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그들의 말에 동조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그런 평가의 도마 위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안심했을까.
- P221

어른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같이 증오할 사람 하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 P222

그들은 삼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혜인이 아는 한 그런 말을 했던 사람 중에 삼촌보다 더 행복한 이는 없었으니까.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
- P222

산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마술 같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함께하다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검고 텅 빈 상자에서 흰 비둘기가 나왔다가도 마술사의 손길 한 번으로 사라지듯이 보통의 마술에서는 마술사가 사라진 비둘기를 되살려내지만, 삶이라는 마술은 그런 역행의 놀라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 P223

슬퍼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덜 아플 거라고 어른들은 생각했었던것 같다. 나중에 조용히 말해주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막으면 막아지고 닫으면 닫히는것이 마음이라면,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까.
- P225

창밖으로 해가 지는 들판이 보였다. 들판 위로, 언덕 위로, 지붕 위로 따뜻한 햇살이 내렸고, 그건 마치 하늘이 본연의 빛으로 세상에 홀러내리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있으면 위로가 된다는 누군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너무 많은 것들에서 아름다움을봤다. 그래서 위로가 되었을까. 그러나 내게 위로받을 자격이 있는지 그때의 나는 확신하지 못했다.
- P256

난 항상 열심히 살았어.
하민은 종종 그 말을 했다. 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라는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hard‘는 보통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이는 말 아닌가. ‘hardworking‘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는 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하민이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자기를 몰아붙이듯이 살았다는 것인지, 별다른 재미 없이 살았다는 것인지, 열심히 산다는 게 그녀에겐 올바르다는 가치의 문제라는 것인지, 삶의 조건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것인지 말이다.
그녀가 그 말을 할 때, 그래서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 P265

그런데 그 여자 생각까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래 보여서 추측하는거야?
알지.
그녀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서 나를 봤다. 무슨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리고는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사람이니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붉어졌다.
- P273

그 일이 있은 후에도 그녀는 예전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하민을 대했다. 예의바르고 부드러운 모습 그대로. 그런 태도가 자신을 향해 세운 벽이었다는 것을 하민은 그제야 이해했다. 
- P280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언니.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싫어.
- P282

삶의 희미함과 대조되는 죽음의 분명함을. 삶은 단 한순간의 미래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 P283

최은영의 소설은 민감한 감각과 감정들로 가득차 있다. 수줍음과 어색함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순정한 인물들은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일렁이는 잔물결이나 그림자를 놓치지 않고 겨우겨우 짐작하면서눈물을 참아내기에 (「지나가는 밤」, 100쪽), 우리는 그 헤아림 앞에서어쩔 수 없이 "따뜻한 온도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 (아치디에서」.
269쪽)을 받게 된다. 최은영의 첫 소설집을 두고 쏟아진 감탄사들은 대개 이 섬세한 따뜻함을 향해 있었다. 
- P303

우리는 결국 이 우주속에서 각자의 궤도를 홀로 돌고 있을 뿐이라는 걸 새삼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일까. 최은영은 관계가 연결되고 넓어지는 지점이 아니라 단절되는 지점을 잔인하리만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이것이 짙은 애상을 자아내는 것은 우리가 이 단절에서 어떤 결정적인 이유나 잘못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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