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자신은 너무도, 정말 너무도 무르고 착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신호탄이 필요했다. 경계에 닿을 듯 말 듯 찰랑이던 감정을 완전히 튀어 오르게 할 자극이. 그 순간은 허무할 만큼 난데없이 찾아왔다. - P166
좀 전까지 끓어오르는 듯했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텅 빈유리알 같은 시선이현경을 향했다. 그 안에 든게 분노인지, 허탈인지, 혹은 슬픔인지는 이제 더 이상 알 바가 아니었다. - P186
그래봤자 젤리들이었고, 그때의 사건들은 하룻밤 꿈이라고 칠 수도 있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으니까. 꿈은 깨어나면 멀어지기 마련이다. 진짜 무서운 건 그 뒤에 벌어지는 현실이지. - P204
젤리는 그런 고양이가 좋았다. 고양이는무뚝뚝하지만 친절했고,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항상 자신의 곁에 있었다. 고양이를 생각하면 몸통 안에 몽글몽글한 기포가 차올랐다. 그런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졌다. - P207
고양이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 얼굴은 낮에는 해가 뜨고 밤에는 달이 뜨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주 태연하고 또 지긋지긋해 보였다. - P208
"괜찮아. 전부 언젠가는 끝날 일이야" 놀랍게도 매번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젤리는 종종 그 말을 곱씹었다. 그건 꼭 마법의 주문 같았다. 우울한 날에도, 인간에게 모습을 들킬뻔한 날에도, 청소기가 유난히 시끄럽게 울어 대던 날에도 그 말을 떠올리면 견딜 수 있었다. 언젠가는 끝난 일. 힘들고 안 좋은 모든 것들은 결국 지나간다. 물론 좋은 것들도 지나간다. - P209
떠나지 않는다니. 젤리의 말을 믿지 않는다. 물론 젤리가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젤리는 아직 너무 어려서 모를 뿐이다. 떠나거나, 떠나지 않는 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란 사실을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P211
그 힘은 마음이라는 줏대 없는 덩어리를 마구 주무른다.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고 한없이 연약하게 만든다. 젤리는그 사실도 모르고 책임감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떠나지 않는다느니, 영원히 함께 하자느니와 같은 허황된 말들을 고양이는 어느 순간 그 주문 같은 말들에 휘둘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 P212
그날의 일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건 하룻밤의 악몽일 뿐이었다. 젤리가 그날의 일을 몰랐으면 했다. 알고 나서 괴로울 기억이라면 그냥묻히는 쪽이 나았다. - P226
그중에서도 제일 제멋대로인 것은 마음이다. 누군가와 나눈 마음은 제 것인데도 완전한 제 것이 아니었다. 늙은 인간도, 그의 딸도, 녹아내린 그날의 인간들과도 그랬다. 결국은 전부 떠나가고 자신만 남았다. 남은 기억을 떠안는 존재는 늘 저뿐이었다. 제 마음 하나 온전히 지킬 수 없는데, 아주 오래 살아봐야 과연 무슨 소용인가 싶다. - P234
"그동안 고마웠어, 고양아." 고양이는 대답 대신 발을 들어 올렸다. 차오른 눈물이 흐르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그리고 꼭 맨처음 젤리를 만났을 때처럼, 젤리의 머리를 꾹 눌러 발자국을 남겼다. 자국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겠지만, 이 기억만큼은 쉽게 사라지지 않길 바랐다. - P272
오히려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단편소설 <미아>에서의 ‘유지‘와 같은 선택을 하는 인간들이 더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들 말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짧은 순간이나마 행복해시기 위해서 노력하는 인간들 말입니다. 놀이공원에는 그런 인간들이 모이곤하니까요. 죽고 싶어서, 불행해지고 싶어서 놀이공원을 찾는사람은 없잖아요. (프로듀서의 말) - P2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