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을 가꾸는 일은 놀이 삼아 하면 즐겁지만, 생활과 의무가 되면 즐거움이 사라져버린다.
- P8

이곳에서는 봄이 왔다고 저절로 나타나는 게 거의 없다. 그래서 벌거벗은 화단은 흙을 고르고 씨를 뿌려줄 사람의 손길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 P9

은빛 버들가지를 꺾어다 방에 꽂아두고, 당연한 듯 제때에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경이로움을 기분 좋게 감탄하며 바라볼 수 있다. 생각은 많아도 걱정 따위는 하나도 없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만 바라볼 뿐, 밤에 내릴 서리나 풍뎅이 애벌레, 쥐 또는 다른 피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P10

그것들이 시들고 썩고 분해되는 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어느것 하나 그냥 버려지는 건 없다. 정원사가 세심하게 보관한 그런 추한 쓰레기 더미는 햇빛과 비, 안개, 공기, 추위에 산산이 부서진다.
다시 한 해가 지나고 여름이 화려하게 정원에 돌아오면, 시체였던 모든 것들은 어느새 썩어서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 그 땅을 기름지고 검고 비옥하게 만든다. 그리고 얼마안 가서 우중충한 쓰레기더미와 식물의 시체에서 다시 새싹이 난다. 썩어 분해되었던 것들이 힘차게 다시 색채를면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온다. 
- P16

모든 작은 정원에서 그런 순환이 조용하고 분명하게 빨리 진행된다. 여름은 지난해의 죽음에서 양분을 얻어 소생한다.
흙에서 식물로 자라난 것과 똑같이 모든 식물은 다시 조용하고 확실하게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 P17

다른 모든 이들처럼 나도 이 질서정연한 자연의 순환을 당연한 일이자 근본적으로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할 때, 땅 위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이 이런 순환에서 빠져 있고,
무한한 순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개인적인 특별한 무언가를 가지려 하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가, 생각하곤 한다.
- P17

비가 내릴 것 같지 않은 하늘 아래서 나눈 우리의 아침대화는 그저 대화 자체를 위한 것으로, 하나의 놀이이자 오락이며 결과를 문제 삼지 않는 순수한 미적 행위였다.
로렌초의 선량한 늙은 얼굴을 보며, 대화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적절한 정중함으로 방어벽을 치는그의 외교술의 대상이 되는 것이 즐거웠다.
- P23

괴테의 시처럼 "모든 햇살과 모든 나무, 모든 바다와 모든 꿈이 그의 심장에 모였다." 이제 그는 정원 한구석에 갇혀있다. 그가 관리하고 설계하고 만들고 다듬고 거닐고 생활했던 곳. 익숙한 나무와 풀, 관목과 꽃밭이 있는 곳. 세상은 작아졌지만 충만함은 작아지지 않았고, 장미 덩굴은 넓은 세계와 바다보다 덜 지쳐 보인다. 모든 소유는 구속이었고, 모든 이해는 포기였으며, 모든 포기는 미소와 생각안에서 미화되었다.
- P29

늙은 원시인은 다시 멀리서 떠다니는 다채로운 산봉우리를 보며, 자신의 마음을 살폈다. 그는 북쪽, 포기하는쪽, 그리고 채울 수 없는 갈망의 편에 섰다. 그러나 전투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가 인생의 절정을 넘은 뒤, 계곡의 긴 그림자 안으로 깊이 내려간 뒤, 그의 생각은 죽음의 공포를 버렸다. 
- P31

아, 그리고 이 여름 소리! 누군가에게는 편안하고 누군가에게는 슬픈 소리. 그리고 내가 아주 사랑했던 소리. 자정이 지날 때까지 한없이 계속되는 수매미 울음소리다. 그소리에 완전히 자신을 잃을 수 있다. 쉬익쉬익 속삭이며 휘청이는 이삭들의 바다를 볼 때처럼 줄곧 잠복해 있던 천둥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모기떼. 멀리까지 퍼지는 익숙한 낫 가는 소리. 후텁지근한 바람과 느닷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의 열정적인 추락.
- P38

 키다리 목련나무는 성장하는 모든 것, 충동적이고 자연적인 삶, 근심 걱정 없는 생활, 충만한 풍성함의 상징이자 유혹의 소리 같다.
그에 반해 침묵을 지키는 난쟁이 나무는 의심의 여지 없이 목련나무와 정반대다. 그렇게 많은 공간을 요구하지 않고, 흥에 겨워 마음껏 즐기지도 않으며, 끈기를 갖고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자연이 아니라 정신이다. 충동이 아니라 의지다. 
- P43

몇 년 동안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온 국민이 완전히 지칠 때까지 환호하고 기뻐하면서 피곤한 승리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붕괴하고 말았다. 그리고 옛날 그토록 비난했던비관주의자들의 위로를 받으며 계속 살아나갈 용기를 얻어야만 했다. 그때의 체험을 절대 잊을 수 없다.

- P43

키다리 목련나무와 난쟁이 분재, 이 두 나무는 자연의모든 것이 그렇듯, 각자 자기 자신과 자신의 권리를 지키며 대립에 개의치 않고 마주 서 있다. 둘 다 강하고 끈질기다.  - P47

 비록 이 감정이 어느 정도는 노쇠했겠지만 절대 약해지지 않았고, 특히 이 꽃이 시들 때 더욱 강렬해집니다! 꽃병 속에서 서서히 빛이 바래 죽어가는 백일홍을 바라보며 죽음의 춤을 체험하고, 삶의 무상함을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소중히 받아들입니다. 가장 무상한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꽃이며 가장 사랑스러운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59

조금 있으면 7시도 되기 전에 불을 켜야만 할 것이고, 점점 더 일찍 켜야 할 것이다. 조금 있으면 어둠과 안개, 추위와 겨울에 익숙해질 것이고, 세상이 한때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고 완벽했는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 P67

적갈색과 자주색, 회색이 감도는 나방의 날개 표면에 창조의 모든 비밀이 새겨져 있다. 온갖 마법과 온갖 저주, 수천 개의 얼굴로 창조의 비밀이 우리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꺼져간다. 우리는 아무것도 붙잡을 수가 없다.
- P70

햇살이 더욱 진해지고
색색이 고운 꽃받침 안에서 더욱 강렬하게 빛난다아, 우리 인간 동물은 가지지 못한 모든 것들
너희들 안에서 활짝 꽃피어내기를 갈망하니
- P71

나무는 늘 가장 깊은 감명을 주는 설교자다. 사람들 사이에서, 집안에서, 숲에서, 들판에서 자라는 나무를 존경한다. 홀로 자라는 나무를 특히 더 존경한다. 그런 나무는 고독한 사람 같다. 나약함 때문에 현실에서 도피한 외로운 은둔자가 아니라,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스스로 고독을 선택한 위대한 사람 같다.
- P76

너무 서글퍼서 삶을 견디기가 어려워지면, 나무가 우리에게 말한다.
"진정해! 진정해! 나를 보렴! 삶은 쉽지도, 어렵지도 않아. 그런 건 모두 유치한 생각일 뿐이지. 네 안에서 신이말씀하도록 하면 그런 유치한 생각은 침묵하게 된단다. 네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네가 가는 길이 어머니로부터, 고향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야. 그러나 너는 내딛는걸음마다 날마다 다시 어머니에게로 인도되지. 고향이란여기 아니면 저기에 따로 있는 게 아니야. 고향은 네 안에있을 뿐, 다른 어디에도 없어."
- P78

방랑은 고향을 그리는 향수이고, 어머니를 기억하고 인생의 새로운 균형을 찾으려는 동경이다. 방랑은 집으로 안내한다. 모든 길은 집으로 향한다. 모든 걸음이 탄생이고, 모든 걸음이 죽음이며, 모든 무덤이 어머니다.
- P79

나무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나무가 되려고 갈망하지 않는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 P79

나는 삶에 만족하고, 삶과 화해한다
수없이 찢기고 쪼개졌던 잔가지에서
끈질기게 새잎을 싹틔우리라
그리고 온갖 바람에도 꿋꿋이 버티리라
이 미친 세상을, 나는 사랑한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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