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잘도 어울리네‘
어울린다는 말은 내게는 엄청난 의미를 가진 말이다.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했으니까. 무리에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 경멸과 질투심 섞인 감정이 들곤 했다.
- P7

내가 어째서 크리스타와의 우정을 바라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명확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는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 P8

"올 거니?"
전세는 어느새 역전되었다. 그녀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아니라 내가 부탁을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 P12

여섯 살에는 옷 벗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다. 스물여섯살에 옷 벗는 일은 이미 낡은 습관이다.
열여섯 살에 옷 벗는 일은 가혹한 폭력 행위다. - P50

나는 웃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내 편을 한 사람 잃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재미난 사건이 아니라 끔찍한 사건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크리스타는 아이가 아니며, 그것이 엄마를 홀리려고 그녀가 간계를 부린 것이라는 사실도 나는알고 있었다.
- P25

"저는 혜택받지 못한 환경에서 태어났어요."
그러고는 시선을 떨구었다.
나는 방금 전의 설문조사에서 그녀가 10점을 따냈다는걸 알았다.
- P31

그녀의 마지막 말에 뭉클해진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크리스타를 잘못 판단한 건 아닐까? 그녀에 대한 내 느낌은 근거 있는 것이었나?
엄마는 우리 둘이 벌거벗고 있는 걸 보고서도 불쾌하게여기지 않았어. 어쩌면 내가 내 몸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있다는 걸 알고서 그녀가 그랬던 건 아닐까. 그러는 게 니한테 유익할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 P33

심지어 벌을 받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가 내게말을 걸지 않는 건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내가 벌을 받아 마땅한 이유를 찾느라 내가 한행동들을 되짚으며 몇 시간을 보내곤 했다. 벌의 근거를도무지 찾지 못해도 나는 벌의 정당성을 의심할 생각조차하지 못했다.
- P39

"네가 쟤를 우리한테서 좀 떼어놓아야 할 것 같구나."
아버지가 거들었다.
나는 오싹했다. "네가 쟤를 우리한테서……" 라는 말 속에 담긴 네 사람의 관계가 끔찍했다. 나는 어느새 제삼자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3인칭으로 말한다는 것은 그가그 자리에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나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대화는 ‘너‘와 ‘우리‘ 로 지칭되는 사람들 사이에서이루어지고 있었다.
- P42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지독히도 괴로워하는 한 여자애를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16년이나 묵은 저 오랜 고통을 이용할 데가 있으리라고 직감했던 것이다.
- P52

"그러시다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네요."
그녀는 우리가 도리어 고마워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청을 받아들였다.
엄마가 다가가서 크리스타를 안았다. 크리스타는 코를찡긋하며 기뻐했다. 아버지도 환하게 웃었다.
나만 고아였다.
- P59

보잘것없지만 내게는 참으로 소중한 이 공간도 이제 우정의 이름으로 침범당할 것이다. 부모님의 희미해진 애정마저 잃지 않으려면 나는 없는 우정을 있는 척 가장해야만 했다.
- P63

이처럼 그녀는 자신이 재능 있고 용기 있고 나이에 비해 성숙하며 빈틈없는 여자라는 이미지를 내세웠다. 혜택받은 환경에서 태어난, 약삭빠르지 못하고 미련한 멍청이를 까뭉개고서 말이다. 대체 그녀가 무슨 술수를 써서 교사를 부모로 가진 것이 대단한 물질적 안락을 의미하는 것이 되게끔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 P69

내가 가진 보잘것없는 것을 내게서 빼앗는 것으로는성에 차지 않나봐. 내가 송두리째 썩어 문드러져야 하나봐! 내 약점을 알고서 일부러 그걸 이용하고 있잖아.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즐기고 있어. 나를 희생양으로 선택한거야. 나는 저에게 좋은 것만 주는데, 저 애는 나한테 나쁜 것만 주고 있어. 끝이 좋지 못할 거야. 앙테크리스타,
내 말 듣고 있지. 넌 악이야. 용을 물리치듯 난 널 물리치고 말 거야!
- P81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사회면의 신문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16세 소녀가 부모와 친구를 살해했으나 살해 이유를 한사코 밝히지 않고 있다.>
- P84

머릿속에서 다시 두 줄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16세 소녀가 절친한 친구를 살해한 뒤, 그 사체를 요리해서 먹여부모를 독살했다.>
- P85

크리스타의 질문은 언제나 가짜 질문이었다. 오직 내가되물어주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묻는 질문이었다. 질문은끝없는 자화자찬의 수단일 뿐이었다.
내 대답은 듣지도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순순히말했다.
- P91

 아르셰는 , 다리가 미치는 거리를 보폭이라 하듯,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말한다. 이 말만큼 나를 꿈꾸게 하는 말도 없다. 이 말에는 끊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시위가 당겨진 활과 화살, 그리고 무엇보다.
시위가 당겨지는 숭고한 순간, 쏘아진 화살이 솟구쳐 날아가는 순간, 무한을 향한 지향, 그리고 활의 욕망이 제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화살이 날아갈 수 있는 거리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의연한 실패,
한참 날다 멈춰버리는 활기찬 추진력 등이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아르셰‘ 는 멋진 비약이요,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를 내포하고 있으며, 한순간에 불타버리는 순수한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 P93

나는 크리스테 (christée)‘ 라는 말을 지어냈다. 크리스타의 사정권, 크리스테는 크리스타의 독이 미치는 반경을 의미했다. 크리스테는 몇 아르셰만큼이나 방대했다.
크리스테보다 훨씬 넓은 개념도 있다. 앙테크리스테다.
- P93

"네가 빌렘 교수를 찾아가서 물어봐."
"아냐. 네가 가는 게 좋겠어. 내가 나한테 불리한 항의를 하러 찾아간다는 건 말도 안 돼. 빌렘 교수 성질 알질아. 화내실 거야."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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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징벌의 인문학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

가스파 노에(Gaspar Noe, 1963~ ) 감독의그 쓸쓸하고 어두운 영화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 2002)의엔딩은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라는 문구였다. 시간의 파괴적인 힘은,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고 인간의 시간은 앞으로만 간다는 아주 단순한 두 가지 사실에서 나온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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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는 정말 다정한 나무야. 언제나 바스락거리고 소곤대며말을 건네잖아."
- P197

그래도 당연히 다이애나가 제일 좋고, 언제까지나그럴 거예요. 전 다이애나가 정말, 정말 좋아요.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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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하는 사람만이 눈물을 흘린다.
엘 그레코Greco, 1541~1614

하늘 아래에서 벌어진 어떤 일도 숨길 수 없다. 그동안 쌓은 죄와 악행도 그대로 드러나리라. 초록색, 푸른색과 청회색 물감의 격렬한 붓질은 이 그림을단순한 도시의 전경이 아닌 위기에 찬 시대정신의 표현으로 만든다. 톨레도를 바라보는 엘 그레코의 눈은 눈물에 젖어 있었을것이다. 그는 이 도시를 사랑했으니까.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온당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법이니까.
196p

의미한다. 종말과 구원은 함께 오는 것이다. 세상이 멸망하기를바라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이 끝나고 정의로운 세상의 도래를 희망하는 것이다. 
199p

 죽는 줄 알면서도 제어하지 못하는 무절제한 욕망이 후대의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눈물에 젖은 눈으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지 않으면,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눈물이 우리의 눈에서흐르게 될 것이다.
204p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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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을 알지만 출구를 찾지 못할 때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1503~1540

파르미자니노 같은 매너리즘 예술가들의 작업은 기존 방식을 연장하는 것의 무의미를 폭로한다. 매너리즘에서 탈출하는 방식 역시그 일의 바깥을 바라보는 것. 자신이 하는 행동의 본질을 매일성찰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든 매너리즘이라는 독한 이끼가 끼게마련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을 모두 던지고 제로로 세팅해서, 변화하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다시 성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움에 도달할수 있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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