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나는 씨앗을 심거나 변소를 파거나 일상을 세우는 것보다 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먼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날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과 앞으로의 운명이 달라지진 않는다. 나는 하늘을 지붕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차근차근 그곳에 머물 방법을 찾아나갔다. - P185
식구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수풀 사이에서 다급히 튀어나오는 약한 새끼사슴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나를 신뢰하는 사슴가족을 볼 때마다 동지애를 느꼈다. - P191
내 무릎에 축 늘어져 있는 푸르스름한 아기를 향해서, 그리고어쩌면 나 자신을 향해서 있는 힘껏 소리쳤다. "살아야 돼!" 말 한마디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듯 나는 계속해서 흐느끼며 외쳤다. - P199
나는 바위에 앉아 약한 새끼 사슴을 기다렸다. 그러나 연약한 새끼 사슴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나는 슬픈 마음에 베이비 블루를 더 꼭 껴안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 P207
세상에는 슬픔을 넘어서는 슬픔, 펄펄 끓는 시럽처럼 아주 미세한 틈으로도 스며들어 버리는 그런 슬픔이 있다. 그런 슬픔은 심장에서 시작되어 모든 세포로, 모든 혈관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그런 슬픔이 한번 덮치고 가면 모든 게 달라진다. 땅도, 하늘도, 심지어 자기 손바닥마저도 이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야말로 세상을 바꿔버리는 슬픔이다. - P209
나를 바라보는 루비앨리스의 움푹 꺼진 한쪽 눈에는 연민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옆에 불룩하고 거친눈은 무슨 일을 겪었든 이제는 다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 P221
윌슨 문과 사랑에 빠진 것은 내 평생 가장 진실된 행동이었다. 그런 선택이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행동의 진실성이 흐려지는 건 아니다. 그럴 땐 그저 있는 그대로 그 여파를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끔찍하든 아름답든 절망적이든 어떤 결과가 닥치든 간에 그저 최선을 다해 마주하면 된다고, 윌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 P224
긴 침묵 끝에 아빠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이지만 충분하지 않은 말이었다. 그 말을 뱉고 가슴이 뒤틀리듯 아팠다. - P228
나는 충격과 연민을 감추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아빠가 고개를 위로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워졌음을 아는 동물의 표정이었다. 두려움과 체념이 뒤섞인 슬픈 표정이었다. - P229
그때 아빠는 내가 긴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묶고 있으니어머니를 꼭 닮았다고 얘기했다. 아빠의 마지막 말이었다. "너희 엄마도 참 아름다웠는데." 아빠는 잃어버린 사랑을 회상하며 애석하고도 달콤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나도 아름답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 P230
어떤 장면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조금도 흐려지지 않고 꾸준히 눈에 아른거렸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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