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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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장 오래된 기억이 담겨있는 물건을 묻는다면, 기모노를 입은 여자 아이 모형의 도어벨 종이다. 아빠가 일본 출장을 다녀오셨을 때,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던 것 같다. 어쩐지 본 소설을 읽고 나서 이게 맨 처음 생각났다. 그 외에도 오랜 시간 손때가 묻어있는 편지, 갖고 놀던 나무 인형, 너무나 소중해서 아끼고 아낀 덕에 몇십년이 지난 뒤에도 닳지 않은 색연필 세트. 오래된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고 보관한다. 물건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담고 있으며 나와 그를 연결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부질없는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한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의 곁이 필요해서, 기댈 이를 찾지 못하면 늘 무언가로 향했다.

 

- 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놀이터에서도 혼자였던 날들, 그 시절의 기억은 정지운에게 흐릿했다. 아마 그다지 즐거운 일도, 충격적일 만큼 슬픈 일도 없었던, 밋밋한 날들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단 하나 서현이란 이름은 선명하게 기억했다. (p.123)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과 그림자 인형은 스산함과 따스함을 오간다. 선의는 불꽃이 되어 무너질 법한 이를 일으켜 세우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의 분노는 그림자가 되어 악의를 집어삼킨다. 소외된 이들이 모여 서로를 감싸안아 외로움을 벗어난다. 그의 시작과 끝은 호랑골동품점이다. 이유요 역시 외로움을 견뎌낸 사람이기에.

 

- 거짓말이었다. 그저 무서웠다. 언젠가 혼자가 된다는 사실이. 붉은 달빛으로 심장을 꿰메어 붙인 날이었다. (p.223)

 

- 이유요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천천히 골라내었다. 이런 상황이, 감정이 처음이라서 단어 하나하나가 매우 느리게 문장으로 조립되었다. (p.257)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곳의 기이함에 물들게 되는 것인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위안을 받았다. ‘오래된 것에 끌리면 기이한 것 역시 사랑하게 된다는 저자에게 감화된 것 같다. 후반부로 갈수록 잊혀지지 않는 외로움이란 감정을 중심 키워드로 서사가 진행된다. 외로움을 견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버린 이를 원없이 기억하고, 때로는 이별을 받아들이며 라는 사람이 가진 감정에 집중한다.

 

가장 와닿았던 이야기는 하연이 가진 콩주머니. 아무리 던져도 터지지 않는 박에 미세하게 생겨난 빈틈으로 콩주머니 하나를 던졌을 때, 박이 터지듯 감정이 터진다. 우리에게는 가끔씩 박을 터트릴 콩주머니가 절실하다.

 

- 드디어 말했다. 아빠가 밤을 악몽으로 만들던 때부터 언제나 외치고 싶었다. 아빠가 싫다고. 사실은 그때마다 말하고 싶었다. 왜냐고 묻는 건 의미가 없다고. 아빠가 나쁜 사람인 것뿐이라고. 나는 아빠가 정말 싫다고. 소하연은 다시 한번 아랫배에 힘을 주고 외쳤다.

 

진짜 싫어!”

 

이유요가 마치 찰나처럼 사라질 때에는, 그동안의 외로움을 골동품점에 내려놓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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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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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 - 식민지 조선을 위로한 8가지 디저트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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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는 단순히 식민지 시기의 ‘간식 문화’를 조명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먹는 행위를 통해 식민지 조선이라는 비극적 역사 속에서도 사람들이 어떻게 일상을 살아냈는지를 되짚는, 한편으로는 따뜻하고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인문학적 고찰이다. 디저트를 통해 ‘모던’이라는 시대정신과 서민들의 고단한 삶, 계층의식, 식민주의 담론,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감정과 욕망이 어떻게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디저트들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조선인들이 문명의 이방성과 맞닥뜨린 경계이자, 억압 속에서도 살아가고자 했던 그들의 생생한 흔적이다.

커피는 당시 다방이 단지 음료를 마시는 장소가 아니라 ‘현실을 벗어난 고독한 꿈’의 공간이었음을 환기시킨다. 문인 이상이 표현한 다방의 의미—고독한 꿈이 다른 고독한 꿈에게 악수를 청하는 곳—이라는 말은 오늘날의 카페와도 연결된다. 흥미롭게도 스타벅스 창업자의 철학과 100년 전 경성 문인들의 감수성이 맞닿아 있다는 비교는, 시대를 초월한 '공간의 경험'이라는 개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만주는 단순한 간식이 아니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고학생들의 주요한 판매 품목이었고, 그들이 속한 ‘갈돕회’라는 고학 공동체를 통해 공동체의식과 생존 투쟁이 어떻게 교차했는지를 조명한다. <삽화 속 만주 장수>의 모습은 당시 학생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감정으로 살아갔는지를 강하게 전달한다.

멜론은 ‘고급 과일’이라는 위계 개념의 도입과 더불어, 이국적 향기에 대한 동경이 어떻게 젊은이들의 감성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특히 작가 이상이 임종 직전 “멜론이 먹고 싶다”고 말한 일화는 멜론이 단순한 과일을 넘어, 근대적 욕망과 감성의 상징이었음을 암시한다.

당시 호떡은 그 크기와 가격 면에서 서민들의 식사를 대신할 정도로 든든한 음식이었지만, 사람들은 호떡집에 가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이는 단지 음식의 사회적 위상 때문이 아니라, 식민지 시기 일본의 반중국 정서 조장이 미친 문화적 영향이라는 분석은 탁월하다. 일본이 중국을 ‘어둡고 불결한 타자’로 규정하면서, 호떡 같은 중국 유래 음식에도 부정적 인식을 덧씌웠다는 저자의 해석은 설득력 있고 날카롭다.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라무네, 초콜릿, 군고구마, 빙수는 디저트의 감각적 즐거움을 넘어서, 그 시대의 보건 위생, 계층 간 문화 차이, 경제 논리, 계절성과 같은 요소들과 얽혀 있었다. 라무네는 탄산의 상쾌함만이 아니라, 수인성 전염병을 피하려는 일종의 ‘문명화된 선택’이었다. 초콜릿은 이미 연애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군고구마는 겨울밤 주린 배를 달래는 서민들의 현실이었다. 방정환이 ‘빙수당 당수’였다는 귀여운 에피소드는 당시에도 사람들이 디저트를 통해 계절을 즐기고, 문화를 향유했음을 보여준다.

본 도서는 당시의 소설, 신문기사, 광고, 사진 등을 활용해 역사적 사실을 생생히 재현하면서도, 각 디저트가 당대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파고들었는지를 풀어낸다. 그는 ‘먹는다는 것’을 단지 생리적 욕구 충족이 아닌, 사회와 관계하고 문명과 부딪히며 감정을 나누는 다층적인 행위로 규정한다.

결국 이는 디저트를 통해 근대를 다시 읽는 시도이자, 소소한 단맛으로 고단한 시대를 견뎌낸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기록이다. 음식이 기억을 담고, 맛이 역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는 디저트라는 매개를 통해 시대를 이야기하고 사람을 말하는, 깊고도 맛있는 교양서이다.

지금 우리의 커피, 빙수, 초콜릿 한 조각에도 역사의 맥락과 감정의 유산이 깃들어 있다면, 그것은 이 책이 남긴 가장 값진 통찰일 것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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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역사적인 도서관 - 우리 근현대사의 무대가 된 30개 도서관 이야기, 제30회 한국 출판 평론상 출판평론 부문 우수상 수상작
백창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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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라는 진로를 꿈꾸던 이래 도서관의 역할에 대한 고민은 한 가지로 분명했다. 책을 향유하는 공간으로만 존재해야 할지, 아니면 ‘공부방’으로의 역할을 인정해야 할지. 도서관에 공부를 하러 오는 이들보다 책을 읽으러 오는 이용자들이 더 많아지길 바랐다가도, 도서관은 시민 모두를 위한 곳이라 여기며 ‘이용자 서비스’라는 큰 틀에 부합한다면 무엇이든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나만의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이토록 역사적인 도서관』은 도서관이 등장했던 역사를 망라하며, 사서와 국가도서관의 존재 의의까지 도서관을 이루는 모든 담론을 이야기한다. 이는 그동안 가져왔던 의문에 더욱 꼬리를 물게 했다.


- 문제는 우리 도서관 분야에서 이런 논의와 실천이 이뤄졌느냐 하는 점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도서관은 식민 시대의 ‘청산’보다는, 현상 ‘유지’와, 도서관학 지식의 ‘수입’에 급급했다. 우리 도서관은 식민 시대의 ‘청산’을 미루면서, 또 다른 식민의 현장으로 ‘전락’한 건 아닐까. (p.306)


칸막이 열람실의 시작은 식민지배였으며 박정희 체제 시절 ‘기능인 양성’에 의해 굳혀졌다. 해방 후 8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왜 여전히 그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도서관의 장서를 불태우던 일제와 도서관을 도시 기본 시설로 고려하지 않던 그들이 겹쳐 보였다. 이제는 결코 바뀔 수 없는 걸까?


- 언뜻 ‘도서관’은 탈정치적인 공간으로 보이지만, 도서관이 갖는 개방성과 접근성은 도서관을 ‘가장 정치적인 공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p.224)


본인들의 입맛에 맞춰 도서관을 허물고 옮겨가며 도서관의 목적을 훼손하는 모습이 원망스러운 한편, 촛불과 응원봉이 그러했듯 민주화가 펼쳐진 장소 역시 도서관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민주화를 막으려 세운 도서관이 민주화로 인해 일어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다. 


권위적이던 도서관 서가구조는 개가제로, 공간은 이용자 친화적으로, 검열되던 장서는 시민이 원하는 책으로, 시민의 눈높이에 맞춘 ‘서비스’까지(p.217), 도서관에서 자란 ‘이용자’가 도서관을 변화시켰다. 바뀔 수 있을 거라 기대해도 될까? 독자이자 이용자로서 원망보다는 희망을 택하고 싶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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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626호 : 2025.02.20 - #신문 북 리뷰 섹션의 변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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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626호 # 신문 북 리뷰 섹션의 변화』::
언젠가 묘미 넘어 의미가 되겠지

신문 북 리뷰를 읽지 않는다. 단순히 '재밌다'는 후기보다는 양질의 후기를 보고 책을 고르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찾지 않는 이유는 접근성 때문이다. 폰 화면을 키고 버튼 몇 번만 누르면 바로 곁에 있는 독자들의 진심 어린 서평을 읽을 수 있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외면해버리기에는 현존하는 지식의 창구 중 가장 정제되어 있으며,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책을 읽는 독자로서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잊혀져가는 것을 애써 늘 붙잡고 싶어하는 사람이기에 평소보다 더 열심히 글을 읽어내렸다.

출판계의 고질적 인력 부족이 북 리뷰를 담당하는 문화부에도 적용되어있음은 물론이요, 속보 중심의 제작 방식 때문에 차별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 문제가 제기된 건 25년 전인데도 시스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해결되기는 어려워보인다.

'언론사 계정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기에 결코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었다. 그 부분이 내내 풀리지 않는 딜레마로 남아 있는데, 이 시대를 점령한 SNS와 콘텐츠의 유통 방식, 그리고 신문사 서평 기사, 현실 독자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다.'

「문화일보 북팀의 소박했던 실험들(p.38)」

독자 서평과 다른 신문 서평의 중요성이 독자들에게 드러날 수 있도록, 분투해온 <문화일보> 문화부의 시도들. 그와 언론의 중립성이 충돌할 줄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신문이란 매체가 확실히 드러나면서도 독자들과 출판사가 얼굴을 비추지 않는 사각지대는 어디일까. 도서관이 떠오른다. 도서관의 서비스를 활발히 이용하고 여전히 신문을 읽는 중장년층이 확보된 공간에서 북 리뷰와 독자를 연결지어 준다면 어떨까.

책 리뷰 섹션을 넘어 문화부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해지는 수고가 여기도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누려야지. 그들이 ‘계속해서 시도’해준다면, 나는 기꺼이 이름 모를 독자가 되겠다.

'이름 모를 한 독자가 우연히 기사를 읽고, 흥미를 느껴 거기에 적힌 책과 영화를 보며 위안을 얻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문화부 기자의 기쁨과 슬픔(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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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기획회의626호 #신문 #북리뷰 #서평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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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625호 : 2025.02.05 - #2025 아트북 출판시장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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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편협한 사고이지만, 이전의 나는 아트북을 그저 내용이 없는 책, 가격이 저렴하지 않아 구매하기 부담스러운 책으로 치부해버리곤 했다. 반면 실제 아트북의 범주는 꽤 넓다. 「아트북 지도 그리기(p.32)」 속 ‘예술적 실천을 책의 형태로 가공한 모든 결과물’라는 정의를 따른다면, 알고보니 아트북을 꽤 좋아하는 독자 중 한명인 것으로 판명났다.


각양각색의 퀄리티를 가지고 있어 그 중 원하는 결과를 찾아내기란 독자인 나의 몫이나, 아직은 아쉬움보다 기대감이 더 크다. ‘독립출판’과 ‘아트북’의 범주 안에서 여전히 좋은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아트북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퍼블리셔스 테이블’과 ‘유어마인드’를 알게 된 시점인 것 같다. 작년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처음 방문한 뒤 개인적으로 만족도가 높았는데, 「무제한을 만드는 문장들(p.38)」에서 비하인드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어떤 백지를 마련할 것인가’라는 모토가 마음에 들었다. 취향의 공동체에서 산만함을 인정하고 위트를 더하니, 독자가 스스로 나침반을 만들어낼 수 있던 행사라 느껴진다.


- 『실패 없는 젠더 표현 가이드북』의 기획자 노트 「이어달리기가 시작되었다(p.54)」를 순식간에 읽었다. 바로 장바구니에 책을 담았다. 독자가 저자를 본 후 가장 먼저 떠오를 의문인 ‘젠더 표현을 굳이 일본 번역서로 봐야하는 이유’를 언급해주고, 표현의 수정을 넘어 고정관념의 균열을 꾀하고자 하는 의도, 그 어떤 단어로도 차별이 드러나지 않게끔 고려한 편집의 섬세함까지. 책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을 보면 독자는 책을 살 수밖에. 약자로 치부되는 이들의 접근성 보장을 다룬 ‘이 주의 논점’ 코너 글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흐름도 좋았다.


- 이번 호 솔직히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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