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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라는 착각 -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이정표
안호기 지음 / 들녘 / 2025년 5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한민국은 기적이라 불릴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1960년대 최빈국에서 시작하여 반세기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분명 놀라운 성취다. 그러나 이 화려한 성장의 이면에는 우리가 간과해온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현실, 그리고 143개국 중 52위에 머물고 있는 행복지수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성장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이번에 읽은 안호기님의 <성장이라는 착각>은 이러한 모순된 현실을 직시하며,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성장 신화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금융은 더 이상 실물경제를 지원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끝없이 증식하는 괴물로 변했다. 한국의 GDP가 1990년 200조 원에서 2021년 2,072조 원으로 10배 증가한 동안, 금융시장 규모는 158조 원에서 5,662조 원으로 36배나 급증했다. 2004년 서울에서 30평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려면 노동자 월급 18년 치가 필요했지만, 2022년에는 36년 치로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금융시장 확대에 따른 자산 거품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과거 18-19세기 유럽에서 자본 축적이 예술과 문화의 후원으로 이어져 사회적 잉여를 창출했던 것과 달리, 현대의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익 증대에만 몰두하고 있다. 예술작품조차 대물림의 수단으로 수집할 뿐, 진정한 문화적 가치 창조에는 관심이 없다. 성장주의가 낳은 가장 심각한 결과 중 하나는 환경 파괴다. 기후변화에 대한 개인적 대응, 즉 재활용품 사용이나 금속 빨대 사용 등이 마치 기후 위기의 해결책인 양 포장되고 있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양적 성장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발생한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허황된 믿음일 뿐이다.
친환경적이라고 여겨지는 전기차도 실상을 들여다보면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리튬이온 배터리 생산을 위해 필요한 코발트의 70%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채굴되는데, 그 상당량이 어린이를 포함한 광부들의 원시적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리튬 1톤을 생산하려면 약 200만 톤의 물이 필요하며, 이로 인해 남미 리튬 삼각지대는 심각한 물 고갈을 겪고 있다. 칠레에서만 지역 물의 65%가 리튬 추출에 사용될 정도다. 성장을 위한 기술 혁신이 어떻게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환경 파괴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ESG, 그린 뉴딜과 같은 개념들도 결국 자본의 탐욕을 감추는 포장에 불과할 수 있다는 의구심이 드는 이유다. 또한 GDP 중심의 성장주의는 돌봄 노동을 철저히 평가절하한다. 2019년 한국 가사 노동 서비스의 가치는 490조 9천억 원으로 GDP의 4분의 1 규모로 추산되지만, 이는 GDP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다. 사회 유지와 재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화폐 가치로 환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슈퍼 리치 2,640명 중 여성은 337명(12.8%)에 불과하며, 그나마 10위 안에는 한 명도 없다. 자산이 가장 많은 여성인 프랑수아즈베탕쿠르메이예조차 할아버지가 창업한 로레알 그룹의 지분을 상속받은 것이다. 이는 성장주의 시스템이 구조적으로 성별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구에서 탈성장과 새로운 경제체제 논의가 활발해지는 이유는 성장이 정점에 도달한 후 시간이 지날수록 자본주의의 모순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토마피케티는 자본주의가 불평등을 심화하고 지구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고 진단하며, "참여적이고 지방 분권화된, 연방제 방식이며 민주적이고, 또 환경친화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혼종되어 있으며, 여성 존중의 사상을 담은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탈성장 담론이 제시하는 비전이 아무리 매력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탈성장 이론의 가장 큰 문제는 구체적인 대안의 부재다. 성장을 멈추고 현상 유지를 하자고 하지만, 이것이 성립하려면 사회 구성원 전체가 성장이 아닌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과 경쟁 본능을 고려할 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유럽의 협동조합을 성공 사례로 제시하지만, 제스프리나 FC 바르셀로나 같은 협동조합들도 결국 시장에서 다른 기업들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협동조합이라는 형태 자체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조력, 풍력, 태양열 등 재생에너지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5천만 인구가 살고 있는 좁은 국토에서, 게다가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으로 덮인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것만으로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원자력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현실적인 대안 없이 신재생에너지만을 고집하는 것은 무책임할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미래성장이라는 착각을 넘어서 <성장이라는 착각>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분명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살아왔지만, 그 성장이 진정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지속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더 많이 가졌지만 더 공허해진 현실,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늘어나는 자살률과 우울감은 성장 신화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탈성장이라는 대안도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 않다. 현실적 제약과 인간 본성을 고려할 때, 성장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보다는 성장의 방향과 내용을 바꾸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 접근법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과 평등, 효율과 형평,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이는 쉽지 않은 과제지만,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다. 기후 위기, 불평등 심화, 사회 통합의 위기 등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성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