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와 감미로움이 내 머리에서 줄곧 떠나지 않는이 알 수 없는 감정에, 슬픔이라는 아름답고 무게 있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나는 주저하고 있다. - P15
나는 아버지와 함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말썽을 일으켰을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나의 오랜 공범자(共犯)"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없다면 난 어찌될까?" - P23
왜냐하면 안느가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도 철저하게 냉담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판단에는 악의에서 우러나온 그런 날카로움이나 정확성은 없었다. 다만 그 판단들은 너무나도 분명할 뿐이다. - P33
이것은 훌륭한 계산이었다. 이 계산의 단 한가지 결점이라면, 내 나이나 경험으로 미루어 생각해볼 때, 감동적이기보다 즐거운 것처럼 보였던 사랑의 여러 가지에 관해서 환멸적인 냉소주의를 한동안 내게 불어넣어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 P36
나는 침체한 시간이나 단절이나 일상적인 선한 감정들을 잊고 있었다. 이상적으로 나는 비열하고 파렴치한 삶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 P37
안느는 미소를 짓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웃고싶을 때만 웃는다. 사람들이 그렇듯이 예의로 웃어주는 법이 없는 여자였다. - P43
나는 바다로 달려가서 우리가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어쩌면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르는 여름방학을 한탄하면서 물속에 깊이 가라앉았다. 우리는 드라마의 온갖 요소들을 갖고 있었다. 즉 엽색가, 고급 매춘부 그리고 지적(知的)인 여인등. - P45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듯이 이것도 잃어버리지 않고 왜 여태껏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붉고 미지근한 조가비는 오늘도 내 손 안에 있어 나를 울린다. - P46
나는 더 이상 끼여들 수 없는 어떤 연극에서 벌써 따돌림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P61
엘자는 그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일주일은빨리 지나갔다. 행복하고도 즐겁고 고독한 7일이었다. - P73
나는 경멸의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다. 그녀를더없이 아름답게 만들면서 나를 좀 겁나게 하는 그 권태와 비난에 어린 얼굴을. - P76
나는 대범함이 우리의 생활에 영감을 불러일으켜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라는 것과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는 이유를 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P80
이튿날 아침 나는 베르그송의 한 구절을읽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몇 분을 허비했다. "사실과 원인 사이에서 맨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이질성은 행동의 규칙으로부터 사물의 본질에 관한 확인에 이르는 데는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인류를 사랑하는 힘을 얻어온다고 느끼는 인류의 발생적 원리와 더불어 항상 접촉 속에 있는 것이다."
- P80
나로서는 방금 끝난 그 즐겁고도 일관성이 없던 그 2년이 갑자기 얼마나 매력적인 것으로 장식되었었는지 모른다. 언젠가 그렇게도 빨리 외면해버린 그 2년이... 생각하는 자유, 부당한 것을 생각하는 자유, 도를 지나쳐 생각하는 자유, 나 자신이 내 인생을 선택하는 자유 그리고 나 자신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 - P83
활기있는 사람은 오직 우리 둘뿐이고 그녀는 그런 우리 사이로 자기의 침착성을 잃지 않은채 끼여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녀는 따사로워질 것이고 우리에게서 태평스럽고 따스한 열을 조금씩 빼앗아갈 것이다. 그녀는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훔쳐가고 말리라, 한 마리의 아름다운 뱀처럼‘. - P91
나는 안느를 쳐다보았다. 침착하고도 초연하게 엘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새 의상을 선보이고 있는 마네킨이나 매우 젊은 여인들을 바라보는것처럼, 아무런 독살스러움도 없었다. 나는 순간 치사스러움이나 질투가 없는 안느를 열렬히 감탄해 마지않으며 바라보았다. - P152
내가 안느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는 완전히 열중해있어서, 더 이상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만이 언제나 나를 문제삼아 나를 판단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게 충실하고도 어려운 순간들을 살도록 만들었다. - P158
부탁이에요. 제발 내 머릿속에다 내가 젊다는 것을 주입시키려 들지 마세요. 나는 최소한도로 젊음을 쓰고 있거든요. - P161
엘자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지난 생활의 상징, 청춘의 상징, 특히 아버지의 청춘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 P168
내가 그에게 시킨 역할이 그의 기분을 무척 거슬리게 했으며, 내가 그렇게 하는것이 우리의 사랑에 필요하다고 믿게 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것을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많은 이중 인격과 내적인 침묵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노력과 거짓말은 조금밖에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것을 이야기했지만, 내 행동만이 나 자신을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 P171
다만 내가 침대 속에 누워 있을 때나, 파리에 자동차 소리만이 들리는 새벽녘이면 내 기억이 나를 배신한다. 여름이 다시 온다. 그리고 그 모든 여름의 추억도 안느, 안느! 나는 이 이름을 아주 낮은 소리로 오랫동안 어둠속에서 자꾸만 불러본다. - P190
그때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그것을 그녀의 이름으로 해서 맞아들인다. 눈을 감은 채......슬픔이여 안녕. (여기서의 안녕 (Bonjour)이란 헤어질때의 인사(Adieu)가 아니라 만날 때의 인사를 뜻함)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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