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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 엔젤
가와이 간지 지음, 신유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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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소비자의 다양한 얼굴, 은밀한 거래 방법, 환상적인 환각 증세 등이 흥미를 자극했다. 께느른히 늘어져서 읽다가도 재우치는 서사에 눈을 번쩍 떴다. 마약 복용으로 인한 기아감을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려서 몰입이 쉬웠다. 자책감에 허덕이며 자신을 거리로 내몬 '진자이', 불행으로 얼룩진 유년시절에 천재일우의 기쁨을 맛본 '미즈키 쇼코'까지. 영원한 불행과 영구적인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했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답보상태에 머문 지금, 스노우 엔젤은 더욱 매력적인 재료가 아닐까. 부작용 없이 완벽한 행복에 몸을 뉠 수 있다면 거절할 이는 없을 테니까. 안전한 환각 상태에 빠질 가능성은 만무하지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세상은 어떻게 흐를까. 마지막 장을 덮고도 오갈 데 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삼켰다. 반전을 거듭하는 서사에 즐거움이 배가되었고, 종종 소름이 돋았으며, 나의 추리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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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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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표지에 "*주의사항: 심약자는 반드시 「해설」을 먼저 읽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음에도 불구,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소설부터 읽었다. 우들우들 떨며 낱장을 넘겼지만 예상한 것처럼 섬뜩하거나 공포스럽지 않았다. 그보다 일본 소설 특유의 음습함과 괴이쩍음이 혼재했다. 과연 마리 유키코는 '이야미스(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속속들이 그려내 불쾌감을 주는 장르)의 개척자'다웠다. 내 집 마련의 어려움, 남자에 대한 공포 그리고 방어기제, 상대를 전부 알 수 없는 현실, 단단한 선입견과 편견, 직장 내 따돌림, 비정규직의 비애, 이웃 간 간섭, 피의자의 전형 등 산재각처했던 문제들이 한 권의 책으로 덩이졌다. 「해설」을 읽고 어렴풋한 찝찝함이 실체화되었다. 다시 읽을수록 빛나는 소설이었다. 자그마한 복선을 꼼꼼히 짚어보며 등허리에 잔소름이 끼쳤다. 공포감에 편중되지 않은 미스터리 소설로 잊고 지냈던 이름을 복기할 수 있어 뜻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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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러시아 고전산책 5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김영란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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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이름'을 건축재로 견고하게 쌓는 러시아 문학의 장벽이 이 소설집에는 없다. 분량이 적을뿐더러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서정적이고 고요하지만, 간혹 강렬한 폭풍이 휘몰아치는 이반 투르게네프만의 서사가 인상적이다. 로맨틱한 필치가 글에 풍미를 더한다. 가장 골몰한 작품은 역시 <파우스트>다. '파벨'이 친구에게 적은 편지글을 바탕으로 금지된 욕구와 도덕성이 격렬히 충돌해서 그 어떤 가치판단도 할 수 없었다. 자주 당착에 고립되었다. 격정적인 문체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낭만으로 변모했다. 깎이고 팬 마음이 되어서야 삶의 교훈을 얻는 인물들이 안쓰러웠다. 비로소 나는 '삶을 연장하는 것이 사랑이자 욕망 억제이자 가치관'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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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클로이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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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신체의 40cm를 잃은 클로이의 생생한 일기, 조카 산지에게 들려주는 랄리의 여성주의적 발화가 감명되었다. 친밀한 인종주의에 굴종하지 않고 시종일관 호전적인 산지, 계급주의를 타파하고 사랑을 선택한 랄리, 수동식 엘리베이터 운전에 대한 디팍의 딴딴한 신념까지 전부 찬란했다. 휠체어를 탄 여자 클로이와 피부색이 다른 남자 산지의 로맨스도 흥미로웠다. 완연한 로맨스 서사는 실로 오랜만이라 낯설었지만 어느새 촉촉이 젖어들었다. 그늘이 완벽히 걷히고 햇빛 쨍쨍한 클로이의 글을 읽으면서, 랄리의 곧고 다정한 어투를 읊조리면서 작가의 여성 인물 운용이 탁월했음을 느꼈다. 70대 노인 '리베라'가 병상에 누운 아내를 두고 거주민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서사가 아주 딴판으로 읽혔지만, 그 외 불편한 스토리나 편협한 세계관은 없었다. 뉴욕에 수동식 엘리베이터가 53대만 남아있다는 간간한 사실과 엘리베이터 승무원을 잠깐 보고 숭고한 직업의식을 이야기로 푼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다름, 차별, 혐오"의 콘텍스트가 덜 건조하게 드러나서 만족스러웠다. 소설은 '당사자성이 결여되었지만 그 곁에 설 수 있도록' , '그들을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의 제스처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14시 50분에 멈춰있던 클로이에게 "휠체어를 밀어주지 않음"으로써 시계를 거꾸로 돌린 디팍처럼, "그녀, 클로이"를 가능케한 섬세한 산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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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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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 '노라'의 시선을 좇아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게 된다. 노라까지도. 복선이 딱 짜 맞춰지는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영원히 사라진 언니와의 미래, 언니 개인의 미래를 더듬더듬 짚는 노라의 미련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의 현재형 문장에는 허구가 담긴다. 언니가 없는 현재에 '실재하는 언니'와 언니가 없을 미래에 '할머니가 된 언니' 등 다양한 모습으로 현현한다. 애증으로 범벅된 관계여도, 눈물 한 방울 없이도 온 맘 다해 애도할 수 있는 자매의 관계성을 느꼈다. 잊으라고 말할 수 있는 건, 피해자 다움의 프레임에 가두는 건 어떤 근거에서 파생된 권리일까. 타인의 아픔을 재단하고 과단할 수 있는 권력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소거된 여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한편, 옮긴이의 친절한 해설이 부록으로 실려 있어서 소설의 핵심을 너끈히 파악할 수 있었다. 동생이 미워지려 할 때, 페미니즘에 지칠 때 꺼내서 띄엄띄엄 펼쳐보고 싶다. 노라와 레이첼의 일상을 덮쳐온 불안감과 공포가 오직 여성에게만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사실에 자못 서글퍼졌다. 그러나 소설 전면이 가리키는 페미니즘의 힘을 더욱 믿게 되었다. 여성의 일상과 같은 두려움을 걷어줄 단 하나의 사상이라는 걸 낙관할 수 있게 되었다. 스릴러만의 쫄깃쫄깃한 서사를 충족시키면서도 자매애를 수북이 느낄 수 있는 소설을 오랜만에 만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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