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히 여겨주시되, 과히 얽매이지는 마십시오.

- P83

큰물을 두 번 건너고 살아 돌아왔으니, 만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접하지 않은 일이 없지요. 
- P88

전쟁을 겪고,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덕이 있는 사람도 평온치 못한 죽음을 맞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승에는 중생이 이해할 만한 저울 같은 게 없지요. 
- P89

독살인 게 들켜도 상관없다면 격한 독을을 것이고, 독살인 것을 숨기려 했다면 굳이 글씨를 남길 까닭이 없었다. 이 어긋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P114

하지만 나도 잃은 과거에 잠겨버리는 쪽을 택했네. 앞서 이끌던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멈춰 서면, 뒤따르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방향을 바꿔 꼬리가 될 수밖에 없지.
- P154

비틀린 이야기였다. 전쟁에서 다친 몸이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천천히 나았는데, 그 사실을 전할 수 없었던 부자 사이라니. 서로에 대한 아낌이 없던 것도 아니었고 서로를 얽매려던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매초성에서 살아나온 후로 비틀려버리고 말았다.
- P160

"며칠이었을 뿐인데 몇 년을 늙어버렸다는 옛날이야기의주인공 같아졌어. 듣지 말아야 할 것들을 듣고 보지 말아야 할것들을 봐버려서 겉의 나이와 속의 나이가 달라져버렸달까?
껍질과 안 사이가 벌어지며 찢어질까 두렵네." - P170

가까웠던이와 가까웠던 이에 대한, 상대는 짐작하지 못할 친밀감이 자은에게 있었다.
- P171

일단 두섭 아저씨가 떠나셨어요. 장례가 끝나자마자요. 어쩐지 후련해 보이셔서 아무도 잡지 않았습니다. 
- P171

"잃은 것을 잃은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괴롭지요. 무엇을 잃었는지 아는 쪽이 낫습니다."
- P172

수렁에 빠졌다 생각될 때야말로 차분히 손 닿는 곳을 짚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뜻밖의 단단한 것이 잡힐 수도 있고요.
- P189

어찌 보면 사려 깊다고까지 할 수 있을, 부드러운 파괴였습니다. 
- P193

"으...... 어울리지 않아. 전혀 어울리지 않아. 나는 설자은이 데면데면해서 마음에 드는 것이네. 잘 보관한 맵쌀처럼 습기가 없는 게 좋아. 제발 다시는 그러지 말게."

- P198

자은이 기대하며 묻는 것 같아, 인곤은 바로 떠오른 답을 전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런 이가 있는 자가 부러움을 살 자인지, 없는 자가 두려움을 살 자인지 모르겠네."
- P212

그쯤 되자 차라리 한껏 파렴치한 자였더라면 좋았을 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겁을 내면서 저질렀단 말인가, 허탈했다.
미처 따져 묻지도 않았는데 울기 시작했다.
- P216

마음이 약한지 강한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친우를 위해 육백년 전통의 겨루기를 방해할 만큼 강하면서도 천을 망칠 만큼 못돼먹진 않았다. 울면서 죄를 고백하면서도 친우는 끝까지 보호하려고 했다. 어느 한쪽이라면 마음이 나았을까, 착잡해진 세 사람은 바로 소판 댁으로 향했다.
- P218

자은도, 인곤도 그 말에 웃었다. 금성에 돌아와 불미스러운 일에만 엮인다 싶었는데 재미로 쳐주다니 도은의 관점이 달랐다.
- P225

아무것도 삼키지 않는 대신 아무것도 요구받고 싶지 않다는, 나쁜 신하다운 마음이었다.
- P245

자은은 왕이 보는 그림 속의 붓이 미처 닿지 않은 여백이고 싶었다.
- P246

바로 납득되지 않아도 항상 따라준다는 것이 고마웠다. 두 사람은 합이 맞았다. 자은이 인곤과 함께 한 걸음 더 그림자 속으로 물러서려고 할 때였다.
- P272

"흰매가 죽기 전에, 다음 매를 구한다면......"
숨을 붙이게 해줄지도. 왕의 생략된 말에는 모두를 안도하게 하는 틈이 있었다. 유예된 벌로, 긴 밤이 끝났다.
- P281

"설자은."
자은의 이름을 불렀다. 자은이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형편없게 나와 혀를 깨물었다.
"나의 흰 매가 되어라."
- P284

그렇게 자은도 매가, 매잡이가 되었다. 왕의 것이 되었다.
달이 차오르고 다시 허물어지는 동안 아무것도 베지 않은 때도 있었고, 하나를 벤 적도 있었고, 수없이 벤 적도 있었다.
그것은 그다음의 이야기.
- P286

제가 쓴 이야기는 앞서 읽은 이야기들에서 태어났을 겁니다. 장르문학의 근사함은여러 시대의 작가들이 크고 높은 탑을 이어 쌓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작은 돌을 보태고 싶습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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