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면하는 마음 - 나날이 바뀌는 플랫폼에 몸을 던져 분투하는 어느 예능PD의 생존기
권성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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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여년간 예능을 만들어온 권성민 PD는 예능을 장르의 여집합이라 표현한다. "공통점이라고는 '카메라 앞에 사람을 세워 찍은 다음 편집실에 와서 편집'"(p10)하는 것뿐이며, "확실히 드라마이거나 확실히 시사교양인 것들을 빼고 난 뒤에 남은 애매한 것들이 복닥거리는 곳, 정해진 모양이 없는 만큼 자유롭고, 좋은 뜻으로 제멋대로"인 분야가 바로 예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해외 시장에서는 '예능'이란 이름의 종합적인 장르 분류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scripted(대본이 있는)'의 반대 개념으로 'non-scripted(대본이 없는)'라는 분류 정도가 있"(p48)을 뿐이다. 그래서 예능엔 언제나 신선함이 필요하다. 예능은 통상 드라마나 다큐, 시사교양보다 시청자들에겐 더 친숙하고 가깝게 느껴지지지만, 반대로 드라마보다 완성도가 낮지 않느냐, 시사교양보다 유익함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 속에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누군가의 노동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2.

이 책에서 권성민PD는 창작자이기 이전에 방송국이라는 조직(혹은 기업)에 속한 노동자로써의 PD의 정체성을 고찰한다. 그에게 PD는  "관객들은 전혀 모를 텐데 감독 눈에만 보이는 사소한 오류조차 용납하지 않는" 거장이기만 해서는 안된다. 여러 사람의 노동과 커리어, 생계를 지고 있는 사람이니만큼 때로는 현실과 타협하며 최고(最高)만큼이나 의미있는 최선(最善)을 만들어야 한다. 빠르게 다른 컨텐츠로 대체 가능한 디지털과 달리 "채우기로 약속한 자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채워줘야 하는"(p53) 레거시 미디어의 환경 속에서는 작품성을 따지기 이전에 다른 이들과의 약속도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또한  "애매하고 폼 안 나는 일들이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해줘야 폼 나야 할 것들이 제대로 보"(p69)이듯, PD는 명확하게 규정되진 않아도 모든 일에 관여해야 하는 존재다. 그는 PD의 역할을 통해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역량만큼이나 그것을 운용하기 위한 노동의 중요성을 잊지 않는다. 또한 그는 창작노동자로써의 동종업계 종사자를 위한 사회적 책임 또한 놓치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좋은 작품을 발견하면 열심히 소문내고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직업 창작자들에게 최고의 인정은 결제, 그리고 정확한 언어로 보내는 칭찬"(pp.80-81)이라고 강조한다. 


#3.

레거시 미디어는 죽었다고 말하는 시대, 권PD는 "여전히 TV에 힘이 남아 있다"(p48)고 믿는 사람이다. 특히 그는 시청하는 뉴미디어가 갖지 못하는, "시청 인구 100만은 방송이 나가는 딱 한 시간 동안 100만 명이 동시에 TV 앞에 앉아 있"(p48)어야만 한다는 집중도에 주목한다. 그래서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더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소비자가 직접 선택하고 구매하는 책이나 영화"와 달리"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대중을 사로잡아야 하는 TV는 "불특정 다수의 눈길을 끌어야 하는"(p161) 운명에 처해있다. 여기서 그는 신선함만큼이나 중요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던, '아는 맛'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매일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는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p136)을 놓치지 않고 "내 예상이나 통제 바깥의 것에 매달리기보단, 내가 잘 아는 것에 집중하는"(p130) 마음. 사람들의 삶에 웃음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가, 익숙하지만 얼마나 더 확실한 즐거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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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PD는 이야기를 만들고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직업이다. 그런데 둘러보니, 꼭 그게 직업이 아니어도 세상에 자기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사람들이 참 많더라. 시장 좌판에서도 나물이며 과일 곁에 적혀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고, 가끔은 도로 위 자동차 뒤통수에서도 목소리를 만난다. 스마트폰 화면을 켜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예능을 만드는 본업에, 글을 써서 책도 내보니, 예능을 만드는 일은 담력이 필요하고 글 쓰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더라.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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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의 질문들 - 우주의 탄생과 진화에 관한 궁극의 물음 15
토니 로스먼 지음, 이강환 옮김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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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학책은 언제나 쉽지 않다. 배경지식이 부족한 탓일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책에 비해 쉽게 손이 가지 않고 읽는 데도 훨씬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다보니 과학분야 도서를 편식하게 된다. <빅뱅의 질문들> 역시 마냥 쉬운 책은 아니다. 대중서이기는 하지만, 우주과학에 대해 꽤나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만큼 이 책이 가진 내용을 따라가기란 쉽지 않다. <빅뱅의 질문들>이라는 제목과 달리 빅뱅에 대한 지식이 드라마틱하게 확장되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주를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마음에 한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는 점이다. "자연의 붉은 테이프를 잘라 관측되는 현상에 대한 가장 단순한 설명들을 만들어내는"(p115) 과학자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 거대한 우주의 탄생과 질서를 밝혀나가는 것일까. 이 책을 읽다보면 우주를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지성과 열정에 경의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2.

"이 책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주제를 다룬 작은 책이다"(p11)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 책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문장은 우리를 둘러싼 우주, 그리고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이 얼마나 거대한 존재일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그 어떤 학문적 탐구보다도 거대하며 오래된 '빅뱅'이라는 존재를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결연한 의지를 전해준다. 과거에는 신화와 철학의 영역이었던 우주론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그 규모 탓에 관측과 증명이 쉽지 않고, 우주과학에서는 관찰만큼이나 상상력의 중요성이 더욱 극대화된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적 관점에 익숙한 이들에겐 당연한 탐구의 과정일지 몰라도, "복잡한 방정식들로 가득 찬 어떤 이론이 뭔가를 의미해야만 한다"(p231)고 믿는 과학의 세계에서는 정체성과 연결되는 중대한 사안이다. 수많은 수식과 이론들을 통해 점점 진리와 가까워진다고 믿고 있으면서도, "수학적인 아름다움은 오랫동안 이론을 만들고 받아들이는 배경이 되는 강력한 힘이었지만 이런 모호한 성질에 기반한 제안들은 맞는 만큼이나 틀린 것으로 드러난 것도 많았"(p223)기에,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여정은 성취와 좌절의 연속이었으리라. "완벽한 사실은 아님에도 아주 성공적인 것으로 밝혀"(p232)질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학자들의 지적탐구와 상상력, 그로부터 비롯한 열정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상상력은 과학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는데, 다가갈 수 없는 진리의 영역을 발견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는 그들의 인간적 모습에 친밀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3.

과학과 미학은 거리가 멀 것 같지만, 미학을 공부하다보면 과학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와 만나는 경우가 생각보다 흔하다. 과학, 특히나 물리학에서 아름다움은 "종종 수학적인 대칭으로-계가 규칙적인 경향이 있는 것-포장되어 있다"(p232).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게 무슨 아름다움이냐'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인데, 이 책을 읽고나니 그들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과소평가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미의 상대성을 배웠으면서도 누군가의 미적 판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편협하고 무례한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의심할 바 없이 이론가들의 상상력을 제한할 실험이나 관측이 부족"(p235)한 시대에, 그 부족함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워가며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향해 걸어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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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우주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나는 무대로 밝혀졌고, 현재로서는 우주론을 입자물리학과 떼어놓을 수 없다. 일반상대성 이론, 핵물리학, 입자물리학, 그리고 여러 분야가 함께 엮어서 우리가 그리는 우주를 만들어내고, 여러 가닥은 분리될 수 없다. 어떤 새로운 물리학의 제안도 400년 동안의 실험 및 관측과 일치해야 하고, 결국 자연은 우리보다 더 똑똑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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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 환상적 욕망과 가난한 현실 사이 달콤한 선택지
도우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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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류는 오랜 시간 궁핍의 시대를 살아왔다. 오죽하면 근대 인구학자 멜서스는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류의 증가폭은 기하급수적이기에 필연적으로 기근에 시달린다고 예측했을까. 하지만 그가 예측하지 못했던 녹색혁명, 나아가 2, 3, 4차 산업혁명은 우리를 풍요의 한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심지어는 공급과잉으로 인한 풍요가 1930년대 대공황을 가져왔다는 세계경제사적 아이러니를 마주한다. 이러한 풍요의 시대는 과잉으로 이어졌고, 과잉은 중독을 낳았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딘가에 중독되어 있다. 너무도 무의식적인 중독이라 인지하지 못할 뿐, 중독은 우리 삶에 아주 밀접하게 닿아있다. 도우리는 2022년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중독을 절묘하게 파고든다.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언어로 중독을 탐구하지 않고, 아주 일상적인 방식으로 다가선다. 배달의민족과 오늘의집, 당근마켓처럼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린 서비스와 함께, MBTI와 사주풀이, '갓생'처럼 온라인 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트렌드로 우리의 중독을 간파한다. <우리는 중독을 사랑해>를 읽다보면 우리의 일상이 어쩌면 중독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될 수밖에 없다.


#2.

특히나 눈길이 갔던 건 [방꾸미기]를 다룬 제3장이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고 나서야 볼 수 있는 내밀한 광경"을 "플랫폼 내에서 클릭 한 번만으로 낯선 사람들의 집 사진을 몇만 장 이상으로, 그것도 커튼이나 조명 하나하나의 가격까지 클로즈업해서 끊임없이 볼 수 있게"(p65) 된 시대에, 집은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그럴듯한 의생활과 폼나는 식생활만 챙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감성적인 주생활까지 만천하에 공개된다. 폭등하는 주택가격과 비좁은 면적, 주거라는 의미보다 주택이라는 재산의 가치에 중점을 두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청년(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민)들의 주거환경은 점점 더 열악해진다. 하지만 감성과 손재주를 가진 유저들은 자신들의 기발함으로 이 문제를 멋지게 극복한 삶의 공간을 구축한다. 그러나 그들이 꾸며놓은 공간의 근사함 속에 앞서 언급했던 문제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디자인은 디자인의 값을 지불할 있는 사람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일"(p73)이라는 1919년 북유럽의 노조위원장의 선언은 2022년에 비로소 실현되었지만, 결국 그것은 또다른 중독을 가져왔다. 또한 집이라는 공간을 나를 중심으로 한 우주로 설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타인과 다른 존재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조물주적 시선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식물은 플랜테리어라는 마케팅을 거쳐 기르고 돌보는 생명체나 생태계라기보다 소품, 그러니까 무생물이 됐다."(p76) 삶의 터전을 가꾸며 삶의 질을 높여보자는 사회적 흐름은 매우 주목할 만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 뒤에는 어떠한 욕망들이 가려져 있는가를 고민해야할 때다.


#3.

중독에 대한 도우리의 치밀한 탐구를 따라가다보면 그 끝에서는 대부분(이라고 하지만 실은 언제나) 노동의 문제와 마주한다.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심리 테스트 결과에 대한 해설은 "모두 노동자에 대한 캐릭터 묘사"(p170)이며, '배민맛'은 노동시간에 치여 사는 "도시 노동자의 퇴근 후 휴식 때뿐 아니라 점심시간의 필수재"(pp.48-49)다. 특히나 우리의 노동에 인정투쟁이 더해질 때, 그것은 비로소 엄청난 중독의 파워를 갖는다. "대부분 생산성 앱 혹은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을 올리거나 트위터에서 '#갓생프로젝트', '#오늘부터갓생1일' 등의 해시태그와 함께 게시글을 올리는 것으로 완성"(p22)되는 갓생도, "현실의 노동 공간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노동의 수고로움을 인정받음으로써 위로받"(p216)는 노동자들의 브이로그도 그러하다. 노동으로 인한 중독은 더 많은 노동을 유발한다. "자기 연출이라는 직무가 분리되어 있던" 전통적인 셀럽과 달리 오늘날의 인플루언서 노동자들은 "자기 연출, 영업, 홍보를 모두 책임"지는 "나에 대한 사용자이자 노동자"가 되었다(p204). 자본주의적 구조 하에서, 시스템은 언제나 개개인에게 더 많은 노동을 통해 최대의 이익을 산출하고자 하고 '중독'이라는 방식을 통해 노동자들을 이 체계에 순응하게 만든다. 우리는 언제쯤 이 중독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노동의 삶을 꿈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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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패션은 길거리에 널려 있지만, 인테리어라는 건 누군가의 집에 초대되고 나서야 볼 수 있는 내밀한 광경이다. 그때만 해도 가장 잘 꾸민 집에 대한 상상력은 드라마 속 재벌 집까지였다. 그조차 대체로 미적이라기보다 규모에 관한 것이었다. (…) 이걸 오늘의 집이 바꿨다. 예를 들면, 플랫폼 내에서 클릭 한 번만으로 낯선 사람들의 집 사진을 몇만 장 이상으로, 그것도 커튼이나 조명 하나하나의 가격까지 클로즈업해서 끊임없이 볼 수 있게 됐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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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생존자입니다 - 삶을 가두는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31가지 연습
허심양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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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이 겪는 모든 문제가 자신의 탓은 아니지만, 그 문제는 우리가 직접 해결해야"(p107) 한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트라우마는 개인의 마음 안에서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외부에서 발생하여 당사자에게 침투한 것"(p218)이기에, 그 원인과 방법을 알 수 없어 트라우마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곤 한다. <우리는 모두 생존자입니다>는 트라우마에 휩싸인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다. 트라우마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기억에 흔적을 남기는지를 이야기한다. "'살아남는' 데 급급했"던 "회복의 과정을 지나 '살아가는' 데 초점을 두"(p183)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일상을 이어가고 마음을 챙겨야할지를 조언한다. 단순히 조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조언 곳곳에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는 위기와 격려가 묻어있다. 트라우마를 딛고 조금씩 나아가는 삶을 위한 노력을 돕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줄 책이라고 생각한다.


#2.

심리상담이나 정신건강의학과 치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곳에서 정신적인 치료를 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 두려움과 불안감을 가진 이들에게 이 책은 심리적 문턱을 낮춰주고, 일상 속에서부터 실천할 수 있는 치유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물론 이 책을 읽고 혼자서 행하는 것이 트라우마를 완전히 해소해준다거나 치료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치료의 전 단계까지의 준비운동과 일상에서의 회복을 위한 습관들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치료 못지 않게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그 자체로 해결책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해결책을 시도하기 전에 에너지를 모으기 위한 준비 과정"을 안내하는 것, 벙커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다시 삶이라는 전쟁터로 나아갈 힘을 기르는 것"(p86)을 도와줄 것이다.


#3.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뿐만 아니라,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이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아주 도움이 되는 책이다. 상대방의 상처가 얼마나 크고 힘든지 알기에, 우리는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대처해야할지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때로 돕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서 트라우마 생존자에게 충분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잊게"(p218)되고, 마음을 다해 건넨 위로와 노력이 더 큰 상처로 남기도 한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 내가 진정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거지하며 고민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런 이들을 위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트라우마를 겪는 '나'뿐만 아니라 '너'를 위한 마음가짐을 배우고, 그것을 통해 행복한 '우리'를 꿈꾸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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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 경험은 위에서 말한 일반 경험과는 다르게 뇌에 저장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음식을 급하게 먹거나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을 먹으면 토합니다. 몸 안에서 음식물을 흡수하지 못한 채 다시 게워내는 것처럼, 뇌에서 처리하고 저장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닐 때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흩어져서 뇌 전체에 흔적이 남게 됩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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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이면 을유세계문학전집 122
씨부라파 지음,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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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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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태국 로맨스물이 꽤 핫하다. 아주 대중적인 취향에 속하거나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탄탄한 마니아층을 확보하며 그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몇년 전 개봉했던 <선생님의 일기>는 물론 좋은 평가를 받은 퀴어영화 <러브 오브 시암>, 나아가 최근 국내 커뮤니티들에서 회자되고 있는 각종 BL웹드라마들까지. 한국의 콘텐츠가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이 시기에도, 태국은 한국의 콘텐츠시장 곳곳을 파고들어 여러 대중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그림의 이면>은 이러한 로맨스 강국 태국의 시작을 보여주는 작품인 듯하다. 무려 49쇄를 기록할 만한 태국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가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그래서일까, 직설적이지 않지만 완곡하고 은유로 넘치는 언어들 속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대사와 문장들에 눈길이 간다. 닿을 듯 말 듯, 독자를 애타게 하는 놉펀과 끼라띠 여사의 사랑은 2022년까지도 유효한 로맨스의 법칙들을 아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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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그림의 이면>이라는 제목처럼 그림이 주요한 오브제여서일까, 끼라띠 여사의 대사 속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 만큼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곳곳에 묻어있다. 끼라띠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놉펀과 그가 가진 젊음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끼라띠의 대화. 세상의 모든 순간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하는 끼라띠의 태도까지. 작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의 다층적인 견해들을 풀어낸다. 특히나 20세기 초 태국인들에게 비춰진 일본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그 아름다움에 한층 깊이를 더한다. 현대사의 묘한 운명 속에서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를 피해간 태국인들이 바라본 제국주의국가의 부흥은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하는 생각들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결국 제국주의 위에 세워진 점을 상기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무상한가를 떠올리게 된다. 마치, 그림 한 점만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끼라띠와 놉펀의 사랑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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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이 작품은 비련의 로맨스에서 기대하는 다양한 규칙들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작품이다. 2022년의 우리에겐 다소 기시감이 드는 전개일 수 있지만, 이것이 수십년 전의 작품임을 고려하면 이국적인 배경들 속에서 익숙하지만 낯선 스토리를 전개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특히나 "단 일주일 만에 일본에 머물고 있는 거의 모든 태국인이 두 분과 만났다"(p21)고 말할 정도로 일본과 태국의 교류가 극히 드물던 시절, <그림의 이면>이 로맨스의 규칙과 함께 이국의 풍경들을 함께 전해주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당연지사였던 듯하다. 최근 8-90년대 드라마가 유튜브에서 다시 업로드되고 있다. 그 시기의 로맨스물만이 가졌던 감성이 그리운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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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집으로 돌아와 몸을 뉘었을 때 나는 자문했다. 무슨 이유로 나는 끼라띠 여사의 사생활을 골똘이 고민하고 있는가? 그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 할 어떤 의무나 필요성이 내게 있는가? (...) 스스로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떨쳐 내어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이는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 P40

"나는 아름다움을 사랑해.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결점과 시듦이 없는 상쾌한 감정을 발생시키기 때문이지." - P48

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 다른 한 사람의 인생에서는 가장 의미 있는 것임에 내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가련하도다, 인생이여!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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