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로운 자연이 공포를 열어 보이는 순간, 그때까지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 이 모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온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 P75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 역시 하늘보다 인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건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학살하는 행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 P74
사랑은 지고의 율법이며, 이런 사랑은 연민이다. 쇼펜하우어가 거친 헤겔을 그토록 혐오했던 이유가 문득 이해되었다. - P76
하지만 어느 저녁, 집에 돌아왔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불을 켠 뒤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새벽까지 기다렸지만 헛일이었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 P83
빵을 성체처럼 쪼개고, 그런 다음에는 난로와 불꽃과 열기, 타닥타닥 타오르는 감미로운 불길을 보며 명상하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던 여자. 이 불의 노래는 그녀가 유년기부터 알아왔고 그녀의 종족을 신성한 유대감으로 묶어주던 것이었다. 그 빛은 사람들의 얼굴에 우수 어린 미소를 그려넣으며 모든 고통을 물리치는 것이었고, 그녀에게는 절대적인 행복의 그림자였다…… - P85
이틀 동안 내 지하실을 청소하며 생쥐들을 희생시킨 참이었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뚫린 구멍 속에 살며 그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추운 밤이면 내 품안에서 공처럼 옹크렸던 내 어린 집시 여자처럼 몸을 사린 생쥐들이다. 하늘은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 P86
그들의 그리스 휴가 계획은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헤르더와 헤겔의 책들은 나를 고대 그리스에 던져놓았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가르쳐주었건만 내가 막상 휴가를 떠나본 적은 없었다. 일을 따라잡느라 휴가는 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하루라도 결근을 하면 소장은 가차없이 추가로 이틀을 더 근무하게 했다. 어쩌다 하루 쉬는 날이 찾아와도 나는 수당을 받고 일하러 갔다. 일이 항시 밀려 있는데다, 내 역량을 넘어서는 종이 더미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까. 사르트르 양반과 카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십오 년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그러나 부브니의 사회주의 노동단원들은 일이 밀리는 법이 없었다. - P93
난 세네카요 소크라테스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압축통 벽에 눌려 내 다리와 턱이 들러붙고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이어진다 해도 결단코 두 손 놓고 천국에서 추방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자리를 바꾸게 할 수 없을 것이다. - P131
어린아이가 쓴 듯한 큼직한 글씨가 쓰여 있다. 일론카. 그렇다, 이젠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 P132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무엇보다 책을 고독의 피신처로 삼는 주인공 한타의 독백을 통한, 책에 바치는 오마주다. 화자인 한탸는 책이 있기에 살 수 있는 사람이며, 그가 혼자인 건 생각들로 가득한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 P138
그리고 무엇보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일깨워준다. 그처럼 이 작품에는 사랑하는 대상의 죽음(어머니, 외삼촌, 집시 여자 그리고 책.....)을 목격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 그려져 있다. 압축기 속에서 책이 압축되어 사라지듯 모든 것이 소멸하지만, 화자는 그 슬픔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직시한다. - P140
그렇더라도 이 작품을 규정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자유나 저항 같은 거창한 단어보다 ‘연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건왜일까? 도처에 허무가 널려 있어도 삶은 자체의 생명력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불가항력적이면서 매력적인 것임을 흐라발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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