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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물건 - 물건들 사이로 엄마와 떠난 시간 여행
심혜진 지음, 이입분 구술 / 한빛비즈 / 2022년 10월
평점 :
이런 상상을 해본다. 누군가 만든 음식을 한 입 먹는 것만으로도 그 음식이 거쳐온 과정을 모두 볼 수 있는 상상을. 메추리알 껍질을 하나하나 까야하는 지겨운 노동을 하는, 노른자까지 깊게 간장을 졸이기 위해 내내 불앞을 지켜야 했을, 내가 오래보아왔던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상상을 말이다.
이 책을 통과하며 나는 나를 기른,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빨래하고 말려 옷장에 넣자마자 입혀지고 더러워지는 옷들, 뜨끈하게 내놓자 마자 입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음식들. 제자리걸음과 같이 느껴지는 반복되는 살림들. 일곱 대가족을 위해 자는 시간을 뺀 모든 시간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청소하는 일에 썼던 나의 할머니. 그녀가 쏟아부은 시간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는 5년 동안 ˝극적인 변화의 시기를 통과˝한 엄마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여기까지 왔을지˝ 꼼꼼하게 듣고 적어내려가며,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내어놓았다.
편하게 앉아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길고 소중한 수고 덕분에 내가 단지 나이기 때문에 받았던 시간과 사랑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내 안에 길러나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가 당연하다 못해 편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스물 한개의 물건들이 있다. 작가와 어머니의 이야기도, 당신과 나의 이야기도 물론 함께.
엄마의 삶을 기록해보고 싶었다.(8쪽) - P8
극적인 변화의 시기를 통과하며 엄마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지, 엄마는 세상과 어떤 관계 맺으며 여기까지 왔을지 궁금했다.(8쪽) - P8
엄마가 무한 반복의 노동으로 꾸려온 일상에는 삶을 이어가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가치가 담겨 있다고 믿기에 난 이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했다.(8쪽) - P8
묵묵히 아무렇지도 않게 김에 밥을 싸 먹는 식구들을 보면서 엄마가 좀 서운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구이김을 집는 게 망설여졌다. 엄마가 노력한 결과물이 너무 쉽게 사라지는 것이 미안했다. 노동의 목격자로서, 나는 혼자 김을 아껴먹었다(191쪽) - P191
노동이 줄어들고 사라지는 것은 반길 일이다. 기쁘게 환영한다. 그러나 단 한번도 제대로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어, 마치 세상에 아예 없던 일처럼 까맣게 잊히는 것은 슬프다. 적어도 내 피와 살을 만듯어 준, 자세히 보지 않아 없는 줄 알았던 누군가의 소중한 피와 땀을 나는 잊고 싶지 않다. 오늘도 나는 구이김을 마음속으로 아껴 먹는다.(201쪽)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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