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내가 디지몬과 영원히 이별하는 이야기다 - P7
컴퓨터, 디지털, 세기말, 지구 종말, 가상 세계미래 세계... 이런 단어로 가득했던 20세기 말의 지구, 차원 너머 다른 세계를 그리는 비슷한 설정의 작품이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동시에 쏟아져 나온 것은어찌 보면 당연했다. 당시 인류는 1999년 12월 31일이 지나도 이 세상이 계속 이어지기를 두려운 마음으로 염원함과 동시에 세계 멸망에 대한 짜릿함도 느꼈을 것이다. - P10
당시 나는 어떤 단어로 이 감정들을 말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면 더 선명하게 마주 보고 인식하고 고민했겠지만(그러는 한편 조금 즐기기도 했겠지만), 그러기에 열한 살은 무지했고 어렸다. 이 다채로운 감정들을 나는 ‘슬프다‘라고밖에 표현할수 없었다. 그게 내 언어의 한계였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슬펐다. 내가 슬픈 건지 세상이 슬픈 건지 모르고 그저 온통 슬프기만 했다. - P12
‘유치하다‘. 사람들이 대체 어떤 대상에 이 말을쓰는지 한참 고민한 시기가 있었다. ‘유치하다‘는 단어는 감상을 너무나 단편적으로 설명하고 작품을 납작하게 눌러버린다. 열띤 토론을 준비 중이었던 나의 전의를 깡그리 소멸시키는 마법의 단어. 요즘은 많이들 쓰기 경계하는 ‘오글거린다‘만큼 막강한 단어인데 인식하지 않아 문제 삼지도 않는, 더 무서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 P16
언뜻 보면 비슷한 듯 보이지만, 무언가를 무찌르고 싶다는 마음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은 어느것이 선행되느냐에 따라 그 색이 완전히 달라지고 디지몬은 후자였다. 디지몬은 아이들을 지키고 싶어했다. 나는 거기서 비밀의 열쇠를 돌려 다른 차원으로가는 문을 열어버렸다. - P22
그렇다. 이것이 바로 신비한 세계로 끌려들어온 일곱 명의 아이들이 앞으로 겪게 될, 길고도 매우 짧은 여름방학의 시작이었다. - P22
세계를 넘기 위해 이렇게까지 은밀하게 시도한 데에는다 이유가 있었다. 혼자 그곳에 가고 싶었다. 아주 훌쩍, 창호지에 구멍을 뚫듯 폭, 세상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흔적도 없이.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외로움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 P25
하모니카는 모나고 날카로워 보이는 매튜가 사실은 외로운 아이라 말해준다. 하모니카의 쓸쓸한 소리가 디지털 세계에 잔잔히 흐른다. 파피몬은 가만히, 그리고 나란히 앉아 듣는다.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말해준다. 매튜 네가 연주하는하모니카 소리가 참 좋다고. - P34
혼자 있는 순간마다 파피몬이, 혹은 내 디지몬이 옆에 있다고 상상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순수한 상상과 정신병적 망상의 경계에 머물렀던 것 같다. 그래도 디지털 세계는, 이 세계와또 다른 차원의 세계는 외로운 나에게 큰 위로였다. - P34
나는 디지몬의 진화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것도, 그 진화가 완전한 성장이 아니라는 점도 좋다. 디지몬은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진화할 수 있고 다시 돌아온다. 잘못 진화하면 다시 진화하면 된다.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무언가 그릇된 것처럼 느껴지면 나는 이 문장을 자주 상기한다. ‘괜찮아, 다시진화하면 돼‘
- P46
타투를 하고 싶어서 고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고래를 남기고 싶어 그 수단으로 타투를 결심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를 몸에 새기면 세상이 작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둘러댈 수 있을 것 같았다. - P49
우선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리는 재능이란 단어를 덜 비범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사회에서는 재능에 천재성을 부여하지만 화려한 껍질을 벗긴 재능이란 어느 날 갑자기,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현듯 그것을 ‘계속하게 되는 힘‘에 다름아니다. 시킨 이가 없는데 내가 그 행위를 계속하고있다? 그렇다면 그것에 재능이 있다고 봐도 좋다. 내게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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