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술 취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사람들이 와서 아빠를 말리자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삼촌은 그런 아빠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미소 지었다. 그런 그가 글을 쓰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이 나는 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단 한 번이라도 공감해보기는 했을까. - P275
"하나하나 맞서면서 살 수는 없어, 지연아. 그냥 피하면 돼. 그게지혜로운 거야." "난 다 피했어, 엄마. 그래서 이렇게 됐잖아. 내가 무슨 기분인지도모르게 됐어.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가슴은 텅 비어서 아무 느낌도없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피하는 게 너를 보호하는 길이라는 말이야." "날 때리는데 가만히 맞고 있는 게 날 보호하는 거야?"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끝내면 되는 거야." "내가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 그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 엄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P278
공공장소에서 남편이나 자식에게 화를 내는 여자들, 버스에서 홀쩍이며 눈물을 흘리는 여자들, 길에서 전화 통화를 하며 분노를 쏟아내는 여자들을 엄마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런 상스럽고 저급한 짓을 하는 건 자기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도 했다. 그런 엄마가 본인이 평생을 피해가고자 했던 모습을 내게 보여주었다. 엄마의 지적이 마음에 내리꽂히는 것과는 별개로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신의 분노를 발산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는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 P283
새비 아주머니는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불위에 누워서 증조모가 말을 하면 눈짓으로 반응했다. 새비 아주머니의 시선은 증조모의 몸을 지나서, 마음을 지나서, 어쩌면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에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아직다섯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증조모는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멩이를 안고서 내 동무야, 내 동무야, 말을 걸고 있다. 그런 작은 따뜻함이라도 간절해서, 하지만 사람은 너무 무서워서. 증조모는 마당 구석에쪼그려앉아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있다. 그때 자신이 누구를 부르는지도 모르고 간절히 부르던 사람이 바로 새비 아주머니였다는 사실을 증조모는 그녀의 시선 속에서 이해했다. - P288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 P300
"감사해요, 할머니." "축하해! 좋은 일이 생길 줄 알았다." "놀러올게요." "그래. 언제든 돌아와도 돼." 창밖으로 동이 트기 시작했고,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밀려드는 잠에 몸을 맡겼다. 나는 희령을 떠나고 할머니를 떠난다...…힘들게 버티던 곳이었는데도, 언제든 떠나기만을 바라던 곳이었는데도나는 할머니보다 이 헤어짐을 더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 P321
한 사람의 삶을 한계 없이 담을 수 있는 레코드를 만들면 어떨까.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릴 때의 옹알이 소리, 유치의 감촉, 처음 느낀분노,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과 꿈과 악몽, 사랑, 나이듦과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 모든 것을 담은 레코드가 있다면 어떨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삶의 모든 순간을 오감을 다 동원해 기록할 수 있고 무수한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레코드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삶의 크기와 같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 P337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나는 나를 너무 쉽게 버렸지만 내게서 버려진 나는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만난다. 그애들의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시 혼자 학교에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래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 P337
나는 오랜만에 할머니 집 소파에 앉아서 집을 둘러봤다. 텔레비전장식장 위에 처음 보는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가까이로 가서 액자를 들여다봤다. 액자 속에는 거북이 해변에서 나와 언니, 할머니와 증조할머니가 손을 잡고 서 있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 나는 싱크대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에게 액자를 들어 보였다. 할머니는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안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고개를 끄덕였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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