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은 안 돼요.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말인가 하겠네요."
"한 사람만 알아들으면 되죠."
싱긋 웃는 그의 모습이 속눈썹에 내려앉은 겨울 햇살처럼 눈에 아려왔다.
- P171

어른들의 마음이 편해지는 방법은 내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구나 싶었다. 돈이 더 들더라도 나까지 걸스카우트를 시켜야 은이 이모 마음이 편해지는 거였다.
- P202

평생 궁하지 않게 살아온 아버지 연배의 남자는 저런 모습이구나 싶었다.
- P204

나는 연희 선생님의 진지하게 빛나는 얼굴, 그 단호함에 조금 감탄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녀는 우리더러 좋은 나이라고 했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건 그녀 자신 같았다.
- P213

나는 갔다 왔고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어떤 건지 알 것 같았거든요. 아름답고 자유롭고 전혀 다른 세계 같아서 두려웠습니다. 몹시 아름다운 건 감당이 안 됐고 익숙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밤, 모닥불, 노래들, 수안은 야영장으로 도망쳤고, 나는 반대로 야영장에서 도망쳤습니다. 
- P222

"저런 곳에 있었어? 보물찾기도 안 했네."
나는 중얼거렸다. 클로버도 보물도 없는 곳에서 소년은 외롭고 고요해 보였다.
- P235

모든 걸 이해해주던 마음은 상대가 선을 넘는 걸 깨닫는 순간 경고음을 보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의 깊은 곳을엿본 기분일 때, 우리는 실망했고 배신감을 느끼며 약간씩 상처받았다.
- P261

무엇을 확인하려고? 그즈음 수안은 우물의 바닥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다. 두레박이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심연으로 밧줄을 내려보는 듯한. 하지만 난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았다.
- P267

수안은 좀 더 슬프고 싶었다는 걸, 아직도 숭모의 죽음을 미처 다 슬퍼하지 못했다는 것도깨달았다. 누군가의 죽음과 사라져간 것들에 대해, 우리는 인내의시간을 두고 품위 있게 슬프고 싶었다. 농밀하게 슬픔을 나누고 음미하고 싶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다. 진짜 슬픔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품위 있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 P269

그때 이후로 수안이 연희 선생님을 언급한건 처음이었다.
"전에는 나도 그 말처럼 나침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근데 이젠 아닌 것 같아. 바람 부는 대로 따라가도 안 될 건없잖아. 더 자유로울지도 모르고."
수안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그 속에 하나쯤 접어버린 듯한 느낌이 전해져와 조금 속상했다.
- P323

우리 사바스가 훨씬 더 멋졌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기억은 얼마든지 바뀌고 채색되는 것이었다. 없는 추억은 만들면 되는 거라고.
- P339

나를 보는 이모의 눈빛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왜 네가 그렇지 않지? 어째서 내 딸이지? 그건 나를 슬프게 했고, 그런 무언의 말을 전해 들을 때면 가슴이 꽉 눌리는 것만 같았다. 그건 내 탓이 아니었으니까.
- P366

이 집도 허문대?
그래.
넌 좋겠네. 나도 사라지게 돼서.
아니, 슬플 거야.
- P369

걱정과 설렘, 그리고 기대와 불안이 내 속에 떠다녔다.
읍내 풍경은 처음 봤을 때와 변함이 없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제는 정말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P393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너무 많은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왔으니까. 싫으면 싫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했어도 좋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식구들 서로가 더 보이지 않게 조금씩 상처 주고 상처받고 했는지도 몰랐다.
- P396

넌 그 소년을 봤던 거야?
아니야. 난 너를 봤어. 유리알 속엔 네가 있었는데.
그리고 수안은 숲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 P421

누군가를 몹시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그 곁에 있고 싶은 마음, 넌 이해되니?
- P427

배낭을 추슬러 메고 혼자 여행지를 벗어나는 수안의 뒷모습을바라보았다. 나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내 사촌은 어느새 내가 위로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 멀리 가버린 것만 같았다. 수안은 아직도 내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고, 나 또한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날만은 너무 버거웠다.
- P448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인가 해주어야 한다고 사랑하니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믿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는 내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닫습니다. - P455

세월은 상처를 잊기엔 너무 느리고, 무심했던 이들의 근황을 따라가기엔 너무 빨랐다. 만화방집 아들은 어느새 서른 살이 됐고,
내 마음은 일찍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
- P458

소년은 변했지만 또 변치 않았다. 내 속의 소녀도 변했지만 또 변치 않은 것처럼.
- P466

"어서 와, 수안아."
울타리 너머 바람이 불어왔다. 마당은 고요하고 잠옷을 입은 그아이가 사립문 앞에서 웃고 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순간, 우리는 행복했다.
- P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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