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에 비듬이 눈처럼 내려앉는 모습을보면서 느꼈던 감정, 당시에는 슬픔이라고 정의했던 그 감정의 정체를 다시 정의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가까운 미래에 그 제안을 거절했던 일을 후회하게 되는 건 아닐까, 라는 두려운 예감, 아마도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 P168
석 달 전 은경에게 기분 좋게 승진 턱을 샀다. 그러나 두살 어린 팀장은 여전히 날 ‘언니‘라고 불렀다. 친해지고다고 했다. 그런데 왜 팀장이 ‘언니‘라고 부를 때마다 친근하기보다 불편했을까. - P170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입사 초기에 들었던 그 말은 지금 잘하고 있다는 칭찬이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는 경고였다. 팀장이 제시한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 의견에 풍부하게 덧붙일 수사를 연구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내가 사온 케이크를 떠먹으며 열아홉살, 그때 교무실에서처럼 고개를 한껏 수그렸다. - P177
내가 떠나온 자리에는 누가 앉아 있을까. 내가 남긴 흔적들도 찾아냈을까. 조직 내에서 성공하는 법과 같은 내용이 담긴 자기 계발서, 시간 단위로 꼼꼼하게 정리해 놓은 일일스케줄과 장기 계획안, 컴퓨터 모니터 앞에 붙여놓은 ‘긍정의 힘으로 이겨내자‘와 같은 문구, 부장이 좋아하는 메뉴와 맛집 같은 것을 적은 메모,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지키려고 애썼던 흔적을 마주할 때의 감정을 나는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겠다. - P185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깜박 잠들었나보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것이 얼굴에 닿아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까만 고양이의 동그란 두 눈과 마주쳤다. - P200
"양이는 거의 못 볼 거야. 그래도 가끔 이름을 불러줘." "이름을 부르면 나와?" "아니, 대답도 안 해." "그러면 뭐 하러 불러?" 언니는 또 정지된 화면처럼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찾고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 P201
미팅룸으로 돌아온 언니의 코끝은 붉어져 있었고 눈가도 빨갰다. 나는 여느 때처럼 생략되어 버린 대화에 관해 묻지 않았다.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고양이도 양이를 대신할 수 없다는 말이라는 것을. 양이가 순간 부러웠다. 내가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도 그런 것이었는지 몰랐다. - P217
다른 사람의 체취를 느끼고, 서로의 호흡이 섞이고 체온을 나누는 일이 아무렇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 시간을 그리워한다. 그런데 그것이 고양이 털처럼 이렇게 마냥 보드랍고 따뜻하기만 했을까. - P219
언니와 나는 매주 목요일 저녁 여덟 시에 만났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만나지 못한 것 같았다. 아직은. - P24
대수는 숨을 들이켜고 귀를 기울인다. 괴로워하며 냈을신음 소리가, 보증금 얘기를 하기 위해 서성이던 발걸음 소리가, 딱딱한 인절미를 꺼내며 부스럭대는 비닐봉지 소리가 빈 배 속에서 났을 소리가, 그리고 아내가 속삭이던 소리가. 대수가 듣지 못한 소리다. 그가 놓쳐버린 소리들이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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