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작하는 여행 스케치 - 당당하게 도전하는 희망 그리기 프로젝트 지금 시작하는 드로잉
오은정 지음 / 안그라픽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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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지금 시작하는 여행 스케치」나를 그릴 수 있는 여행



 

 그림 그리기는 오래전부터 나의 작은 소망 중 하나였다. 누구나 경험해봤을 반에서 그림 좀 그리는 아이를 부러워하는 정도, 그 정도가 나는 심했다. 그림이 글과 마찬가지로 나를 표현해주는 하나의 방식으로 자리 잡기를 바랐다. 안에 잠겨 있는 나를 오롯이 직설적으로 내뱉기보다는 오묘하고 추상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에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며 사회에 물들고, 점점 나다움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글은 중심을 잡게 해주는 생명력을 지녔고, 그림도 그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지금 시작하는 여행 스케치」의 저자 오은정 작가처럼 그림으로 나다움을 지키고, 그림으로 어두운 면들을 헤치고 나아갔으면… 그녀처럼 여행다니며 소박한 스케치를 하고, 그 그림에 겉멋 잔뜩 든 글귀를 적어두고 킥킥 웃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 정말 많이 했다.

 

 열심히 한다고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실망하면서 천진난만했던 내 모습도 사뭇 달라져갔다. 그래, 어른들은 그런 내 모습에 철이 들었다고 했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세상의 어두운 면들을 마주치며 '나다움'을 잃어갔던 것이다. 

P. 10

 

 

 

 그런데 나는 그림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내가 가진 붓은 도화지에 닿지가 않았다. 전문가 수준의 그림을 바란 건 결코 아니었지만,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항상 못 그린 기린 그림이었다. 적어도 그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참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잘 그리진 못하지만 나만이 그릴 수 있는 특색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건만, 내가 뭘 그린지도 못 알아보는 그림이 되기 십상이었다. 

 누군가는 열심히 그리다보면 나아질 거라고 말하겠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프로 농구 규정에 따라 305cm 높이에 있는 농구 골대라면 슛을 던지는 연습을 할만하겠지만, 농구 골대가 300m 높이에 있다면 연습할 엄두가 나겠는가? 그저 미술은, 참 잘도 그렸네 라며 보고 즐기기 적당한 상공에 있었다. 

 

 나 역시 갖가지 방법으로 여행 스케치를 시도했다. 돌아다니는 동안 그릴 시간이 없다면 집으로 돌아와서 그리면 된다. 전문가들처럼 능숙하게 그릴 수 없다면 서투르지만 멋지게 그릴 수 있다. 모든 재료를 다 같추기엔 배낭이 너무 무겁다면 펜과 딱풀 하나면 된다. 

P. 12

 


 

 정말일까? 팔랑팔랑 거리며 흥분된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갔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실패했다. 내 그림은 그냥 서툴뿐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스케치 기법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은정 작가는 이미 「지금 시작하는 드로잉」이라는 기본 스케치 기법을 가르치는 책을 냈다. 대신에 이 책이 지향하는 모습은 급변하는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조금은 빈둥거리며 여행 스케치를 통해 '나'라는 생명력을 지키는 모습을 그려냈다. 유명 관광지를 배회하기보다는 작은 마을을 둘러보고, 허겁지겁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보다는 길가에 주저앉아 동물들과 소통하는 그런 아날로그적인 여유로운 스케치 여행.

 

 미국의 어느 경제학자가 1900년부터 2005년까지의 근무시간과 여가시간을 조사한 결과, 여가시간에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현대사회는 분명 근무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많은 기술이 개발되었지만 그에 비해 정작 인간은 여유시간이 더 없어진 셈이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하긴 기계의 도움으로 어떤 일을 빨리 끝마쳤어도 그다음으로 휴식을 취하는 대신, 다른 일을 곧장 해버리는 것이 일상이다. 애써 시간을 벌었는데 그 시간에 놀면 아깝다는 생각에 말이다.

P. 14

 

 

 

 책에는 오은정 작가가 여행을 다니며 겪었던 에피소드, 경험담과 함께 작은 스케치들이 있다. 스케치와 함께 하는 여행을 즐겁게 하는 방법, 노하우도 빼놓지 않았다. 그녀가 그리는 길을 따라 걸으며 나도 절로 여유가 생기는 기분이다. 다행히 나는 내가 뭘 썼는지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글은 가지고 있다. 그녀의 스케치를 따라할 순 없지만, 그녀의 편안한 삶은 따라 나의 글은 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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