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시골 태생이긴 하지만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자신은 노동과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노동은혁명보다 고통스러웠다. 
- P67

오크향은 달콤했고 목 넘김은 황홀했다. 마셔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원히 술과 맞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을것이다. 한계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는 해방 전후의 한계와 여전히 맞서 싸우는 중이었고, 그사이 세상은 훌쩍 그한계를 뛰어넘었다.
- P70

큰집 마당에 홀로 서서 나는 예감했다. 오빠와 나의 시간들이 끝났다는 것을.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미안하고 무참했다. 나는 조심스레 내 발자국을 그대로밟으며 큰집을 나왔다. 순백의 마당에 더는 무슨 자국이라도 남기면 안 될 것 같았다.
- P80

자기 상태가 괜찮다는 것인지, 죽음이란 것도 괜찮다는것인지, 살아남은 자들은 그래도 살아질 테니 괜찮다는것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불현듯 눈물이 솟구쳤다. 그 눈물의 의미도 나는 알 수 없었다. 
- P85

오빠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 P85

나는 아버지와 달리 오죽해서 아버지를 찾는 마음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굳이 뭘 바라고 도운 것은 아니나 잊어버린 그마음이 서운해서 도움 준 사람들은 상처를 받는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 P102

"민족이고 사상이고, 인심만 안 잃으면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자신도 고씨처럼 인심을 잃지 않았으니 빨갱이라도 고향서 살 수 있다는 의미인 듯했다. 
- P134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내가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말했다.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하고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는 것이다.  - P138

"우리 아버지를 알아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데요?"
흔하디흔한 삼선 슬리퍼를 시멘트 바닥에 문지르며 아이가 머뭇거렸다.
·담배 친군디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든 넘은 아버지의담배 친구라니.
- P139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게 아버지식의 위로였다. 그 위로가 때로는 누군가에게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잘 먹혔다.
- P141

친구를 볼 때마다 손가락 때문에 조심스러웠던 나는아버지 말에 밥을 먹다 말고 사레가 들렸다. 친구는 느닷없이 박장대소했다. 나중에 그 친구가 그랬다.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한 게 우리 아버지가 처음이라고. 어쩐지 아버지 말에 지금까지의 모든설움이 씻겨 내리는 것 같았다고.
- P141

몸을 일으킨 여자가 바람 없는 날 떨어지는 벚꽃잎처럼 고요히 다가왔다. 그러고는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부지를 빼박았다...……."
아버지 닮은 아이라도 낳고 싶었는지 여자는 아버지를보듯 나를 보았다. 깊고 그윽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서글프게.
- P162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기이하고 오랜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감옥일지도 모른다.
- P163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옛 처제가 막 나간 문으로 이번에는 어머니의 옛 시동생이 아내는 물론 아이들 셋을 데리고 나타났다. 속 모르는 사람이 보고 개판이라고 욕을해도 할 말이 없을 집안사였다.
- P165

‘아이고, 먼 놈의 남자가 형광등 한나도 못 갈아 낀대?
윤재는 그 옛날에도 혼차서 뚝딱 해치우등만, 멋 하나 윤재보담 낫을 것이 읎당게. 인물이 낫기를 해, 다정하기를해. 아이, 니가 전등 쪼까 비춰봐라."
"윤재가 누군데?"
- P166

 만담을 주고받듯 창호지 바른 방문을사이에 두고 콩닥콩닥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전남편말하는 어머니에게서도 아내의 전남편 칭찬 듣는 아버지에게서도 분노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집은 그런 집이었다. 걸핏하면 어머니는 우리 윤재, 했고, 아버지는 윤재가 우리 윤재먼 나는 넘의 상욱이나, 농담으로 받아쳤다. 나는 그런 말을 꺼내는 어머니도,
화를 내지 않는 아버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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