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의 이름'을 건축재로 견고하게 쌓는 러시아 문학의 장벽이 이 소설집에는 없다. 분량이 적을뿐더러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서정적이고 고요하지만, 간혹 강렬한 폭풍이 휘몰아치는 이반 투르게네프만의 서사가 인상적이다. 로맨틱한 필치가 글에 풍미를 더한다. 가장 골몰한 작품은 역시 <파우스트>다. '파벨'이 친구에게 적은 편지글을 바탕으로 금지된 욕구와 도덕성이 격렬히 충돌해서 그 어떤 가치판단도 할 수 없었다. 자주 당착에 고립되었다. 격정적인 문체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낭만으로 변모했다. 깎이고 팬 마음이 되어서야 삶의 교훈을 얻는 인물들이 안쓰러웠다. 비로소 나는 '삶을 연장하는 것이 사랑이자 욕망 억제이자 가치관'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