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나는 그 나무를 잘생긴 나무라고 불렀다. 우리는 나뭇잎 모양이나 열매를 보며 나무의 진짜 이름을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름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을까. - P9
잃어버린 화살을 찾으려면 같은 방향으로 한번 더 활을 쏴야 한다고 할머니는 말했었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다고 했다. "그것이 맞나 틀리나 긴가민가할 땐 똑같은 짓을 한번 더 해봐." - P10
레인코트는 ‘이를테면‘이란 말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 문어체 말투에 묘한 반감이 들면서도 이 사람은 어떤 걸 보고 어떤 생각을 하길래 그런 단어를 쓸까, 호기심이 일었다. - P18
다 울어버리지 말고 울고 싶은 마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울고 싶은 자신을 바라보라고 했다. 그런 복잡한 설명을 들으면서 차갑고 새콤한 오미자물을 마시면 내 슬픔은 어리둥절한 눈을 한 채 나에게서 멀어졌다. - P31
세상은 그렇게 S자 곡선을 그릴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법이니까. - P33
어떻게 이 땅이 보리차차가 아닐 수 있을까. 내 눈에는 흙이 된 보리차차의 귀와 나무뿌리가 된 보리차차의 다리가 보였다. - P38
누군가를 힘껏 끌어안아도 이 열린 창문은 닫을 수 없을 테니까. 죽은 개는 더이상 만질수 없으니까. 살아 있던 개도 날 안아준 적은 없었다. - P38
그날은 굵은 가을비가 내렸고 할머니는 보리차차에게 모자가 달린 우비를 입혀주었다. - P39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어떤 이야기는 너무 비참하게 끝난다는 것이었다. - P39
나는 내 욕구를 설계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세상에는 어떻게 그 많은 불행이 예정되어 있는 걸까. - P40
왜 목소리에는 주름이 있을까. 내 얼굴에 닿던 할머니의 손과 그 감촉. 하도 떠올리다보니 맛도 느껴졌다. 칼칼한 고춧가루 향. 물엿처럼 달고 끈적거리는 온기, 고사리나물처럼 쓴맛이 맴도는 할머니의 당부. 보리야,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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