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썩어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거구나
당연한 걸 늘 까먹고 말아서 이렇게 쉽게 멍들어버리는거구나
- P16

침묵과 침묵 사이에서 말 못한 사연은 끈적하게 상처에 달라붙었다

너무 간지러워 긁고 또 긁었다
이것을 부스럼이라 부를지 부질없음이라 부를지
- P17

영혼의 즙이란 줄줄 새어나오는 거였어
한낮에도 이렇게 깜깜할 수 있는 거였어

서랍에서는 너무 많은 인기척이 느껴지고
그런데도 나는 무서움을 잘근잘근 씹어본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해본다
- P20

산에 자주 오르는 사람은
계곡이 나타난다고 한들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거기에 기다리던 사람이 있다
그렇다 한들 만나러 가지 않는다
언젠가 한때 정을 나누고 서로에게 의지했던 사이였지만
그이는 계곡에 빠져 죽은 혼이 되어 있을 뿐이라
더는 마주할 수가 없고
- P42

그 옛날 무수골에 들른 왕은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모든 근심과 걱정을 다 내려놓고 가겠다고 말했지만 
아마 전부를 내려놓진 못했을 것이다.
- P43

매년 무수골 입구에는 작고 흰 버섯이 피어나는데
그 이름은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그걸 보기 위해 사람이 몰리는 여름마다
꼭 익사자들이 생겨나 계곡은 충만해진다
- P44

그리하여 오늘 죽은 자와 내일 죽을 자와
아니 죽지 않을 자 모두 
참 다정한 귀신이 되려 노력하는 걸 보면서
머리카락을 늘어뜨린다
- P46

아침 일찍 건널목 앞에 선다
녹색녹색적색 읊조리며 신호등을 뚫어지게 본다
오늘도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기를
- P52

반짝반짝 빛나는 돌멩이 위를
걱정도 없이 슬픔도 없이
내디딘다

온전한
나의 수요일이다
- P54

반짝거리는 금빛 손잡이는 녹이 슬었고
현실주의자라고 여긴 자들은 낭만주의자에 불과했고
암막 커튼에 가려진 추악한 사건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 P59

후후 불어 배고픔을 삼키려는 찰나
냄비 아래에 놓인 작은 책에서
귀신이 비집고 나온 것입니다

나의 나타샤
나는 그렇게 부르기로 했습니다
- P62

사실 나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
- P64

가을에는 당당히 코를 풀면 된다
참았던 화를 좀 냈다고 해서 주눅들지 않아도 된다

가을에는 오히려 사나운 호랑이쯤으로 변신해 
산속에 억울한 마음을 훌훌 버리면 된다
- P66

시간은 척척 앞으로 향해 가는 것 같지만
자꾸 뒤로 감기는 것이고
인간은 착각에 착각을 거듭하곤
틀에 박힌 생각을 오븐에 구워 창문을 만들어낸다
- P75

덥석 순간을 베어 물자
다디단 몽상이 지나갔고 내일이 지나간다
- P75

사랑은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지
오늘 태어난 예수도 그랬을걸
만백성의 사랑쯤이야 우스웠을걸
- P75

위스키에 부어 넣은 약속과 보드카에 섞은 한숨을 마셔요
잔에 따른 미래가 일렁이면

괴괴하고 묘묘한 전술력 마지막 단계까지 단숨에 오르는것입니다
- P96

선명한 어둠은 갑작스레 눈앞을 가로막고
햇볕에 선 모두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하느라
- P97

그 표면엔 내가 달라붙어 있지, 눈이 세 개 달린 모습으로,
그렇담 넌 요괴로구나. 이마에 달라붙은 배꼽을 본다. 나는살았을까 죽었을까.
- P103

오늘은 다정함을 사라지게 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

그럼 저도 계속해서 하루치의 목숨을 살려보겠습니다
- P128

이제야 아주 명징해져요 폭력에 이유란 건 없어요 거기에 대항할 마지막 임무였어요 내가 청록색 괴물이 되는 일은 말이죠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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