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의 몸 - 일의 흔적까지 자신이 된 이들에 대하여
희정 글, 최형락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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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공사, 조리사, 로프공, 어부, 조산사, 마필관리사, 세신사, 수어통역사, 일러스트레이터 전시기획자, 배우, 식자공

 

세상엔 무수히 많은 직업이 있다. 직업이라고 명명되지 않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고유한 흔적을 갖고 살아간다. 작은 근육 하나, 습관 하나, 발걸음 하나, 어쩌면 그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그가 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으리라.

 

『베테랑의 몸』 그 흔적에 대한 이야기다. 연령, 성별, 분야에 상관없이 한자리에서 오랜 시간 일해 온 사람만의 태에 대해서.

 


저자는 열세 명의 베테랑을 인터뷰하며 그들이 일하는 자세, 태도로 얻은 시사점을 안내했다.

 

"지구 지표로부터 3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달까지 우주선을 보내는 시대에 왜 고작 땅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떨어져 죽는 일이 이토록 흔한지. 기술은 왜 특정한 곳에만 쓰이는지. 왜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는 일에 진심인 베테랑이 이를 악물고 지켜야 하는지."

 

소개된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경이로웠다. 그럼에도 유난히 인상 깊던 이야기를 꼽아보자면, 로프공 김영탁의 이야기였다. 옥상 위에 서서 구조물을 확인하는 모습, 매듭을 묶는 모습만 봐도 로프공으로 일한지 얼마나 되었는지 어림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선수들은 옥상에서 표정이 달라요." 그는 일할 때 자기 안전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얘기한다. 혼자 벽에 매달려 혼자 하는 일이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될지 모르겠다.

저자가 집중한 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일하다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일이라는 것. "자기 안전은 자기가"라는 표어가 당연한 일이라는 것. 매듭을 단단히 묶고 "이 줄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라는 자기 확신만이 작업할 때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전부라는 것.

결국 법과 제도의 문제다. 우리나라 법에는 로프공이 보호받을 수 있는 조항이 없다. 자격증도 없고, 안전 교육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지자면 로프공은 청소업자, 일용직, 자영업자일 뿐이다.

 

"늘 추락을 머리에 넣고 다니죠. 또 그렇지만 생각 안 해요. 안 죽을 거니까. 돈 벌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베테랑의 몸』으로 새롭게 알게 된 직업도 있다.

 

"여성이 임신 출산 과정에서 소외되는 것이 싫어 자연주의 출산 일을 시작한 그였지만, 자신도 매번 새롭게 깨닫는다. 기회는 주어진다면 여자들은 누구보다 자신의 몸을 잘 아는구나."

- p. 154 ~ 155

 

조산사는 무려 1914년에 법에 명시되었고, 현재는 조산사 면허 존폐 논란이 일고 있다. 2020년에는 조산사 면허 취득자가 10명 남짓인 수준으로 하락했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는 출생률 저하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저자는 조산사의 역할이 비좁은 의료 현실을 짚는다.

 

조산사 김수진은 임산부에게 무통 주사를 놓지 않고 임산부의 피부를 만져준다. 마사지를 해주고 호흡법, 적절한 자세를 알려준다. 산고를 느끼는 임산부 옆에서 긴장하거나 힘든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곁을 지킨다.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세심하게 임산부와 아이를 살핀다. 몇 시간이 걸려도 같은 자세로, 같은 태도로 출산을 돕는다.

 

저자는 생명과 존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인간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찰나는 그가 살아갈 80년 남짓할 삶의 여정에 비하면 턱도 없이 짧다. 그 안에서 그를 위해 노력할 수많은 존재의 삶을 생각하면 조산사의 역할은 한없이 작아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을 만지는 조산사의 일이 얼마나 존중받아 마땅한 일인지, 왜 존중받아야 하는지 시사한다.

 

"태어나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사라지는 일도, 그리고 애도하는 일도 존중 속에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처음 닿은 손길이 누군가의 진정한 노동이라면, 존중받았다."

- p.157

 



 

"이렇게 효율적인 언어가 있다니. 돌이켜보니 나의 질문에는 음성 언어가 더 편리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 p,265

 

어릴 적 '수화'로 노래를 배운 기억이 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수화'가 얼마나 억지스러웠던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어린 내가 배웠던 건 수어통역사 장진석이 말하는 "한국어(청인들의 언어)에다 단어만 그대로 가져다 붙인" 수지 한국어였던 거다. 수어만의 문법이 아닌 청인들의 문법으로 만든 언어. 장진석은 이를 '콩글리시 수어'라고 부른다.

 

수어는 그저 손짓만이 아니다. 표정, 행동, 눈빛. 발화하려는 누군가의 모든 몸짓이 언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코로나19가 확산되었을 때에도 수어 통역사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행사장에 선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미처 다 전달하기 어려운 음성도 있다. "예를 들어 '간장 공장 공장장은...' 이게 음성으로 들으면서 즐기는 건데. (p.264)"라고 말하는 장진석에게 저자는 묻는다.

 

"상대를 부를 때는 이름을 지문자로 쓰나요?"

"같이 있으면 이렇게 툭툭 치면 되는 걸요."

이렇게 효율적인 언어가 있다니.

- p.265

 

언젠가 비슷한 글을 본 적 있다. 비장애인의 편리함과 장애인의 편리함은 다르다고. 그리고 그 다름은 서로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일 뿐이라고.

저자는 편리와 효율의 기준에 대해 질문한다. 누가 정한 걸까. 농인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토록 효율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비농인이 너무도 답답할지 모른다. 장진석의 사부가 구락부로 그를 데려가서는 수어를 모르는 불쌍한 애라고 소개했다는 일화를 언급하며 장진석이 부럽다고 말한다.

"타인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이런 일이구나. 순간, 의심과 깨달음을 자신의 노동으로 겪어왔을 장진석이 부러웠다. (p.274)"

 


사회적 파이가 적은 분야, 두드러지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늘 소중하고 귀하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13 명의 '베테랑'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던 기록노동자 희정이 부러워지는 이유다.

만약 내가 이 책에 한 면을 장식할 수 있다면 인쇄소 노동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 최근에 인쇄소를 다녀와서 그들이 얼마나 '베테랑'인지, 능숙하게 일하는 기술자인지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일까. 한 명 한 명 인터뷰해서 잘 정돈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의 매력은 이 지점 아닐까. 주변에서 익숙하게 봐왔을, 그러나 어릴 적 한 번도 '장래희망'란에 적어본 적 없을지 모를 직업들에 시선을 잠시나마 두게 되는. 그들의 삶과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그들에게 일이 남긴 크고 작은 흔적을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이렇게 효율적인 언어가 있다니. 돌이켜보니 나의 질문에는 음성 언어가 더 편리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 P265

"태어나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사라지는 일도, 그리고 애도하는 일도 존중 속에 이뤄지길 바랄 뿐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처음 닿은 손길이 누군가의 진정한 노동이라면, 존중받았다." - P157

"여성이 임신 출산 과정에서 소외되는 것이 싫어 자연주의 출산 일을 시작한 그였지만, 자신도 매번 새롭게 깨닫는다. 기회는 주어진다면 여자들은 누구보다 자신의 몸을 잘 아는구나." - P154

"지구 지표로부터 3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달까지 우주선을 보내는 시대에 왜 고작 땅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떨어져 죽는 일이 이토록 흔한지. 기술은 왜 특정한 곳에만 쓰이는지. 왜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는 일에 진심인 베테랑이 이를 악물고 지켜야 하는지." - P101

"늘 추락을 머리에 넣고 다니죠. 또 그렇지만 생각 안 해요. 안 죽을 거니까. 돈 벌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 P98

타인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이런 일이구나. 순간, 의심과 깨달음을 자신의 노동으로 겪어왔을 장진석이 부러웠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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