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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 일기 쓰는 세 여자의 오늘을 자세히 사랑하는 법
천선란.윤혜은.윤소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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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셋이서 이렇게 웃기고 눈물 나는 대화를 나누고 있던 거지.


천선란은 천선란이고 윤혜은은 윤혜은이고 윤소진은 윤소진인데 이들의 대화에서 나는 나를 발견한다.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는 걸 어려워하는 것, 머리로 음악을 듣는 것도, 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것도. 세 작가의 동글동글하고 똑바른 말과 글에 편승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러하긴 하지만) 읽는 동안 너무 나 같고 우리 같아서 코 찡했다가 웃겼다가 엉망으로 열심히 읽었다.

천선란 작가님을 워낙 좋아하니 책을 펼칠 때는 자연히 천선란 작가님의 글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을 거라 짐작했는데 별안간 윤혜은 작가님의 글에 밑줄을 좍좍 긋는 나를 발견했고 ..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읽고 싶어졌달까 ..

일기. 일기는. 일기는 나에게 참 .. 어렵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을 적어내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너무 적나라한 감정을 적으면 누가 볼까 왠지 겁나고. 왜냐하면 어렸을 때는 정말 누가 '검사'를 했잖아. 그게 무슨 일기니 .. 어렸을 때는 정말 일기쓰는 게 너무나도 고역이라 그냥 그날 벌어진 일들을 나열했었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날은 그날 먹은 음식 중 제일 맛있었던 것을 자세히도 써내렸었다.

그런 내가 이 책을 덮을 때쯤 신년 다이어리를 하나 살까 고민하게 되었다면 .. 유난히 오늘을 기록하고 싶어질 때 펼쳐서 아무렇게나 쓰는 사람이라는 추구미가 생겼다면 .. 나만 피곤한 일이려나 ..


세 작가는 일기 안에서 자신을 알아가는 듯 보였다. 나는 그런 사람인 것 같고, 어떤 걸 좋아하고 또 꺼려하는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일기는 어떤 날의 나에 대해서 쓰는 것인가보다.


딱 이 셋만큼만 나를 알고 쓰고 얘기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드는 일이겠지.




좋아하는 게 많은 건 그저 내 안에 담아두고 쌓아두고 간직하면 되지만 표현하는 건 꺼내야 하니까. 꺼내어 주는 걸, 어릴 때부터 못했던 것 같다.

-p. 23

쉼 없이 운 덕분에 나는 숨죽여 우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이 바닥을 칠 때 나는 소리가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p. 26

나는 나로 사는 것이 너무 지겹다고 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그건 내가 아직 나에게 완전히 질려버리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p. 26

누군가한테 기대는 것도 방법으로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p. 78

인생은 광활하고 내게 남은 파편은 두 손바닥 안에 들어올 만큼 적어서, 어찌 보면 나는 엄마의 삶을 쓰고 있다. 소설을 쓰고, 시나리오를 쓰듯이. 근데 이렇게라도 해두지 않으면 본인마저 잊어버린 그 삶을 누가 보관해주지?

-p. 91-92

그래서일까, 누군가 나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면 화가 나기보단 선선히 인정하게 된다. 나도 아는 나를 너도 알게 되었구나, 싶은 마음.

-p. 114

관계가 깊어질수록 현명하게 이어가고 싶고 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

-p. 157

다른 사람의 눈에는 지루해 보일 수 있어도 모두가 애를 쓰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 누구도 호명하지 않았음에도 같은 자리에서 제 몫을 해내는 사람은 그 자체로 귀하다는 걸 빵을 기다리고, 책을 기다리며 알게 되었다.

-p. 171

어떤 음악은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치 머리로 듣는 것 같았으니까. 애꿎은 상념 대신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멜로디와 노랫말은 내가 처한 상황을 덜 자각하게 했다.

-p. 19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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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인간 선언 - 기후위기를 넘는 ‘새로운 우리’의 발명
김한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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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제의 인간이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탈인간중심주의‘를 말하는 김한민 작가의 칼럼집 『탈인간 선언』은 기후위기를 바라보는 냉소적 시선에 역으로 냉소를 보내는 책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정말 나와는 상관 없는 연예인의 신변잡기는 그토록 와닿고, 전 지구적 생태 위기는 전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그 피부가 문제다!

혹은

회복 불가능한 지구 가열을 막아낼 시간이 겨우 10년 남았다고 기후학자들이 경고한 게 벌써 몇년째인데도 와닿지 않는다고? 그럼 가닿으라!

저자에 의하면 “영향은 선택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이슈, 상황, 사람을 모두 선택하여 영향 받는다. 이 사회가 기후위기에 이리도 무심한 것 역시 우리가 직면한 수많은 위기를 선택적으로 대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기후학자, 환경운동가가 그리도 강조해온 기후위기가 ‘위기’로 와 닿지 않을 수밖에.

저자는 기후위기를 초래하는 자본주의와 ‘성장 카르텔’에 대해 언급하는데, ‘녹색 성장’에 한 번쯤 고개를 갸웃해본 적 있는 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만한 내용이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녹색 성장’이 아닌 탈성장!”

저자가 말하는 탈성장이란 “우리가 현재 가진 경제적 역량을 좀 더 필수적인 식량 주거 교통 교육 의료에 집중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것(120)”이다. 인간이 더 편하고 필요 이상으로 물질을 추구할수록 인간의 자리는 서서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제 인간에게 기후 위기는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와 닿지는 않는, 관심을 주다가도 눈에 확연히 띄지 않는 것이라서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기에 더 큰 발전과 성장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려고만 한다.


최근 한겨레에서 한국 청년 10명 중 6명은 기후 위기 실감으로 불안감을 느낀다는 설문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중요한 건 그런 불안감을 타인과 나누기 어려워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공론장 부재의 문제로 이어진다. 정치인들은 기후위기를 하나의 정치 사업 정도로 삼고, 기업인들은 '그린'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더 많은 소비와 생산을 부추기고 있고, 정말 진지하고 진심으로 기후 변화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김한민 작가의 『탈인간 선언』의 의미가 더욱 짙어진다. 육식주의, 불법 어획, 빛 공해를 넘어 성장지상주의, 자본주의까지. 저자는 우리를 '공멸'로 모는 것들에 대해 단호하게 의견을 피력한다. 더불어 불안감과 개인이 느끼는 불안감과 초조함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이 사회 분위기에 피로감까지 느끼는 이들에게 "쉬어도 된다."고 말한다. 당신이 쉬는 동안에도 행동할 누군가는 분명 존재한다며 읽는 이를 이완시킨다.

"『탈인간 선언』은 냉소를 냉소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음을 알려준다."

- 김선오 시인 추천사 중

비인간(동물, 자연)과 인간의 공생과 더 나은 인간의 삶을 향하는 길은 탈인간에 대한 냉소를 냉소할 수 있는 힘과 "환상하고 자빠지는(157)" 것이다. 탈성장을 말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고, 산업재해 사망 사고가 사라지고, 주거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이들이 어떤 이유에서건 차별받지 않고, 공장식 축산과 육식주의에서 벗어난 사회가 도래할지 모른다는 환상. 결국 이 세상이 '인간우월주의'에서 한 걸음이라도 멀어져 탈인간중심주의로 향해갈 것이라는 환상 말이다.


차라리 ”적응의 힘은 모방이 아니라 저항과 동화의 힘“이라고 말한 간디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나마 적응‘이라도’ 해볼 만한 지구는 적응에 최대한 저항해야 가능할 것이기

에.

-p. 40

우리가 치를 희생들에 관해 정직하게 소통하는 것, 이것이 빠진 기후에 관한 모든 얘기는 거짓말이다.

-p. 45

“물 들어오면 노를 잠시 놓으라. 그리고 물길을 읽으라. 이 물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p. 106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자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이 단지 소수의 자본가 몇몇을 제거해서 될 일이 아니며, 인간의 이타심을 필요로 하지만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연대를 요구하는 것, (…)

-p. 111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가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존재”라고 했다는데, 모든 것에 익숙해진다고 인간이 되는 걸까?

-p. 149

그런 존재하지 않는 이상을 추구하는 대신, 우리 모두 교차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p. 156

영향은 선택이다.

-p. 165

그렇게 자기 세계를 확장시켜 나아가면 서로 다른 운동들이 만나며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 아직 당신만큼 노력하지 않은 우리가, 당신이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조금씩 짐을 나눠 들면 됩니다.

-p.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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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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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 가족이 이렇게 제각각인데. 대통령은 어떻게 하나. 나라를 가지런히 운영하는 건 당최 불가능한 거지.“

-p. 24


세상은 너무 복잡하다. 세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사회는 너무 많이 복잡하다.

한 인간이 겪는 사회 중 가장 작은 사회인 가족이라고 다를까.


​전직 대학교수이자 꼰대가 다 돼(?) 답답한 아들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영한

전직 기자로 워커홀릭의 삶을 살았고 그래서 자녀들에게 엉망이었던 엄마라며 자책하는 정희

외국인 애인과 함께 살고 싶지만 계속해서 난간에 부딪히는 하민

음악을 한다며, 자신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아빠는 필요 없다며 집을 나간 동민


『그리고 봄』에 등장하는 네 명은 모두 다 제각각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사람들이다. 이들로 구성된 가족은 대통령 선거 이후 해체와 봉합의 과정을 겪는다.


이 이야기에 몰입하며 읽을 수 있던 이유는 이 가족이 겪는 일들이 특수한 경험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2022년과 2023년을 살면서 나는 가족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집단에서 끊임없이 정치로 이어지고 결렬되는 경험을 해왔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것들을 가운데 두고 의도치 않은 말과 의도적인 말을 섞어 비판하고 비통해했다.


이렇게 이분화된 채 벌어지는 ”싸움“이 싫다면 눈 가리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고, 눈 앞에 자신의 이익만을 보는 이들은 도저히 상종하기 싫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등지고자 했던 이들과 나는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 동시에 다른 시간을 살고 있다. 그렇기에 복잡하다.


​『그리고 봄』은 나와 다른, 복잡하고 다면적인 이 세상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누군가의 이야기다.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 각자의 세상이 어떻게 흔들리고 이내 단단해지는지. 한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든 개인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고, 어떻게 '우리 시대’의 미래를 만들어갈 방법에 대한 힌트를 던져준다.


소수자 혐오, 이태원 참사, 세월호 침몰 사고, 세대 갈등과 20대 대통령 선거 전후 정치적 갈등 상황 등. 우리가 지나온 현실을 담은 『그리고 봄』은 이 시대의 기록이자, 더 나은 내일, 조금 더 따뜻한 '봄’을 위한 온기 담긴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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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 일터의 죽음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법
신다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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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죽음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법.


'산재'를 다뤘다는 사실만으로 이 책을 꼭 읽고 싶었다. 노동을 하는 우리는 언제든, 누구든 산재 사고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받고 입증하기란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사회적으로 학습해왔다. 산재 사고 가해자(일반적으로 기업체) 피해자를 추궁하고 몰아 세우는 것은 기본이며, 산재 사망 사고 피해자 유가족은 아주 길고 잔인한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 사망 사고를 파헤치고, 산재가 발생하는 이유, 산재가 산재로 인정되기까지의 과정과 사회적 구조를 보여준다.

책 속에 소개된 사례는 대부분 우리가 가볍게라도 알고 있을 사고들이다. 대표적으로 2021년 평택항 부둣가에서 한 대학생이 컨테이너에 깔려 사망한 사건.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 사망 사건 ('구의역 김군 사건'), 평택 SPL(SPC계열사) 제빵공장 소스배합기 끼임 사망 사건.


저자는 이러한 산재가 일어나는 원인을 구조에서 찾아낸다. 그리고 산재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질문과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산재 사고 경위서는 일상에서 발생한 사건 사고에 쓰이는 말보다 훨씬 복잡하고, 전문가가 아니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단어로 구성된다. 이에 저자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의 산재 사고 서술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전문가 또는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산재 사망 사고 뉴스를 보는 누군가가 알 수 없는 단어의 나열에 '뒤로가기'를 누르지 않을 것이며, 쉽게 이해되는 이야기일 때 더 많은 이들이 사건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중요한 건 산재는 노동자의 책임이나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노동자가 원인이 될 수 없다. 안전에 관심없는 노동자는 없다. 안전에 불감한 노동자가 노동 현장에 있다면, 그가 왜 안전에 불감해졌는지 파악하고 안전에 민감해지도록 관리하고 유도해야 한다. 가령, 더운 여름철 안전모를 안 쓴 노동자가 있다면 왜 쓰지 않는 것인지 이유를 파악하고 안전모를 쓸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만약 더워서 쓰지 않는다면 바람이 통하는 안전모로 바꾼다거나, 얼음팩을 같이 제공한다거나 하는 등).


노동현장, 특히 공사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어가 있다. "안전에는 베테랑이 없다",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같이 노동자에게 안전을 강조하는 현수막은 너무도 익숙하다. 이런 문구들을 잘 뜯어보면 안전 사고의 책임을 모두 노동자에게 돌리는 듯하다. 안전에는 베테랑이 없으니 '노동자가' 주의해야 하고,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 '노동자가' 조심해야 하고. 어떤 현수막 속 표어에도 기업이나 안전 관리자, 기업 대표를 향해 안전에 더 신경쓰라는 말은 없다.


결국 대부분의 산재 사고는 '돈'과 관련된다. 기업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자는 기업이 원하는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적정량, 적정 수준 이상으로 노동을 하다 사고를 겪는다. 현실의 노동에 뛰어들지 않는 이들이 설정한 할당량과 성과치에 도달하기 위해 현실의 노동자들은 기계에 적정량 이상의 소스를 넣고 맨몸으로 기계를 작동시킨다. 2인 1조로 움직여야 하지만 인건비를 아끼려는 이들을 위해 혼자 스크린도어를 정비한다. 한 번도 일해본 적 없는 구역에 가서 그저 시키는 일을 하다 위험에 처한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어떤 일에 있어서든 사람을 먼저 보면 모든 게 달라지는 것 같다. 숫자나 이윤, 부가적인 가치보다 현장의 사람을 가장 먼저 봐야 한다. 일개

노동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누군가를 생각한다면 무모한 생산량이나 어떤 수치로 계산되는 이익같은 건 얼마든 뒤로 미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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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과 한국 - 랩 스타로 추앙하거나 힙찔이로 경멸하거나
김봉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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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하면 처음 생각나는 이미지

늘어진 바지와 큼지막한 티셔츠

살짝 더러워진 조던에 굵은 목걸이

금색 시계와 비싼 외제차, 명품


『힙합과 한국』의 표지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외제차 앞에 래퍼가 서 있는 사진이다. [랩 스타로 추앙하거나 힙찔이로 경멸하거나] 라는 카피 아래 놓인 사진은 힙합에 대한 흔한 편견 또는 시선에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너네가 생각하는 힙합이 무엇이냐고.

저자는 힙합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상승 에너지'를 꼽는다. 힙합은 어쨌든 상승을 지향하고 위로 올라가고자 한다고.

지금은 힙합 장르를 즐겨 듣지 않지만, 자주 들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저자의 말과 연결된다. 상승. 한창 힙합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상승을 원했다. 지금의 점수보다 더 높은 점수, 더 나은 등수로. 고등학교에서 원하는 대학교로. 지금 상황에서 더 나은 상황으로. 지금보다 더 괜찮은 지금으로.

힙합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인한 현재의 불안을 말한다. 혹은 과거의 나에서 '상승'하지 않고 머무를 수 밖에 없어 느끼는 불안을 이야기한다. 나에게 힙합은 위로보단 공감이었고, 그래서 찾게 되는 음악이었다. 힙합은 상처를 어루만져주기보단 자신의 상처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런 힙합을 지금은 잘 찾아듣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다.

일단 10대의 불안과 20대의 불안은 모양도, 색도, 무게도 너무나 다르다. 그때 들었던 노래 가사가 지금은 크게 와 닿지 않는 것처럼, 그때의 불안은 지금의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형태다. 지난 기억은 모두 미화된다고 하지 않는가. 한창 빠져 들었던 김하온, 빈첸, 이제 부를 수 없는 래퍼의 노래. 그때는 한창 힙합 장르를 내세웠던 아이돌의 싸이퍼, 믹스테잎까지. 그 노래들을 지금은 듣지 않는 건 지금의 내가 그들의 가사에 크게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듣는 힙합 노래가 있나, 또 생각해보면, 있다.

그 노래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차별과 혐오의 언어가 없다는 점이다. 발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래다. 같은 힙합 장르 중에서도 이런 노래를 선호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단호하게 힙합에서 디스 배틀하는 게 불편하다. 저자는 힙합에서 디스는 하나의 문화라고 얘기한다. "증오를 빼는 편"이라는 래퍼 김하온을 언급하며, 힙합에서 디스를 증오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짚는다.


그리고 힙합에서의 디스전을 스포츠에 비유하는데, 스포츠 선수가 상대팀에 친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경기에서 그의 공을 빼앗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듯 힙합에서도 친한 사람을 디스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힙합 디스전은 어떤가. 생각해보면 <쇼미더머니>나 <고등래퍼>, <언프리티랩스타>에 나오는 래퍼들이 서로의 외모, 성격, 그의 삶 자체를 깎아내리는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그 이후에 떠오르는 것은 디스전에서 랩을 저는 상대를 북돋는 모습, 또는 라임을 잘 살려 가사를 쓴 상대를 '리스펙'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상대편을 북돋든, 리스펙하든 디스의 소재는 같다. 상대의 실력보단 외모나 성격 등 실력 외의 것을 깎아내리기 위한 것.

이런 '싸움'이 힙합만의 문화로 자리잡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은 확실히 힙합에 대해 많은 질문을 남기는 책임이 확실하다.

나는 힙합을 무엇으로 받아들여왔나. 나는 힙합을 어떻게 듣고 있었나. 나는 래퍼들, 힙합 장르를 향유하는 이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었나.


한편, 힙합에 대해 200쪽이 넘는 긴 호흡으로 써내릴 수 있는 저자에게 '리스펙'을 보낸다. 이 책을 펼친 초반에는 특히 힙합에 대한 저자의 열정과 사랑이 가득 묻어 있어 '이렇게 힙합을 좋아한다고?'라는 생각에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라면 이렇게 얘기하고 싶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거다. 누가 책으로 써달라고 하면 진짜 이렇게 200, 300 페이지 넘도록 구구절절 써내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이만큼 힙합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힙합에 대해 더 잘 알려주고 싶어하는 이가 있구나. 대단하다.' 생각했다.

저자에게 힙합이 곧 정신과 의사였다는 것처럼 누구나 나만의 정신과 의사, 혹은 나를 치유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없어도 큰일은 아니다. 나는 자신을 치유하는 방법,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연과 필연이 겹쳐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일 테니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를 살리고 더 잘 살게 하는 무언가에 대해서, 그리고 힙합이라는 세상이 살고 있는 저자에 대해서 궁금해진다면 이 책을 펼쳐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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