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그것은 이미 오랜 옛날 내가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던 그런 시각이었다. 그러한 때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언제나 가볍고 꿈도없는 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인가 달라져버린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일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이제 내가 다시 만나는 것이 나의 감방이니까 말이다.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들이 죄없는 수면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고 감옥으로 인도해 갈 수도 있는 것처럼.
- P129

그때 나는 검사의 말을 이해하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그가 ‘그의 정부‘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마리였을 따름이다. 
- P132

지금의 나의 관심거리는 메커닉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불가피한 것으로부터 빠져 나갈 길이 있을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 P143

그들이 새벽녘에 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밤마다 그 새벽을 기다리며 지낸 셈이다. 갑자기 놀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싫어했다. 
- P148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너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 P157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생애 전체에 걸쳐,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쳐서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다. 
- P157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왜 인생이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생애를 다시 시작해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들인 휴식시간 같았었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 P159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준것처럼,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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