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오순도순했던 외갓집 풍경도 아버지의 패악이 굳어지면서 점점 뜸하게 연출되었다. 가족 중 누구 하나의 불행이 너무 깊어 버리면 어떤 행복도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법이었다.
어머니도 점차 외갓집 발길을 끊었다.
- P121

길의 끝에 서 있는 진모를 향해 마주 걸어가면서 나는 콧날이 찡해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낯선 곳에서 낯설게 만나는 혈육은 언제라도 늘 안쓰럽게 보이는 법이었다.
- P123

처음 들어올 때부터 당장 눈에 거슬려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어머니의 머리 스타일이었다. 어머니의 머리에서는 아직도 심하게 퍼머약 냄새가 나고 있었다. 게다가 앞도 뒤도 없이 무작정튼튼하게 웨이브만 살려 놓은 촌스러움이란 차마 바로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차라리 적당히 풀어져서 어수선하기만 했던 아침의 머리 모양대로 있어 줬다면 내 마음이 이토록이나 참혹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 P126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미소짓는 주혁의 얼굴에서 이모부의 얼글을 읽어 냈다. 지난 4월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내게 지어 보였던 이모부의 의례적인 미소가 거기 있었다. 아니, 불발이나 연착따윈 죽어도 용납하지 않는, 그래서 인생을 심심하게 만드는 이모부의 얼굴이 아들인 주혁에게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랬다. 주리와 주혁이는 이모의 자식이기도 했지만 역시 엄연한 이모부의 자식들이었다. 나와 진모가 어머니의 자식이면서 아버지의 삶으로 많은 부분 규정지어진 것처럼.
- P133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끓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 P139

어차피 모든 것이 장난 같은 일이었다. 장난으로 시작했던 일이 장난으로 끝나지 않으면 얼마나 무렴한가 말이다.
그럴 때 마주치는 진실의 얼굴은 얼마나 낯선가 말이다. 나는 끝까지 진모의 장난을 지원할 생각이었다. 그 애가 이 삶에 대해 무렴해하지 않도록.
- P141

 어머니는 피해자를 만나 합의를 하고 진모에게 뒤집어씌워진 어마어마한 죄목들을 물렁물렁한 죄목으로 바꾸는 일부터 착수를 했다.
그런 일이라면 어머니는 이골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이어서 진모가 어머니를 단련시켰다. 
- P143

김장우는 자수성가한 형의 사업이 기로에 서 있는 것 때문에 나보다 더 우울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우울이 형에게서 비롯되고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에게 진모의 일 같은 것은 터럭만큼도 내비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매랑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 P144

진모의 행동을 꾸짖는 천사의 얼굴은 엄격했다. 그건 옳은 말이었다. 졸개들과 더불어 연적의 뒤통수를 몽둥이로 갈겨 내는짓 따위는 해서는 안 될 일임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나라면 주리처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P158

주라는 내 아버지를 킹콩으로 비유했던 그 어린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더 성장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주리를 그만 이해하기로 했다. 탐험해 봐야 할 수많은 인생의 비밀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주리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재미있는 인생의 비밀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말이다.
그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이제 내 이종 사촌들에 대해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나와 그들 사이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다는 것을. 그러나 그 많은 시간들이 우리들 사이의 소통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나는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었다.
- P163

"진진아......"
"진진아, 미안해. 너보다 우리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너한테정말 미안해………."
참말이지, 이모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모는 전화선 저쪽에서몰랐을 것이었다. 이모의 마지막 말 때문에 내가 그 순간 왈칵 울어 버렸다는 것을. 나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서 얼른 전화를 끊었다. 벌써 가득 고여 흐르고 있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나는 창 밖을 보았다. 거기, 가을을 건너가고 있는 높고 푸른 하늘이 무심하게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 P164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 P171

인생의 부피를늘려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 준 주리였다.
- P210

어쩌면 나는 이모의 넘쳐 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 P213

나도 세월을 따라 살아갔다. 살아봐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사소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 P268

아버지 시중 때문에 결국 어머니는 가게에 점원 한 사람을 두었다. 얼마 되지 않는 수입에서 점원 월급까지 나가고 보니 그것 또한 어머니의 나날을 긴장으로 채워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더욱 바빠졌고 나날이 생기를 더해갔다. 아, 어머니의 불행하고도 행복한 삶・・‥‥…….
- P270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 주었다. 이모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나는 김장우의 손을 잡아야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모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김장우의 손을 놓아버리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여졌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 P272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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