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 님의 표정은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저 얼굴은 무표정한 것이 아니다. 멈추어 있는 것도 아니다. 호는 열심히 가가 남을 바라보며 ‘잔잔하다‘라는 말에 생각이 미쳤다. 파도도 없고 물결도 조용하고 온통 파랗게 펼쳐져 있는 조용한 아침 바다를 가리키며 언젠가 성님이 하던 말이다.
- P177

그러나 지금 이 몸을 둘러싸고 있는 마루미의 꼴은 어떠한가. 지식도 이치도, 의원의 신념도 확신도, 찢어진 그물처럼 영락했다.
게다가 그것은 다름 아닌 게이치로 자신의 손으로 부른 결과다.
가가 님을 맡기로 결정되었을 때부터 게이치로-사지 가를 포함한 마루미의 위정자들은 성 아래 사는 사람들이 지금의 이 한심한 꼴처럼 가가 님을 두려워하고 꺼리기를 바랐다.
- P187

교묘한 선동이다.
그것밖에 길이 없었다는 변명이 얼마나 허무하게 울리는지.
나무상자를 열고 대망의 책을 훑어볼 만한 기력이 솟아나지 않는 것은 피로 탓이 아니다. 나는 부끄러운 것이다. 게이치로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게는 이제 이 청신한 의학 지식을 접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을 자격이 없다.
- P188

모든 이치를 잊고 모든 것을 삼켜 달라고 한번 떴던 눈을 감아달라고,
그러지 않으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간 고토에의 죽음을 덮을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토에가 죽기 전의 게이치로는 자주 우사에게 말하곤 했다. 하타케야마 공이든 누구든, 그렇지, 쇼군이라 해도 사물의 이치를 바꿀 수는 없다고. 진리는 하나다. 우사, 알겠느냐. 이제 모든 민초들도 그것을 알게 될 시대가올 것이다. 그때 틀림없이 세상은 변할 것이다, 하고.
그 말을 한 혀로,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나는 우사에게 부탁했던가.
- P189

"화가 난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화가 났어. 누구에게 화가 난 것이냐? 너 자신이냐?"
- P194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관련되는 눈과 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욱더 비밀은 새어나가기 쉬워진다. 본인에게 그럴 마음이 없어도 비밀이 생겨나는 자리에 우연히 있게 되는 사람도 있다.
스님처럼, 우사처럼,
그렇게 새어나간 비밀의 대부분은, 이번에는 알고도 모른 척하는 사람들 속에서 감추어져 간다.
- P239

이자키는 다른 무언가, 더 중요한 무언가를 안고 있다. 그것을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고, 아니, 말해도 되는지 아닌지 망설이고 있다. 그런 분위기이다.
- P242

"이자키 씨, 혹시 생각나신 겁니까?"
필요할 때는 돌아오지 않고 잊었을 때쯤 찾아오는 귀찮은 기억.
- P243

와타베의 몸에 체념이 배어들었다. 기왕 독을 마시려면 접시까지 핥아라. 이 얼마나 이 자리에 어울리는 속담이란 말인가.
- P246

작은 번의 복잡한 가계와 혈통.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는 생각과 이해.
- P249

"고데라 님도 이시노와 똑같이 강제 할복을 하게 되는 걸까?"
- P255

"가가 님, 저는 제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아니, 안다."
단호하고 엄격한 목소리다.
"너는 매일 열심히 일하고, 습자를 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이 가가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냐? 그것은 아니다. 너는 너를 위해 그리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는 언제 어디로 가게 됩니까? 어디에 이르게 될까요?"
" ‘사람‘이 있어야 하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수수께끼 같다. 사람? 제대로 된 어른을 말하는 것일까.
"고토에 님이나, 성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이 글자를 잘 익히도록 해라."
- P258

나중에 생각해 보면 반쯤은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때문에 소식을 들었을 때 와타베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멈추고, 심장이 멈추고, 피의 흐름도 멈추었다.
마른 폭포 저택에서 항구로 통하는 수로에 떠 있는 이자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 P2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