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사람들처럼 피터 역시 도통 적절한 말을 할 줄 몰랐다. 이 남자의 위로 방법은 언제나 내 감정이 사그라질 때까지 그냥 조용히 내 옆에 누워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도 참 고마운 것이, 어차피 그것 말고 그가 딱히 할 수 있는일은 없었다.
- P205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이미 찢겨나간 육체적 자율성의 조각들은 하루하루 누더기 꼴이 되어갔고, 이제 살아가는 일과 죽어가는 일은 그 차이를 분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 P215

하지만 피터에게 달라진 점은 오로지 나에 대한 감정뿐인 것 같았다. 그뒤로 우리 친구들끼리는 내가 그 두 괴한을 고용한 게 아니냐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 P227

아빠는 부부 사이가 별로 친밀하지 않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나는 아빠의 비밀을 알았지만 아빠가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늘 믿어왔고, 인생이란 게 그냥 그렇게 생겨먹을 때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 P238

세상에 우리 엄마만큼 내 기분을 있는 대로 잡쳐놓을 수 있는 신랄한 사람도 없지만, 또 우리 엄마만큼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드는 사람도 없었다.
- P240

우리는 아름답고 냉정한 성인 여자가 곧장 눈물 터뜨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추4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엄마라는 말 한마디의 파급력은그 정도였던 것이다. 나는 몇 년 뒤에 똑같은 감정과 맞닥뜨릴 내 모습을 상상했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벌에 쏘이는 그 순간부터, 나란 존재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남은 평생을 벌침이 박힌 채로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 P247

그리고 우리가 아주머니를 언짢게 만들어서 역정이 났을까봐, 얼른 쫓아가서 제발 여기 있어달라고 설득하라고 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보고 꿈이라도 꾸듯 활짝 웃기만 했다.
"그동안 아주머니도 재미있었을 거야." 엄마가 말했다.
- P252

엄마가 죽은듯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다가 아빠와 나는 갑자기 무언가에 이끌리듯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생전 열어보지도 않던 서랍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검정 쓰레기봉투에 마구 쓸어 담았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할 일을 미리 해버리려는 것처럼. 엄마가 진짜로 죽고 나면 그 일이 더 크고무거워질 걸 아는 것처럼.
- P255

우리는 엄마가 죽기를 기다렸다. 마지막 며칠은 아득하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해온 내가, 이제는 엄마의 심장이 아직도 뛸 수 있다는 사실에놀라고 있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 엄마가 그냥 굶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미칠 것 같았다.
- P256

‘사랑스럽다‘는 말은 엄마가 굉장히 좋아하는 형용사였다.
엄마는 나를 딱 한 단어로만 표현해야 한다면 ‘사랑스럽다‘는말을 고를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에게는 그 단어가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열정을 아우르는 말처럼 느껴졌나보다. 그것은 엄마의 묘비명에 새겨넣기에도 딱 알맞은 단어였다. 자애로운loving 엄마는 남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지만 사랑스러운 lovely 엄마는 온전히 자신만의 매력을 지닌 사람이니까.
- P268

어쩌면 나란 존재가 엄마가 세상에 남기고 간 자신의 한 조각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냥 겁이 났던 건지도 모르겠다.
- P269

오빠 역시 자기 몫의 슬픔이 있을 테지만 그 순간만큼은 꼭 삼켰다. 한 사람이 무너지면 나머지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어깨를 내주며 그 무게를 감당하는 법이니까.
- P270

 최대한 금욕적으로 지내려고 가족에게 눈물을 숨기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그렇게 막아두었던 감정이 한순간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우는 나를 쳐다보는 걸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실컷 감정을 풀어놓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 P274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어찌어찌 내가 엄마를 흡수한 것처럼, 이제 엄마가 내 일부라도 된 양 느꼈고, 적어도 그렇게 되길 바랐다. 그런데 미술 선생님도 그렇게 느낀 게 아닐까, 말하자면 내가 자기 말을 들어줄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느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281

겨우 요 몇 년 전에 와서야 우리는 불가사의한 문을 열어 서로를 수용할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탐색했다. 그러다 가장 풍성한 이해의 과실을 거둬들여야 했을 시간들이 그만 난폭하게 잘려나가고 말았고, 이제 나는 열쇠도 없이 남은 비밀들을 혼자서 해독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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