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다시 말을 하려다가 입을 열지않았다. 얼굴에 내내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냥……"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바라봤다. "보고 싶지." 할머니는 내가 마치 할머니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다 입가에 힘을 줘서 웃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지 뭐." - P51
- 같이 가자. 고조모가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도 데리고 가라. 병자에게 무슨 힘이 있었는지, 증조모는 치맛자락에서 고조모의손을 떼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겨우 손을 떼어내자 고조모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네 딸로 다시 태어나서 에미일 때 못다 해준 걸 마저 해줄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 P34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정말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려오고 마른 까치가 하늘을 날았다. 철길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그 순간이 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한 직감이었다. - P37
- 가고 말고는 너가 정하라우, 군인들이 널 데려가면 내 견딜 수없을 것 같아서 이러는 기야. 네 말이 맞다. 내 너를 몰라. 너도 내를모른다. 기래두 알 수 있는 기가 있잖아. 너가 이렇게 가버리면 내는불행해질 기야 되돌릴 수도 없이 고통스러워질 기야. 내를 믿지 않는것이 옳다. 내는 너가 지금처럼 사람들을 의심하며 살았시면 좋갔어. - P43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나이, 백정이라는 표식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증조모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 P47
시계를 보니 이미 늦은 밤이었다. 주무셔야 하는데 눈치도 없이 일아 있어서 죄송하다고 말하니 할머니는 할머니 집에서는 결코, 어떤경우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법이라고 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잘못이라고 말이다. 그 말을 하는 합머니는 이상하게도 섭섭해 보였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내가 죄송하다는 말로 예의를 차린 것이 할머니에게는 거리를 두는 것처럼여겨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50
그녀에게는 희망이라는 싹이 있었다. 그건 아무리 뽑아내도 잡초처럼 퍼져나가서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희망을 지배할 수 없었다. 희망이 끌고 가면 그곳이 가시덤불이라도 그저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말대로 그건 안전한 삶이 아니었다. 알지도 못하는남자를 따라 기차를 타고 개성으로 가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들의 경멸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체념하지 못하는 마음은 얼마나 질기고 얼마나 괴로운것이었을까. - P56
사람들은 원래 기래.‘ 고조모가 증조모의 마음속에서 말했다. ‘사람한테 기대하지 말라우.‘ ‘어마이, 나는 사람들한테 기대하는 기 아니라요.‘ 증조모는 생각했다. 나는 새비한테 기대하는 기야.‘ 언젠가부터 증조모는 마음속으로 고조모와 이야기를 했다. 혼자집에 있을 때는 소리 내어 고조모에게 말했다. 너무 외로워서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던 때였다. - P65
"오래된 편지들, 내가 받은 것도 있고 우리 엄마가 받은 것도 있고작은 집에 살면서도 엄마가 얼마나 편지들을 애지중지했는지 몰라. 신줏단지 모시듯이 정성껏 보관했는데, 엄마 가셨다고 그걸 폐기버리듯이 버릴 수가 없었어. 엄마가 받은 편지들을 읽으면 꼭 엄마가살아 계신 것 같구 그랬어. 그걸 어떻게 버려. 읽지 못하더라도 그갖고 있는 거지." - P72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는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 P82
그 껍데기들을 다 치우고 나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 깊이 잠든 남편 옆에서 소리 죽여 울던 내 모습이, 논문이 잘 써지지 않으면 내 존재가 모두 부정되는 것만 같아서 누구보다도 잔인하게 나를 다그치던 내 모습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숨쉬듯 나를 비난하고 비웃던 내 모습이. - P86
나는 아줌마에게 엄마의 계좌번호를 적어주면서도, 엄마가 친구를위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엄마처럼 차갑고 곁을내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않았기 때문이었다. - P87
할머니가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바깥에서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집에와서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울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뒤 집으로 가는 아이였다. 그 마음은무엇이었을까.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만은 아니었던것 같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방어할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하곤 하던 내 존재를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존심도 있었던것 같다. - P95
년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야. 어느 날 말을 이을 수 없어 눈물만흘리던 내게 지우가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널 더 많이 사람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어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있다는 것을 나는 지우를 보며 알았다. - P102
"아무한테나 그런 건 아니야." 네가 내 친구여서 고마워. 나는 그 말 한마디를 소리 내어 하지 못했다. 지우는 우리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 일찍 일어나 첫차를고 서울로 돌아갔다. - P106
"헤어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증조할머니랑 새비 아주머니가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서로를 모르는 채로 살았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가만히 차를 마셨다. 내가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끝이 슬프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구나." 할머니가 나를 보고 다정하게 미소 짓다가 입을 열었다. "새비 아주머니는 엄마의 상처였어. 그렇지만 자랑이기도 했지. 엄마를 크게 넘어뜨렸지만, 매번 털고 일어날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새비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가장 많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시비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그래. 그게 우리 엄마야." - P116
어쩌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갔어. 끝이 같으니까렇게 말하는 게 아직도 두렵지만서두, 희자 아바이가 어차피 가야 한다. 면……… 차라리 그 모습을 내가 보지 않고 헤어지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어쩌면… 회자 아바이를 생각하면 그게 나았을지도 몰라. 차라리순간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희자 아바이가 이렇게 아플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러면서도, 이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욕심이라고 욕해좋다. 희자 아바이 말고 내 위주로 생각한다고 욕해도 좋다. 그래두 눈희자 아바이가 살아 돌아오고, 그렇게 살아서 나랑 희자랑 같이 지냈던시간이 좋았더랬어. 회자 아바이가 히로시마에서 죽었다면 내가 무얼 빌었을까 생각보면 말이야…… 고저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십 분이라도 희자아바이를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안아보는 거, 내 기걸 원했을 것 같아. 돌아와 고작 몇 년 살아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낸다고, 마음만 더 아른거아니냐고 말하는 동무들도 있었지. 그런데 삼천아 봐봐라. 한 시간, 한순간에 비한다면 이 몇 년은 참으루 긴 시간 아니갔어. 나, 희자 아바이가 참 귀해. 기래, 얼마 있으면 희자 아바이가 가겠지. 내 기걸 생각하면제정신이 아니야. 그런데 난 이쪽이 더 좋다. 희자 아바이가 어떤 모습이어두 내 곁에 있잖아. - P120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희자 아바이가 말했어. 조선 사람이고 일본 사람이고 중국 사람이고 간에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고,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희자 아바이는 내 손을 붙잡고서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어. - P123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제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 P130
" (앞 생략)그런데 이번에 명희 언니 만나면서 잡고 싶어졌어." "뭘?" "인생을." 친구들과 1박 2일로도 여행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외국이라고는 부부 동반으로 일본에 가본 것이 전부인 사람이 인생을 잡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명희 언니가 그러는 거야. 우리 같이 우체국에서 일했을 때 내가그렇게 얘기했대. 세상을 구경해보고 싶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녀보고싶다고. 그러다 결혼했고, 그다음은 너도 잘 알잖아." - P133
엄마가 벤치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그렇게 말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엄마의 마음을 짐작하려고했다. 엄마는 별다른 감정 없이 나지막하게 이야기했지만 화가단)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 지쳐 보이했다. 엄마는 나를 등지고서 정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나도 없곁에서 나란히 걸었다. - P134
나는 희자가 높은 하늘에 연을 띄우듯이, 기억이라는 바람으로 일고 싶지 않은 순간을 마음에 띄워 올리곤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바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으고 짐작하면서.
- P152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나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당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P156
팀장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린 팀장의 얼굴을 상상해봤다. 예의바르고 말을 가려 하고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잘 얘기하지 않는 그녀가 내게 틈을 보인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이 위안이 되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잠자리에 누워서야 어쩌면 그것이 그녀 방식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59
"너 요즘 괜찮냐." "네." 할머니를 속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거짓말을 했다. "괜찮아 보이지 않아서 하는 말이야." ‘괜찮아요." 내 목소리가 내 귀에도 조금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할머니는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160
나는 목에 두른 목도리가 다 젖도록 소리 없이 울었다. 그후로 누구도 다시는 봄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봄이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그냥 개일 뿐이야.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그런 거짓말로스스로를 위로할 수는 없었다. - P162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 P167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한글과 숫자를 배웠고 시계를 읽는 법을 배웠고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거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웠다. 나는 엄마에게 죽은 언니와 놀았다고 말하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고, 문제가 없다고, 나는 언제나 잘 웃는 아이였고, 자라서는 잘 웃는어른이 됐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P171
앞에서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뒤에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 악의 없는 웃음을 보이면서 다른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흔하고 흔했다. 그런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성질인지도 몰랐다. 그런의미에서 명숙 할머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고양이 같았다. 움직이는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걷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그랬다. 고양이 중에서도 결코 인간의 무릎에 앉지 않고, 인간에게 치대지 않는 고양이라고 해야 할까. 늘 인간에게서 등을 돌러 앉고, 인간이 자신을 보지 않을 때는 멀리서 바라보다가도 눈길을주면 외면하는 척하는 고양이, 명숙 할머니는 그런 고양이를 닮아 있었다. 능숙하게 페달을 밟으며 재봉질을 하는 고양이라니. - P195
하지만 할머니는 그날 그 자리에서 불안을 느꼈다. 경계하지 않을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 그런 생각은 증조모로부터 온 것이기도 했다. - P199
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영옥아. 우린 다시 만난다이. 내 기걸 알갔어. 기래 생각하니 슬프지도 않누나. 결국은 다시 만날 테니 말이다. - P204
명숙 할머니가 보내오는 편지에도 할머니는 답을 하지 않았다. 관지에서 묻어 나오는 명숙 할머니의 애정이 할머니는 버거웠다. 명숙할머니의 편지를 읽다보면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으니까. 남선의 모진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 P220
"그림, 넌 내 손녀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을 거다." "어떻게 살았어요, 할머니? 그런 일을 겪고 어떻게 살 수 있었어요?" 나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날이 올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정말 그럴 거야." 할머니가 말했다. - P230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날 아침 의사가 내게 귀리의 죽음을 알렸을때 느낀 감정이 슬픔만은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나는 안도했다. 나의일부는 안도했다. 귀리의 고통이 이제 사라졌다는 사실에, 고통을 받는 그애의 모습을 보고 겪어야 했을 나의 괴로움이 끝났다는 사실에. 그 이기적인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 P233
- 새비야. . - 내레 아까워. -뭐가. -새비 너랑 있는 이 시간이 아깝다. 새비 아주머니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난 삼천이 너레 아깝다 아쉽다 생각하며 마음 아프기를 바라다않아. 그 말에 증조모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 P258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아빠와의 결혼으로 자신도 평범한 가족을 꾸리게 되어서 좋았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말을 습관적으로 하던 엄마를 예전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터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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