 기원을 찾는 저자의 여정이 수억년 전에 형성된 화석 트레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는 적잖이 당황했다. '길의 기원'이라는 것을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접근할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개인적으로 역사에는 나름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과학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지라, 초반부터 이 책을 무사히 읽어나갈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과정을 풀어가는 저자의 문체는 또 문학적이라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솔직히,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지금도 이 책을 어떻게 재미있게 읽은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은 분명히 재미가 있었다. 허헛.


/p.88
영어권 화자들이 이동의 선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들, 예를 들어 trails, traces, tracks, ways, roads, paths 등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의미들이 서로 얽혔다. 나 역시 이런 혼동에 대한 책임을 부정할 수 없는데, 이 단어들의 의미가 그것들이 각각 표상하는 물리적 대상들만큼 서로 종첩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다. 그러나 트레일의 기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단어들을 자세히 분해해볼 필요가 있다. 가령, trail과 path가 내포하는 의미는 조금 다르다. path는 품위와 위엄이 있고 당당하면서 약간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반면, taril은 무계획적이고 단정하지 않으며 제멋대로인 느낌을 준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자들은 트레일을 "대충 만든 path"라고 다소 교만한 태도로 정의했다. 그들이 지적하듯, 트레일은 오직 야생의 지역에만 존재할 뿐 문명화된 지역에서는 결코 볼 수 없다. 가령 '정원의 트레일'을 따라 산책하고 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면, trail과 path의 핵심적인 차이는 방향성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path는 앞으로 뻗는 반면, trail은 뒤에 남겨진다(이 두 단어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하려면 달려오는 코끼리의 path에 누워 있느냐, 아니면 그 trail에 누워 있느냐를 생각해보면 된다).

 

/p.89
리처드 어빙 도지(Richard Irving Dodge) 대령은 1876년 <<대서부의 평원(Plains of the Great West)>>에서 자신의 트레킹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편리한 정의를 내렸다. 즉, 트레일은 믿고 따라갈 수 있는 "흔적(sign)"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정의를 좋아한다. 트레일이 가늘고 좁은 맨 땅과 동의어라는 거대한 전제를 무너뜨려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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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길의 기원이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다. 도시에 살고 있는 지금,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길은 대부분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나마 자연에 가까운 산 속의 길도 안전을 고려해 '지정된' 것들 뿐이다. 그 길을 벗어나는 것은 곧 위험을 의미한다. 길은 일종의 사회적 규칙이기 때문에, 굳이 그 기원이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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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온 트레일스>를 통해 저자가 길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기원을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기존에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을 처음부터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실 한 권의 책에 담긴 정보의 양이 너무나 방대해서,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눈으로 문장을 따라가는 여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물론 저자가 트레일과 함께한 여정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일반인의 눈에서 볼 때 트레일을 종주하는 과정은 마치 극기훈련처럼 들린다. 게다가 글을 잘 써서인지, 번역이 잘 되서인지, 아마도 둘 다겠지만, 마치 소설을 읽듯 나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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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트레일스>를 읽는 건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ㅁ;!!

 

 

[ #책속문장 ]

 

 

/p.21
어느 날 밤에 쓴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인생이 전적으로 자애롭지만은 않은 신에게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없는 순간들이 있다. 능선을 내려갔더니 다시올라가야 하고, 가파른 산봉우리를 기껏 기어오르고 보니 돌아서 오는 길이 또렷이나 있고, 한 시간 동안 똑같은 강을 세 번이나 건너면서 발을 다 적셨지만 그랬어야 할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을 겪다 보면 말이다. 누군가 어디에서 길이 이렇게 나야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겪게 되는 것이다."

 

/p.22
어떤 측면에서 보면, 길은 특히 암울한 형태의 결정론이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지만, 결국 자연이 이미 정해준 길로 항상 돌아오게 되어 있다"라고 괴테는 말했다.

 

/p.25
최대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길은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하나의 지형을 통과해 가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선택 가능성은 차고 넘치며 함정도 그만큼 많다. 길의 기능은 이 바글거리는 대혼란을 이해할 수있는 선으로 압축시켜놓는 것이다.

/p.38
뉴욕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세상을 스루하이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의 반년을 산악지대 숲에서 보내고 나니 뉴욕 시는 엄청나게 경이로운 동시에 흉물스러워 보였다. 인간의 손에 의해 이보다 더 철저하게 변화된 장소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 경직성에 놀랐다. 직선, 직각, 시멘트 도로, 콘크리트 벽, 철제 빔, 강요되는 가혹한 규칙, 쓰레기는 넘쳤고, 모든 것이 망가져 있었다. 나는 좋은 설계란 오래된 연장과 고전 민담처럼 트레일의 지혜가 흐른다는 것을 애팔래치아 트레일에서 배웠다. 즉 좋은 설계는 효율, 유연성, 내구성의 균형을 맞춤으로써 공동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p.129
헉슬리의 주장처럼, 모든 과학적 진보의 기저에 그와 똑같은 패턴이 존재한다. 먼저 대담하게 최근접 추측이 시도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점점 더 정답에 가까운 추측이 된다. 이런 식으로 트레일이 진화한다. 직감은 주장으로 강화되고, 주장은 대화를 일으키고, 대화는 논쟁으로 날카로워지고, 논쟁은 합창으로 부풀어 오른다. 합창은 충돌과 반향, 그리고 기이한 새로운 화음으로 가득 차오르며 점점 더 커진다. 그리고 그 각각의 새로운 목소리는 부른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이쪽으로……

 

/p.224
 "제가 보기엔 거의 모든 종류의 동물이 트레일을 따라갈 것 같습니다. 그게 찾아가기가 훨씬 더 쉬우니까요. 버팔로 트레일을 보세요. 웬만해서는 트레일 위에서 걷는 게 더 쉽잖아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한참동안 말을 멈추고 있다가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듯 점점 생기를 띠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제 생각엔 인간이 가장 분명한 트레일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여기 이 빌어먹을 주간고속도로처럼 말이지요. 제기랄. 만약 인류가 멸망한다면, 만 년 후 언젠가 어떤 생물이 여기 다시 와서 이 콘크리트 다리의 잔해를 보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모든 동물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트레일을 남기는 셈 아닐까요."

 

/p.277
걷기는 트레일을 만든다. 트레일은 다시 지형을 형성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지형은 공동체 지식과 상징적 의미의 기록 보관소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가 지금까지 '원주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대충 뭉뚱그려 하나로 묶은 다양한 문화들은 "트레일 위를 걷는 문화"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분류를 연장해 적용하면, 현대 서구 문화는 "도로 위를 차로 달리는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유럽인들이 사육된 동물만 활용하고 마차, 나중에는 기차나 자동차 같은 차량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신세계의 식민지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기계 덕분에 현격하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종종 과거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바로 그 트레일 위를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발과 땅 사이의 근원적인 끈을 잃어버렸다.

 

/p.285
하이킹이라는 단어를 하나의 의미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하게 된 과정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두리 현대인과 트레일이 마침내 숲이라 불리는 그 이상한 것을 포용하게 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p.350
흔적을 누군가가 따라가면 트레일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트레일은 기술에 의해 변화하면서 도로, 고속도로, 비행 경로가 된다. 구리선, 전파, 디지털 네트워크가 된다. 새로운 기술 혁신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가고싶었던 곳에 더 빠르게 더 곧바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점을 취할 때마다 상실감이 뒤따른다.

 

/p.409
결국 우리는 모두 존재론적 길잡이다. 우리는 인생이 허용하는 길들 중에서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길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필요에 따라 고치고 개량한다. 여기서 기묘한 점은 우리가 길을 고치고 있을 때, 그 길 역시 우리를 고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현상을 애팔래치아 트레일에서 직접 목격했다. 트레일은 하이커들이 내딛는 각각의 발자국에 의해 변화했지만, 결국 트레일이 우리의 경로를 결정했다. 우리는 트레일을 따라감으로써 그 조건에 맞춰 능률화되었다. 즉 체중이 줄었고, 소지품을 버렸으며, 매주 속도가 붙었다. 이와 똑같은 규칙이 우리 인생의 길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집단으로서 인생의 길을 만들지만, 개인적으로는 길들이 우리를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

 

/p.458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대혼란의 들판을 방황하지만, 아무런 희망 없이 길을 잃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이모두 저마다 흔적을 남기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모든 길, 이야기, 실험, 네트워크를 아우르는 지구상의 모든 종류의 트레일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더 좋고 더 오래 지속되며 더 유연한 방식으로 지혜를 나누고, 그것을 미래를 위해 보존하려는 인류 공동체의 거대한 열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길 위를 방랑하고 길에 대해 숙고하면서 보낸 한산의 삶에서 물려받은 지혜는 우리를 멀리까지 대려가줄 수 있지만, 딱 거기까지밖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홀로 탐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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