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사람들이쳐다보았고 학교에서 잔인한 말들을 들었다. 그때마다 울었다. 뚱뚱한 여자아이에게 친절한 나라는 별로 없지만 한국은 그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곳이 아닐까. 
- P148

영린이 몇년 동안 찾아낸 설명은 새엄마가 비극을 처리하는 하수처리장 같은 걸 잘 갖춘 사람이라 순식간에 약을 풀고 필터를 돌려 비극을 비극 아닌 것으로 처리해낸다는 것이었다. 
- P149

"있잖아. 마음에 갈증 같은 게 있는 사람은 힘들다?"
엉린과 함께 산 지 얼마 안 되어 새엄마가 말렸었다.
"네?"
"그런 사람은 항상 져. 내가 보기엔 네가 힘든 게 몸무게 때문도 아냐. 마음 때문이야."
그걸 지적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둔하다 둔한 아빠가 똑똑한 아줌마와 결혼했구나. 영란은 약간 울면서 감탄했다. 갈증, 허기, 구멍은 모두 같은 걸 가리켰다. 영린의 안쪽에 있는 그 비어 있는 곳.
- P149

어째서 고르는 족족, 혹은 영린에게 먼저 다가오는 족족 좋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영린은 스스로의 형편없음이 다른 사람의 형편없음을 끌어당기기도 하고 증폭시키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 짧거나 긴 연애가 끝날 때마다 생활이 무너졌다.
- P151

 낫지 않는 병을 앓고 사는 사람들은 병과 친밀해져서 친구가 되고, 병과 싸우지 않고 끌어안은 채 산다고들 하던데 희락은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다. 도저히 친해질 수가 없다. 
- P159

서른은 사실 기꺼이 맞았다.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20대가 너무 힘들어서 서른은 좋았다. 마흔은, 마흔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삶이 지나치게 고정되었다는 느낌.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게 조작된 주사위를 매일 던지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게 있다. 아직 중년처럼 보이진 않지만 중년인 것이다. 
- P159

쭈뼛쭈뼛 갔더니 세곡 남았다고 들어오라는 거야. 편하게 앉아서 들으래. 거기 맨 뒷자리에서 듣다가 울어버렸네. 음악이 좋아서 울었는지 친절이 고마워서 울었는지 모르겠어. 
- P163

"다른 걸 하며 살았으면 더 재밌었을까요? 젊은 시절 파스퇴르에 대해 읽었는데 그게 그렇게 인상적이었단 말이죠. 특히 미친개에 물린 소년 조제프를 두고 파스퇴르가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동물에게만 써봤던 광견병 백신을 쓰는 장면이 좋았어요. 그 조제프 마이스터는 훗날 파스퇴르 연구소의 관리인이 되지요. 1940년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에도 거기 있었는데, 독일군 장교가 파스퇴르의 유골을 보겠다고 지하 묘지 문을 열라고 하자 거부하며 자살해요. 나는 꼭 행운으로 살아난 그 소년 조제프, 파스퇴르의 묘지를 지키던 중년 조제프 같은 기분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
- P164

가게는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모두가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는 마법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들이었다. 희락은 음악과 음악 사이의 대화들을 자주 복기해보았다.
- P165

결혼은 그 나름대로의 노력이 계속 들어가지만, 매일 안도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음을 다 맡길 수 있는 사람과 더이상 얕은 계산 없이 팀을 이루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 P203

통근시간이 길수록 삶의 질은 뚝 떨어진다. 
- P206

그 짧은 침묵은 거짓말에 가까웠다. 최종 판단은 당신에게. 성인과 성인의 거래는 원래 그런 것이다.
- P210

"왓, 고양이다."
"예쁘네. 노랗고 예쁘네."
"언젠가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
"네가 내 고양이야."
- P215

정빈은 다운이 고마웠지만 그들이 어른이 되기 전에 아빠가 나았으면 싶었고, 사실은 낫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척을 해야 할지 항상 헷갈렸다. 아빠가 다친 이후로는 언제나 그랬다.
- P218

"어떤 사람이었어요?"
"좋은 사람, 늘 기분 좋게 건조한 사람."
"그건 너무 단순한 설명인데요."
"그런데 잘 없어요.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기준을 각자 세우게 되잖아요? 제 기준은 단순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마음의 마개가 잘 닫혀 있느냐 덜컥거리며 쏟아지느냐. 상대방을 고려 않고 감정을 폭주시키는 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많아요.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 드물고 귀해요."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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