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듀엣
김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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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계속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

『고스트 듀엣』이라는 책 제목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문구다. 고인을 깊이, 애틋하게 애도하며 그와 함께 부르는 듀엣이라니. 이를 알고 책 표지를 다시 보면 왠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다.

꽤 짧은 호흡의 단편 11개가 수록되어 있는 『고스트 듀엣』은 김현 시인의 첫 소설집이다.

「고스트 듀엣」

상민은 먼저 사고로 떠난 형우를 떠올린다. 형우라면, 형우라면,

형우는 상민에게 묻는다. 행복의 유령과 불행의 유령 중 어떤 유령을 맡겠냐고. 행복을 선택하는 상민에게 형우는 "행복과 행복이 늘 붙어 다닌다고 하면 덜 문학적 (p.77)"이라며 불행의 유령을 맡겠다 답한다. 상민은 묻는다. "그때 우리 둘 다 행복하기로 했다면, 우리가 덜 문학적인 고스트 듀엣이 되기로 했다면, (p78)" 그랬다면, 뒤의 삶을.

그런 상민에게 석찬은 말한다. "그냥 말하라고. 아무 때나, 어디서나. (p. 86)" 형우의 이름을 부르라고.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기에 서로의 이름을 자주 부른다. 마음이 여린 네 사람이 서로를 애써 지탱하는 형우의 이야기에 답하는 상민의 이야기인 셈이다. 말하자면 행복이 불행에게."

- p.88

「유미의 기분」

"여자는 꼬리가 아홉 개라서 꼬리를 잘 친다."라는 말을 농담으로 내뱉은 교사 형석의 이야기다. 형석의 발언에 얌전하고 조용하고 차분한 '여학생' 유미는 형석에게 그 말에 책임 질 수 있느냐 묻는다. 그래서 "형석은 기분이 나빴다."

애인 승우와 여행길에 오른 형석이 승우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겪은 혐오와 차별을 떠올린다. 이미 학교 사람들에게 '꼴페미', '메갈'이라며 야유를 받은 유미. 형석이 유미에게 사과를 건네기까지 형석의 내면에는 짙은 혼란이 인다.

꽤 익숙한 이야기다. 어쩌면 원하는 이야기다. 뻔한 혐오 발언에 유미처럼 날카롭게 대응하는 이야기. 뻔한 혐오 발언을 내뱉은 당사자가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반응에 기분 나빠하다 이내 ‘죄’를 깨닫고 사과하는 이야기.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뻔한 말’에 나만 아는 기분을 느껴왔나. 하나도 안 웃긴 말을 하며 당장이라도 감방에 넣고 싶게 만드는 행위를 하는 이들은 너무나도 교묘하고 약아서, 개인이 느끼는 불쾌함을 그저 개인의 것으로 만들기가 너무 쉽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막연하다가도, 또 생각해보면 그것은 분명히 개인의 것만은 아니기에. 결국 공감과 연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들과 단단히 뭉쳐지는 것. 그러다보면 그게 내 세상이 된다. 나의 세상.


"안 웃었다며. 안 웃기다고 했다며. 그게 죄야. 너만 웃은 거. 걔만 빼고 다 웃은 거."

- p. 108

"아, 이 편지는 나한테 사과하라는 거고, 내가 누군가에게 사과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거구나, 알겠더라고. 사과할 자격이 있는 사람, 그 말이 용기를 주더라고."

- p. 109

「견본 세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 너무 다른 두 사람, 영수와 승남은 함께 살 집을 보러간다.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럴 수 있는 공간을 찾았지만 서로가 원하는 공간은 다르다. 다를 수밖에. 물떼 낀 싱크대, 다 깨진 조명, 죽어 있는 벌레 떼, 벽지에 슨 곰팡이를 보고 한 쪽은 잘 치우면 함께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쪽은 아픈 발이 신경 쓰이고, 춥고, 술에 취해 참견하는 이웃(이 될지 모르는)에 신경질이 난다.

다름은 늘 왠지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 사랑하는 이와 나의 다름은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 다름을 내가 어찌할 수 없을 때는 그와의 관계가 전부 막연해진다.

승남과 영수를 보며 답답해졌다. 한 쪽 주머니에 같은 음료를 넣어 몸을 데우며 걷던 둘은 결국 서로에게 없어졌다. 그렇다면 그 이별은 서로가 어찌할 수 없는 다름 때문이냐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수도 없다. 어떤 관계는 그냥 그럴 수 밖에 없어서 끝나기도 하니 말이다.

김현 작가의 글이 좋았던 이유는 이야기의 마무리에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이별, 화해, 용서 같은 것에 유난이지 않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헤어지고 재회하고 멀어지고 가까워진다.

나는 누군가 아픈 과거를 이야기할 때 아주 덤덤할수록, 최대한 아무렇지 않을수록 슬프다. 덤덤하게,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그의 삶과 내면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그래서 뭐라 위로 따위도 공감 같은 어떤 말도 섣부르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때나. 어디서나.“

고스트 듀엣에서 상민은 석찬의 말을 따라 되뇐다.

애도에 ‘옳은’ 방향성을 묻는다면 석찬의 말을 인용할 수 있을 듯하다. 존재의 이름을 아무 때나 부르고, 존재와의 기억을 어디서나 꺼낼 수 있게 되는 것.

그렇게 우리는 멀리 가버렸다고 생각했던 존재와 입 맞춰 부르는 듀엣을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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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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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공사, 조리사, 로프공, 어부, 조산사, 마필관리사, 세신사, 수어통역사, 일러스트레이터 전시기획자, 배우, 식자공

 

세상엔 무수히 많은 직업이 있다. 직업이라고 명명되지 않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고유한 흔적을 갖고 살아간다. 작은 근육 하나, 습관 하나, 발걸음 하나, 어쩌면 그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그가 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으리라.

 

『베테랑의 몸』 그 흔적에 대한 이야기다. 연령, 성별, 분야에 상관없이 한자리에서 오랜 시간 일해 온 사람만의 태에 대해서.

 


저자는 열세 명의 베테랑을 인터뷰하며 그들이 일하는 자세, 태도로 얻은 시사점을 안내했다.

 

"지구 지표로부터 3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달까지 우주선을 보내는 시대에 왜 고작 땅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떨어져 죽는 일이 이토록 흔한지. 기술은 왜 특정한 곳에만 쓰이는지. 왜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는 일에 진심인 베테랑이 이를 악물고 지켜야 하는지."

 

소개된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경이로웠다. 그럼에도 유난히 인상 깊던 이야기를 꼽아보자면, 로프공 김영탁의 이야기였다. 옥상 위에 서서 구조물을 확인하는 모습, 매듭을 묶는 모습만 봐도 로프공으로 일한지 얼마나 되었는지 어림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선수들은 옥상에서 표정이 달라요." 그는 일할 때 자기 안전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얘기한다. 혼자 벽에 매달려 혼자 하는 일이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될지 모르겠다.

저자가 집중한 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일하다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일이라는 것. "자기 안전은 자기가"라는 표어가 당연한 일이라는 것. 매듭을 단단히 묶고 "이 줄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라는 자기 확신만이 작업할 때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전부라는 것.

결국 법과 제도의 문제다. 우리나라 법에는 로프공이 보호받을 수 있는 조항이 없다. 자격증도 없고, 안전 교육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지자면 로프공은 청소업자, 일용직, 자영업자일 뿐이다.

 

"늘 추락을 머리에 넣고 다니죠. 또 그렇지만 생각 안 해요. 안 죽을 거니까. 돈 벌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베테랑의 몸』으로 새롭게 알게 된 직업도 있다.

 

"여성이 임신 출산 과정에서 소외되는 것이 싫어 자연주의 출산 일을 시작한 그였지만, 자신도 매번 새롭게 깨닫는다. 기회는 주어진다면 여자들은 누구보다 자신의 몸을 잘 아는구나."

- p. 154 ~ 155

 

조산사는 무려 1914년에 법에 명시되었고, 현재는 조산사 면허 존폐 논란이 일고 있다. 2020년에는 조산사 면허 취득자가 10명 남짓인 수준으로 하락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는 출생률 저하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저자는 조산사의 역할이 비좁은 의료 현실을 짚는다.

 

조산사 김수진은 임산부에게 무통 주사를 놓지 않고 임산부의 피부를 만져준다. 마사지를 해주고 호흡법, 적절한 자세를 알려준다. 산고를 느끼는 임산부 옆에서 긴장하거나 힘든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곁을 지킨다.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세심하게 임산부와 아이를 살핀다. 몇 시간이 걸려도 같은 자세로, 같은 태도로 출산을 돕는다.

 

저자는 생명과 존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인간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찰나는 그가 살아갈 80년 남짓할 삶의 여정에 비하면 턱도 없이 짧다. 그 안에서 그를 위해 노력할 수많은 존재의 삶을 생각하면 조산사의 역할은 한없이 작아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만지는 조산사의 일이 얼마나 존중받아 마땅한 일인지, 왜 존중받아야 하는지 시사한다.

 

"태어나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사라지는 일도, 그리고 애도하는 일도 존중 속에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처음 닿은 손길이 누군가의 진정한 노동이라면, 존중받았다."

- p.157

 



 

"이렇게 효율적인 언어가 있다니. 돌이켜보니 나의 질문에는 음성 언어가 더 편리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 p,265

 

어릴 적 '수화'로 노래를 배운 기억이 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수화'가 얼마나 억지스러웠던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어린 내가 배웠던 건 수어통역사 장진석이 말하는 "한국어(청인들의 언어)에다 단어만 그대로 가져다 붙인" 수지 한국어였던 거다. 수어만의 문법이 아닌 청인들의 문법으로 만든 언어. 장진석은 이를 '콩글리시 수어'라고 부른다.

 

수어는 그저 손짓만이 아니다. 표정, 행동, 눈빛. 발화하려는 누군가의 모든 몸짓이 언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19가 확산되었을 때에도 수어 통역사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행사장에 선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미처 다 전달하기 어려운 음성도 있다. "예를 들어 '간장 공장 공장장은...' 이게 음성으로 들으면서 즐기는 건데. (p.264)"라고 말하는 장진석에게 저자는 묻는다.

 

"상대를 부를 때는 이름을 지문자로 쓰나요?"

"같이 있으면 이렇게 툭툭 치면 되는 걸요."

이렇게 효율적인 언어가 있다니.

- p.265

 

언젠가 비슷한 글을 본 적 있다. 비장애인의 편리함과 장애인의 편리함은 다르다고. 그리고 그 다름은 서로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일 뿐이라고.

저자는 편리와 효율의 기준에 대해 질문한다. 누가 정한 걸까. 농인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토록 효율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비농인이 너무도 답답할지 모른다. 장진석의 사부가 구락부로 그를 데려가서는 수어를 모르는 불쌍한 애라고 소개했다는 일화를 언급하며 장진석이 부럽다고 말한다.

"타인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이런 일이구나. 순간, 의심과 깨달음을 자신의 노동으로 겪어왔을 장진석이 부러웠다. (p.274)"

 


사회적 파이가 적은 분야, 두드러지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늘 소중하고 귀하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13 명의 '베테랑'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던 기록노동자 희정이 부러워지는 이유다.

만약 내가 이 책에 한 면을 장식할 수 있다면 인쇄소 노동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 최근에 인쇄소를 다녀와서 그들이 얼마나 '베테랑'인지, 능숙하게 일하는 기술자인지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일까. 한 명 한 명 인터뷰해서 잘 정돈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의 매력은 이 지점 아닐까. 주변에서 익숙하게 봐왔을, 그러나 어릴 적 한 번도 '장래희망'란에 적어본 적 없을지 모를 직업들에 시선을 잠시나마 두게 되는. 그들의 삶과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그들에게 일이 남긴 크고 작은 흔적을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이렇게 효율적인 언어가 있다니. 돌이켜보니 나의 질문에는 음성 언어가 더 편리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 P265

"태어나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사라지는 일도, 그리고 애도하는 일도 존중 속에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처음 닿은 손길이 누군가의 진정한 노동이라면, 존중받았다." - P157

"여성이 임신 출산 과정에서 소외되는 것이 싫어 자연주의 출산 일을 시작한 그였지만, 자신도 매번 새롭게 깨닫는다. 기회는 주어진다면 여자들은 누구보다 자신의 몸을 잘 아는구나." - P154

"지구 지표로부터 3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달까지 우주선을 보내는 시대에 왜 고작 땅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떨어져 죽는 일이 이토록 흔한지. 기술은 왜 특정한 곳에만 쓰이는지. 왜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는 일에 진심인 베테랑이 이를 악물고 지켜야 하는지." - P101

"늘 추락을 머리에 넣고 다니죠. 또 그렇지만 생각 안 해요. 안 죽을 거니까. 돈 벌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 P98

타인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이런 일이구나. 순간, 의심과 깨달음을 자신의 노동으로 겪어왔을 장진석이 부러웠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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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희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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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산에 덩그러니 놓인 "탱크"

그 안에서 이어지는 "자율적 기도 시스템"

김희재 작가의 <탱크>는 믿을 수 밖에 없어서 믿는 이들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믿음을 갖고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산을 넘어 "탱크"로 향한다. 어느 날, 탱크가 있는 산에 불이 났고 탱크마저 불에 타버린다. 그 날 그 안에서 꿈꾸던 미래가 비로소 '가능해지길' 기도하던 한 남자가 죽었다. 어두운 탱크 안에서 며 기도하던 남자는 결국 미래를 마주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한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키고, 다시 믿음을 행하기 위해 탱크를 새로 만들려 했다. 어떤 이들은 탱크로 향하는 사람들을 모두 사이비 종교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양우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둡둡도 이랬을까."라며 남자를 떠올리다, 비정상적인 일상을 살아가다, 어느 날 밖으로 나갈 수 있길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결국 양우가 바라는 미래, 둡둡이 존재하는 미래는 올 수 없겠지만. 그 죽음은 결코 양우를 지나가지 않겠지만 말이다.

남자가 탱크 안에서 안간힘 다 해 기도했던 미래는 결국 사랑이다. 모두가 모든 사랑을 상냥하게 받아들이는 미래. 남자는 그런 미래가 온다고 믿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믿어야 하기 때문에 믿으며 사는 삶이라, 더할 수 없이 서글프다.


이야기를 움직이는 인물이 많다. 도선과 양우, 둡둡, 부경과 하경, 그리고 규산까지. 인물들은 탱크를 중심으로 연결된다.

도선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1부부터 미래를 담은 4부까지 차근차근 쌓아가는 서사에 깊이 몰입해 책장을 넘겼다.

믿음에 대한 소설이라 소개되지만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 소개해도 좋을 것 같다. 사랑하는 존재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싶고, 그와 함께 살고 싶고, 얘기 나누고 싶던 인물들의 기도가 담긴 글로 읽혔다. 이들은 무언가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믿고, 기도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인간적 안간힘"을 다해 손을 모은 게 아닐까.

사랑에 대한 믿음만이 삶을 지속시키고, 사랑만이 견고한 세계를 조금 달라지게 만들 것이다. 사랑에 헌신하는 이런 이야기에 매혹당하지 않을 수 없다.

- 편혜영 소설가, 추천의 말 중


아무렇지 않게 살 수는 있었지만 진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도선은 쓰지 않는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다른 것에 열중하는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도선의 세계 바깥에 있었다. - P21

도선은 죽을 힘을 다했다. 제시간에 일어나는 것도, 제때 먹고 자는 것도 모두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서 도선은 종종 멍해졌고 외로워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까 싶었고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이렇게나 죽을 힘을 쓰는 사람은 세상에 자신 하나뿐인 것 같았다. - P23

그러나 사실 중의 사실, 할 수 있는 말 중에서도 해야 하는 말은 꼭 해야 했다. 도선은 말했다.

"탱크는 너무 어두워요."

반면 탱크 밖은 늘 밝았다. 이 극명한 빛의 격차는 누구에게나 평등했다. - P138

그럼에도 도선이 챙크에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는 탱크에 갈 때마다 어떻게든 꿈을 상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희망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 P139

결국 떠난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들을 통해서 기억되고 회자된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것은, 누군가와 어떤 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아니, 어쩌면 삶과 죽음을 통틀어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은 그뿐이다. - P162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지만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도 어떤 미래는 오고 그 미래의 모양은 매우 익숙해서 주인공은 그것이 누군가의 꿈이었고 바깥이었던 것을 알아차린다. - P195

탱크는 아무것도 아니다. 탱크가 특별해진 것은 탱크가 꼭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탱크는 없어져야 했다. - P237

그것은 무언가를 강하게 믿고 희망을 가질 때 따라오는 절망의 문제였고,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은 맞닥뜨리는 재해에 가까웠다고. 그러니 언젠가 당신에게도 재해가 온다면 당황하지 말라고. 대신 잠깐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그러면 한 번도 기다린 적 없던 미래가 평상을 기다린 모양을 하고 다가오는 날이 올 거라고.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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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필요한 시간 - 다시 시작하려는 이에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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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내게 '사이에 존재하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정여울, 7p



[문학이 필요한 시간]은 마치 여러 문학 작품 서평을 엮어 놓은 책 같았다.

정여울 작가는 작품 하나 하나를 섬세하게 소개하고, 그 안에서 발견한 문학의 의미를 정성껏 말한다.

그가 이토록 소중히 써내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문학의 힘을 절실히 믿는 듯하다.

그리고 누구든 그 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길 바라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문학은 "모든 존재의 '사이'에 존재"하도록 하고, "현실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통곡"을 가능케 하며

"잃어버린 것들을 애도"함으로써 "잃어버린 사랑과 사람과 세계를 되찾"게 해주는 무엇이다.

살면서 잊어버렸거나 느껴보지 못했던 "모든 감정의 극한"을 문학 속에서 우리는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로써 "실제 삶에서 더 아름다운 사랑"과 "눈부신 열정"과 "더 뜨거운 고통을 견뎌낼 힘을 얻을 수 있"다며 말이다.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정여울, 10p

그렇게 정여울 작가는 문학이 가진 힘을 차근차근 풀어내며 어떤 슬픔과 고통, 절망과 외로움, 심지어 기쁨과 희망 속에 있는 우리마저 따뜻하게 품어준다.



문학을 손에 쥘 때 우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책을 펼치고 인물의 여정을 함께하다 보면 인물의 감정을 느끼고 그의 사유를 따라가고, 그렇게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모든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얻는 감정적 충만함과 상상(혹은 공상)의 과정은 우리를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곤 한다.




우리가 미처 위로하지 못한 모든 슬픔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아무도 쓰다듬어 주지 못한 그 모든 상처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돌아옵니다.

[문학이 필요한 시간], 정여울, 291p



우리에게 도무지 가깝지 않던 크고 작은 목소리들이 문학으로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을 맞잡는 것만으로 우리는 현실의 절망을 극복하고, 상처를 회복하고, 나보다 조금 더 나다워질 수 있다.

"고통과 나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슬픔과 기쁨 사이, 현재와 과거 사이"에서 그동안 결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마주하고 싶을 때.

그때가 바로 [문학이 필요한 시간]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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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앤더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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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eander.

맹독성 식물이다.

아름답지만 독이 있는 식물.

오랜 가뭄으로 흙먼지만 날리는 곳에서도

보란듯이 꽃을 피운다.

올리앤더, 서수진

[올리앤더]는 자기 이야기가 없는 세 아이의 이야기다.

어른들에게 떠밀려 살아가는, 방황이 허락되지 않은 아이들.

열일곱 살 해솔과 클로이와 엘리는 이미 정해져 있는 다음 관문으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해야만 한다.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게 준비의 전부다.

포기하거나 헤메선 안 되는 세 아이는 어쩌면 처음부터 길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왜 공부하는지, 왜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지, 왜 호주에 살게 된건지.

무엇도 또렷하지 않은 상태로 희미한 목표를 위해 살아간다.

자신을 정의하는 걸 가장 힘겨워 하면서.

그렇게 가장 아름답지만 무엇도 투명하지 않아 유독한 열일곱 살,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 세 아이는 서로를 경계할 수밖에 없다.

자유로울 수 없고, 위태롭기만 한 이들에게 연대나 믿음, 희망 같은 건 닿을 수 없는 가치인 거다.

잠시 손을 잡아도 종국에는 서로를 등돌리게 만드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거다.

세 아이는 허락되지 않은 방황 속에서도 마침내 스스로를 찾아내리라.

자신을 홀로 가둬둔 것을 스스로 부신 엘리도,

손에 들린 구슬 목걸이를 끊어버리고 더 멀리 가고 싶다던 해솔도,

여전히 뭔갈 잃어버린 듯 헤메는 클로이도,

언젠간 노아처럼 스스로를 도울 방법을 발견해낼 것이라 믿는다.

올리앤더, 서수진, p.250

나는 나만의 구슬 목걸이를 어떻게 꿰어가고 있나.

내가 좋아하는 색깔의 구슬로, 내가 고른 실에 꿰고 있는가.

맘 먹으면 주저없이 구슬 목걸이를 끊을 용기가 있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 속에 맴돌 수 밖에 없는 이 질문들이 삶의 주체도, 방향도 모두 잃어버린 이들에게 떠올랐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을 한 번도 가지 못 한, 더 먼 곳으로 데려가줬으면.

듣도 보도 못한 무한한 세계로 후회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다.

학부모 독자들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중고생 필수권장도서를 쓴다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 작가의 말

중고생 필독서가 아니라 전 연령 필독서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의견을 제기해보는 바이다..



뒷마당 구석 덩굴처럼 얽힌 올리앤더 나무에 진분홍색 꽃이 잔뜩 달려 있었다. 엄마는 올리앤더 꽃에 독소가 있다며 만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온 가족이 꺼리며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도 여름이면 끈질기게 꽃을 피웠다. 그 나무가 다였다. 작은 뒷마당에는 독이 있는 꽃을 피워내는 올리앤더 나무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 P23

해솔에게는 스토리가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자기 이야기가 없는 사람도 있잖아요."

(...)

"없는 데 이유가 어딨어요? 처음부터 없었어요. 전혀 없는 걸 만들어낼 수는 없잖아요." - P124


"죽으려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죽고 싶었던 적은 많지만." - P207

"(...) 요즘은 나를 먼저 돕고 싶어." - P138

"원래 신은 그렇게 탄생하는 거야. 버려지면서. 버려진 아이는 모든 걸 할 수 있게 되잖아. 온갖 제약이 사라지면서. 그렇게 신이 되지." - P212

언제까지라도 계속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같이 울 수도 있을 것 같고, 왜 울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시간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다. 둘은 신이니까. 해솔과 클로이는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시간 위에서 서있었다. 버림받고 나서 신이 되어 버린 둘은 그렇게 무한한 세계를 바라보며 킬킬거리고 웃었다. - P214

그때 해솔의 머릿속에서 구슬 목걸이가 끊어졌다. (...) 어떤 구슬도 아쉽지 않았다. 해솔은 자신이 구슬 목걸이를 직접 끊어버렸다는 걸 알았고, 그게 중요했다.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서사였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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