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은 미치고 반은 행복했으면
강혜정 저자 / 달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느 산문집과 달리 이 책에는 프롤로그나 에필로그, 작가의 말이 없다. 때문에 형식상 글 바깥과 안의 경계가 명확하다. 경계를 흐릿하게 해주는 장치는 작가의 이력을 말해주는 작가 소개뿐이다.

나는 별 수없이 평소라면 읽지 않았을 작가 소개부터 읽었다. 나는 그를 알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작가와의 인사 없이 글부터 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책 표지 뒤, 단출하게 적힌 작가 소개를 읽고 난 뒤 나는 다급하게 그의 책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차분하고 즉시 따라 침잠할 수 있을 글이라 생각해 빨리 문장들을 더 만나고 싶었다.

그 뒤 몇 개의 글을 읽다가 다이어리를 펴 이렇게 손글씨를 적었다. ˝묵직하고 진한 글이 좋다. 작가 소개를 읽고 글 몇 개를 읽었을 뿐인데 묵직한 돌이 내 발목에 묶였다. 그대로 푹 가라앉아 다음 장으로 넘겨 책을 읽어갈 수밖에 없었다. 섬세한 그의 글로 유추해보건대, 책을 내놓은 이후 그는 큰 불안에 사로잡혀있을 것이다. 세상에 내보낸 글이 정말로 읽혀버릴까 봐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오해하지 않아줄 누군가를 찾는 일은 어렵다. 평생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나와 가장 오래 생활하는 나 자신부터가 스스로를 오해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고 지녀온 많은 상처들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

새로 태어난 듯, 하지 않던 일을 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 이들만이 갖는 두려움과 불안은 그때만 가질 수 있는 영광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마지막 글까지 모두 만나본 지금, 그에게 이 말을 적어보내고 싶다. 다이어리를 펴 쓰던 글에 내 마음을 잇대어본다.

˝당신의 이야기는 이곳에 잘 도착했습니다. 저는 한 문장도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의도대로 이해받았습니다. 안심하세요. 저는 이제 이곳에서 당신의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무수한 타인으로 살아가는 배우로서가 아닌 그저 나 한 사람으로서 살아오며 느꼈던 기분좋은 어색함과 두근거림, 그리고 잔인한 물결들을 지금 이 책에 고스란히 잇대고 싶다는 열망만은 분명하다.

재투성이가 된 우리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두려움을 털어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 P63

- ‘나의 탄생일’이라는 것을 의식한 순간부터 그저 조용히, 있는 듯이 없는 듯이 흐르는 날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편으로 너무 새까맣게 잊히지는 않길 바라기도 한 날이었다. - P75

털어내고 싶은 것들이 있는 만큼 먼지가 날리는 거니까. 이 글에 담아 탈탈 털어버리고 싶은 것들이 세상에 먼지처럼 날리는 때에 분명 나는 소란스런 재채기를 해댈 것이다. 그렇게 잠시간 숨이 차고 머리가 띵해지며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재채기가 무서워 봄을 맞이하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어쩌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니까. - P263

지금의 나는 이다음에 흐드러지게 피어날 벚꽃 길 아래를 걷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다음 봄에 그 길을 걸을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분명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니 그 길을 향해 갈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설레는 가슴으로 용감하게! - P2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또 못 버린 물건들 - 은희경 산문집
은희경 지음 / 난다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건이 말을 한다. 작가가 들어준다.

아니 그 반대던가? 작가가 말을 한다. 물건이 들어준다.


정든 물건을 하나씩 꺼내서 구경시켜주는 친구 옆에 앉아 물건들에 깃든 이야기를 듣는 것.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런 기분이 되는 일이었다.


오래된 물건을 기필코 정리해야지! 매서운 눈으로 서랍을 뒤지다가도 그 물건에 담긴 추억을 발견하면 어느새 눈썹이 팔자로 풀린다. ˝에휴 여기에 있었구나 너와의 일, 나는 다 기억하지.˝ 하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차분히 먼지를 털어가며 물건들을 만난다.


이런 일은 나에게 자주 있었으니 이 책의 오래된 물건들이 나에게도 귀하게 보일 수밖에.



- 오래된 물건들 앞에서 생각한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변해서 내가 되었구나. 누구나 매일 그럴 것이다. 물건들의 시간과 함께하며.(11쪽)
- P11


- 글을 쓰는 것은 나의 내면을 남에게 내보이고 또 설득하는 일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124쪽)

- P124

- 함께한 시간과 삶의 궤적이 담겨 있어 쉽게 버릴 수 없는 물건들.(157쪽) - P1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의 방문
장일호 지음 / 낮은산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주 흔들리는 나는 책탑을 몸 좌우로 쌓는다. 그렇게 겨우 넘어지지 않는다. 내가 만난 책탑은 나를 내가 되는 곳으로 안내한다. 그런 와중에 (몸이나 마음이) 게을러지기도 하고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할 만큼 했다 하고 멀찌감치 손을 놓고 있다. 네 마음도 살펴야지 마음속에선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데. 나는 얼마나 노력했다고 이렇게 마음껏 게을러지는가. 생각해 보면 끙 하고 다시 일어서 책탑을 쌓으며 걸어간다.

이 책은 나의 게으름을 알아차리게 해준 책이다. 슬퍼하는 일이 나의 생활이었던 나를 잊고. 몸만 바쁘게 지내며 이 정도면 내 도리를 다 했다고 뒷짐 지고 있는 나를 찾아온 책이다. 등허리 춤에 멈춰있는 내 손가락에 깍지를 끼며 다가온 이 책은 아마도 올해의 에세이가 아닐까.

책으로 숨을 쉬고 하루를 사는 사람들. 아프니까 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은 같이 읽자고. 나는 이렇게 읽었는데 너는 어떻게 읽겠냐고 말을 걸어오는 책이니. 그게 답하기 위해 오늘도 책탑을 쌓고 읽어내려갈 수밖에.

혹여나 책을 계속 읽다가 돈이 되는 일이 생긴다면. “책 팔아서 버는 돈이 생긴다면 책 사는데 쓸 것이다.(11쪽)”는 그의 말처럼. 나도 책 사는데 신나게 써야지. 다짐해 본다.

쓰는 사람은 쓰지 못한 이야기 안을 헤매며 산다.(7쪽)
- P7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 슬픔의 얼굴은 구체적이었다.(10쪽)
- P10


- 많은 사람이 단언한다. 언젠가는 종이 매체가 사라질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다짐한다. 그 시대의 안과 밖을 잘 쓸고 닦다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164쪽)
- P164

이러니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나는 도리 없이 믿어버리게 된다.(202쪽) - P2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똥, 소똥, 나마스떼 - 101일간의 좌충우돌 인도, 네팔 배낭 여행 에세이
곽디 지음 / 자기앞의생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곽디 작가의 책이 많은 이들에게 읽히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독자들은 각자의 기억과 마음에 숨겨져있던 나도 몰랐던 과감함을 만날 수도, 지난 여행의 추억을 되짚어볼 수도, 또는 다시 떠날 용기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다시 살아갈 기운˝을 얻게 될지도.

- 어떤 것이 선인지 악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무질서적이고 뒤범벅인, 그 자체로 혼돈의 도가니인 곳.




- 그곳에서 내 오감이 작동하는 것을 느끼며 내가 맞고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전복시키고 내가 경험한 세상에서는 보고 듣지 못한 것들을 온몸으로 통과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나를 아주 들었다 놨다 하는 인도. 잠시도 방심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곳이다.





- 그리고 가끔은 한참뒤에 알게 된다. 아 그때 거기 좋았는데. 바보같이 그땐 모르다가.






- 그날 나는 다시 살아갈 기운을 얻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와 물건 - 물건들 사이로 엄마와 떠난 시간 여행
심혜진 지음, 이입분 구술 / 한빛비즈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런 상상을 해본다. 누군가 만든 음식을 한 입 먹는 것만으로도 그 음식이 거쳐온 과정을 모두 볼 수 있는 상상을. 메추리알 껍질을 하나하나 까야하는 지겨운 노동을 하는, 노른자까지 깊게 간장을 졸이기 위해 내내 불앞을 지켜야 했을, 내가 오래보아왔던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상상을 말이다.

이 책을 통과하며 나는 나를 기른, 내가 사랑하는 여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빨래하고 말려 옷장에 넣자마자 입혀지고 더러워지는 옷들, 뜨끈하게 내놓자 마자 입속으로 사라져버리는 음식들. 제자리걸음과 같이 느껴지는 반복되는 살림들. 일곱 대가족을 위해 자는 시간을 뺀 모든 시간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청소하는 일에 썼던 나의 할머니. 그녀가 쏟아부은 시간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는 5년 동안 ˝극적인 변화의 시기를 통과˝한 엄마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여기까지 왔을지˝ 꼼꼼하게 듣고 적어내려가며,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내어놓았다.

편하게 앉아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길고 소중한 수고 덕분에 내가 단지 나이기 때문에 받았던 시간과 사랑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 내 안에 길러나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가 당연하다 못해 편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스물 한개의 물건들이 있다. 작가와 어머니의 이야기도, 당신과 나의 이야기도 물론 함께.

엄마의 삶을 기록해보고 싶었다.(8쪽)
- P8

극적인 변화의 시기를 통과하며 엄마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지, 엄마는 세상과 어떤 관계 맺으며 여기까지 왔을지 궁금했다.(8쪽)
- P8

엄마가 무한 반복의 노동으로 꾸려온 일상에는 삶을 이어가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가치가 담겨 있다고 믿기에 난 이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했다.(8쪽)
- P8

묵묵히 아무렇지도 않게 김에 밥을 싸 먹는 식구들을 보면서 엄마가 좀 서운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구이김을 집는 게 망설여졌다. 엄마가 노력한 결과물이 너무 쉽게 사라지는 것이 미안했다. 노동의 목격자로서, 나는 혼자 김을 아껴먹었다(191쪽)
- P191

노동이 줄어들고 사라지는 것은 반길 일이다. 기쁘게 환영한다. 그러나 단 한번도 제대로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어, 마치 세상에 아예 없던 일처럼 까맣게 잊히는 것은 슬프다. 적어도 내 피와 살을 만듯어 준, 자세히 보지 않아 없는 줄 알았던 누군가의 소중한 피와 땀을 나는 잊고 싶지 않다. 오늘도 나는 구이김을 마음속으로 아껴 먹는다.(201쪽)
- P2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