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 글쓰기의 분투 -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글을 씁니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래리 W. 필립스 엮음, 차영지 옮김 / 스마트비즈니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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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이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아주 오래도록 맴돌기를, 우리의 이름이 잊힌 이후에도 글의 진실이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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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글쓰기의 분투 -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글을 씁니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래리 W. 필립스 엮음, 차영지 옮김 / 스마트비즈니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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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눈빛은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불빛처럼, 그 눈빛은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의 붕괴를 직감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부정하려는 누군가의 것이었다. 나는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며, 화려하고 낭만적인 화면의 이면에서 끝없이 가라앉는 자의 고독을 느꼈다. 사랑 이야기로 보기엔 너무도 깊고, 단지 허영과 몰락의 서사로 보기엔 어쩐지 비극적이었다. 1920년대, 물질 만능과 소비의 시대였던 미국. 그 시대를 살아간 인간 군상들은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허울 좋은 번영을 노래했지만, 무대 뒤편에는 언젠가 꺼질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불을 밝히려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명이 피츠제럴드였다고 믿는다.

‘재즈 시대’라 불리는 그 찬란한 시절은, 사실은 모래성 같았다. 눈부신 파티와 샴페인, 황금빛 드레스의 뒤편에는 결핍과 허무,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 있었다. 피츠제럴드는 그걸 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그것만을 썼다. 젊은 시절의 성공, 명성과 부를 얻고자 한 열망, 그리고 끝끝내 문학으로 구원받고 싶었던 갈망. 그 모든 것이 그의 작품, 특히 <위대한 개츠비> 속에 농축되어 있다. 그는 미국 드림의 유령을 사랑했고, 결국 그 유령에 쫓겨 다녔다. 피츠제럴드에게 글쓰기는 부서진 자아를 붙잡고 현실을 견디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글쓰기의 분투>라는 책에 마음이 깊이 끌렸다. 작가로서의 피츠제럴드를 이해하려면, 그가 겪었던 실패와 몰락, 그리고 계속해서 글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을 들여다봐야 한다. 헤밍웨이처럼 육중한 문장으로 세계를 붙들려 한 것이 아니라, 피츠제럴드는 가녀리고 섬세한 언어로 무너지는 자신의 세계를 붙잡으려 했다. 그는 한때 젊고 아름다웠고, 한때 모든 것을 가졌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더 철저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있었다.

빛바랜 오후, 창문 너머로 바람이 지나간다. 피츠 제럴드가 글쓰기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이 문득 떠오른다. 그에게 글쓰기는 직업도, 화려한 명성의 수단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자체였고, 살아 있다는 증명이었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잿빛 영혼의 속삭임을 듣는 일과 같다. 그 속삭임은 늘 어떤 상처에서 비롯된다. 아픈 고양이 옆에서 글을 쓰던 그에게 삶은 한 편의 문학이자 한 편의 고통이었고, 글쓰기는 그 고통을 감당하기 위한 도구였다. 우리는 종종 아름답게 보이는 것에 이끌리지만, 제럴드는 아름다움조차 도려내야 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예술이란 그렇게 무자비해야 하며, 정확해야 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고백에는 끊임없는 결단과 포기가 있다. 어느 한 장면, 어느 한 인물을 버린다는 것은 창작만의 행위가 아닌, 자기 자신을 깎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그 결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결정을 내려야만 진짜 작가로서 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에게 무자비했고, 동시에 세상에 단 한 줄의 진실이라도 남기고자 애썼다. 그가 퇴고를 말할 때면, 나는 무너진 성벽을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장인을 떠올린다. 약한 곳을 보완하고, 다시 그다음 약한 곳을 찾아내는 반복된 노동 속에서 그는 완벽을 꿈꿨다. '충분히 괜찮은 것'을 잘라내는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을 테지만, 그는 언제나 더 나은 글을 위해 자신을 밀어붙였다. 그는 형용사가 아닌 동사로 문장을 움직이게 하라고 했다. 그의 말은 문장 교정의 조언을 넘어선다. 그것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멈춰선 단어들이 아니라, 움직이고 흔들리고 뛰어드는 삶의 언어. 그런 언어를 찾아내기 위한 그의 고뇌는 나의 마음에도 깊은 잔상을 남긴다.

무엇보다 그가 나에게 던진 가장 깊은 울림은 "작가는 자신이 속한 세대의 젊은이들과 다음 세대의 비평가들, 그리고 후대의 교육자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단지 시간의 구분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의 말이며, 지향성의 말이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시대와 소통하고자 했고, 그 글이 미래까지 살아남기를 바랐다. 문학은 인생의 연습이 아니라, 인생 자체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묻고, 고민하고, 두려워했다. '끝까지 밀고 나갈까? 아니면 돌아가야 하나?' 이 질문은 단지 소설 속 인물의 길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나의 삶에도, 나의 글에도 머물러 있다.

그는 말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며, 그것을 다듬는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고. 그는 창조자였고, 동시에 분투자였다. 쓰는 모든 순간이 영혼의 씨름이었고, 문장 하나하나가 피와 같았다. 그런 글은 쉽게 쓰일 수 없다. 그런 글은 삶 전체를 걸어야만 다가설 수 있는 진실이 된다. 나는 그의 조언을 되뇌이며 어휘를 확장하고자 한다. 더 많은 단어, 더 섬세한 표현, 더 날카로운 시선을 가지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내 글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저 종이와 펜으로 내 세계를 건너갈 것이다. 그것이 작가라는 존재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 ‘밤은 부드러워라’처럼 부드러운 어둠 속에 우리만의 여운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 여운이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아주 오래도록 맴돌기를, 우리의 이름이 잊힌 이후에도 글의 진실이 남기를.

그래서 나는, 피츠 제럴드처럼 오늘도 써 내려간다. 말할 거리를 가지고,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나, 끊임없이 질문하고 다시 지우는 그 여정 위에서. 그 여정이 너무도 고단하고 때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단 한 줄의 문장이 누군가의 삶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그리고 마침내, 글이 나 자신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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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상술 - 맨주먹으로 5000억 브랜드를 일군 교촌치킨 창업주 권원강 회장의 진심 경영
권원강 지음 / 다산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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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치맥’을 말할 것이다. 치킨과 맥주의 궁합은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다. 특히 야구나 축구와 같은 스포츠 경기를 시청할 때면, 치킨 한 마리와 시원한 맥주 한 캔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골이 터지거나 홈런이 터졌을 때 치킨을 한 입 베어 물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는 그 순간, 일상의 스트레스도 함께 날아가는 것 같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우리는 ‘치맥’이라는 말을 그저 유행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덧 하나의 문화이자, 사람들 사이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치킨의 세계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채롭다. 브랜드만 해도 수십 가지, 조리 방식과 양념 스타일까지 더하면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치킨이 존재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마다 좋아하는 치킨은 조금씩 다르다. 누군가는 매운 양념을 좋아하고, 또 누군가는 고소한 후라이드를 고집한다. 하지만 내게 있어 치킨 하면 떠오르는 이름은 언제나 같다. 바로 '교촌치킨'이다. 처음 교촌을 맛본 것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샌가 내 손에는 늘 교촌의 봉투가 들려 있었고, 모임 자리나 야식 타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 역시 교촌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왜 하필 '교촌치킨'일까? 왜 그 수많은 브랜드 가운데 교촌이라는 이름이 나의 기억과 입맛을 사로잡았을까? 처음에는그냥 ‘맛있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맛 외에도 분명히 다른 요소들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교촌치킨의 창업주이자 현재 회장인 권원강 씨가 자신의 경영 철학과 성공 원칙을 담아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제목은 다소 도발적이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최고의 상술》이었다. 그 제목에서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이 책은 자서전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곧장 책을 구입했고, 책장을 넘기며 '맛있는 치킨' 이면에 숨어 있던 깊고 단단한 원칙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권원강 회장은 스스로를 '닭에 미친 사람'이라 불러도 좋다고 했다. 그가 치킨 한 조각에 담은 집념과 절박함은 한 시대의 외식문화를 선도하게 만들었다. <최고의 상술>은 정직이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위기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한 기업가의 치열한 기록이다.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바로 '절박함'이라는 단어다. 그는 재능이나 운이 아닌, 절박함이 성과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이는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누구나 삶의 어떤 지점에서든 절박한 순간을 마주한다. 그 절박함을 어떻게 품고, 어떻게 행동으로 연결시키느냐에 따라 인생의 궤적이 바뀐다. 권원강 회장은 그 절박함을 두려움으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그 순간을 기회로 전환해냈다.

또한 그는 가격보다 '가치'를 중시했다. '비싸지만 후회하지 않는다'는 고객의 평가는 그가 얼마나 치킨 하나에 철학과 품질을 담았는지를 보여준다. 저가 경쟁의 유혹이 클 때조차,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인 브랜드 신뢰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신념과 철학이 어떠한 가치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광고를 하지 못했던 초창기의 어려움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광고를 외주화된 포장으로만 보지 않았다. 광고란, 자원을 쏟아 붓기보다 창의적인 발상과 진정성으로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일이라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먼저 찾는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요즘처럼 마케팅이 과잉된 시대에, 다시금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성공은 단지 운이나 기술이 아닌 '방향'의 문제라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진짜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믿는 그의 태도는 나에게 큰 위로이자 배움이 되었다. 나도 때때로 실패 앞에 주저앉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지만, 그것이 단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길을 찾는 과정이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환해졌다. 교촌치킨의 성공은 단지 맛있는 치킨을 만들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정직과 절박함,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따라 하더라도 해가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따라 한다'는 여유로운 시선으로 경쟁을 대했다. 더 나아가, '따라올 수 없는 큰 발걸음을 내딛겠다'는 결심은 진정한 리더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내가 교촌치킨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맛있어서가 아니다. 그 맛에는 스토리가 있고, 철학이 있으며, 사람을 감동시키는 진심이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단지 기업가의 성공담이 아닌,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힘을 지닌 이야기다. 정직함이 결국 최고의 상술이라는 문장은 단순한 문구가 아니라, 그의 삶을 온전히 요약하는 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치킨을 먹을 때 단지 맛을 음미하지 않는다. 그 맛 너머에 있는 수많은 밤, 실패와 도전,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던 한 사람의 마음을 함께 느낀다.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장사를 바라보는 시각뿐 아니라, 내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어떤 일을 하든, 나만의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정직, 절박함, 타협하지 않는 원칙, 그리고 창의성. 권원강 회장이 지켜온 이 네 가지 가치는 단지 교촌이라는 브랜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오늘날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이 되고 있다. 그래서 단지 책이 아닌, 하나의 길잡이다. 나도 나만의 삶에서, 나만의 분야에서 정직한 상술을 펼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나를 보며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의 일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고.

오늘도 나는 교촌치킨을 한 입 베어 물며 생각한다. 이 맛은 단순한 레시피의 결과물이 아니다. 수많은 실패를 딛고, 정직함으로 지켜낸 하나의 철학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상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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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퍼레이팅 시어터 - 어느 의사의 영화 해부
박지욱 지음 / 사람in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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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삶은 때때로 하나의 수술실 같다. 어둡고 조용한 긴장감 속에서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과 연약함이 드러나며, 그 중심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생과 사, 그 너머의 의미를 응시하게 된다. 나에게 있어 영화란 그런 수술실과도 같은 곳이었다. 스크린의 빛 속에서 인간은 해부되고, 그의 고통과 환상, 병과 치유는 조명 위에 펼쳐진 진실처럼 드러난다. 그리고 그 장면들 앞에서 나는 관객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혹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의사’로서,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왜 병들며, 왜 상처 입고, 또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가.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언제부턴가 인간을 해부하는 영화에 더 깊이 이끌리기 시작했다. 액션도, 멜로도 아닌, 사람의 마음과 뇌와 영혼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들. ‘정상’이란 무엇이며, 병든 정신은 우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가. 그런 물음들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건, 단연코 『뷰티풀 마인드』를 본 그날이었다. 천재 수학자 존 내시의 삶은, 단지 조현병이라는 질병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오해와 내면의 균열, 이성과 감정의 다툼 속에서도 ‘사랑’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끝내 버티어낸 한 인간의 이야기였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아마 그 침묵은, 고요한 수술실에서 메스를 든 의사의 마음과도 닮아 있었으리라.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오퍼레이팅 시어터>. 의사가 쓴 책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의학적 지식을 풀어놓는 보고서가 아니었다. 그 책은 마치 스크린 위의 카메라처럼, 인간의 삶을 촬영하고 조명하며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책 속의 장면들은 하나의 수술이자 하나의 영화였고, 나는 읽는 동안 내내 진료실과 병실과 수술실과 영화관 사이를 오갔다. 의사가 바라보는 영화란 과연 어떤 풍경일까. 그는 인간의 신체를 넘어서 정신과 감정을 어떻게 바라볼까. 그리고 영화라는 거울을 통해, 그는 인간의 어떤 진실을 해부하려 했던 걸까. 의학은 늘 과학이라는 단단한 기둥 위에 세워진 학문이라 생각해왔다. 숫자와 데이터, 생화학적 기전과 치료의 성공률로 구성된 객관적 영역.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는 이 무채색의 세계 속에서도 따뜻한 숨결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어린 시절의 동기와도 닮아 있었고, 매일 병상 앞에 서서 환자의 눈을 들여다보는 의사인 동생과의 대화 속에서 순간의 미묘한 감정과도 통했다. 저자는 영화를 통해 질병과 의학,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질병을, 혹은 환자를, '증상'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오퍼레이팅 시어터>는 전혀 다른 시선을 제공한다. 한 편의 영화 속 장면 하나하나를 의사의 시선으로 천천히 들여다보며, 그 안에 숨겨진 고통과 사랑, 역사와 윤리, 제도와 인간의 기억을 조명한다. 이를테면 <뷰티풀 마인드>에서 조현병을 앓는 천재 수학자 존 내시의 이야기는 병리학적 해설이 아닌, 냉전 시대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질병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지를 다루는 철학적 성찰로 이어진다. 의사이자 인간으로서 우리는 이 영화 속에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정상성과 비정상성은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병은 곧 고통인가, 아니면 또 다른 가능성인가?" 그 가운데 조현병 치료를 위한 의학적 치료제의 역사도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사랑의 기적>에서는 뇌염 환자들에게 투여된 신약이 잠시나마 그들을 "깨어나게" 했던 기적 같은 순간이 다뤄진다. 의학적으로는 일시적 도파민 작용의 결과였겠지만, 영화 속에서는 그 짧은 각성의 순간이 얼마나 깊은 감정과 희망을 안겨주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드라마에서 많이 다루어 지는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돌아오는 환자를 볼 때마다 이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의사는 때로는 존재의 경계에 선 자들을 깨우는 사람이다. 눈을 뜨는 짧은 순간이 주는 경이로움, 말 한 마디 없는 응시에 담긴 말 못할 감정의 무게. 영화는 그것을 시각적 시詩로, 우리는 임상적 기록으로 남긴다. 의약품의 역사도 그 영화 속에서 빛을 발한다. 엘-도파는 실제로도 1960년대 말부터 파킨슨병 치료에 사용되었으며, 그 개발 과정은 의약품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인간의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드라마였다. 책은 단지 영화에서 멈추지 않고, 그러한 의약품이 어떻게 태어났으며, 임상에서 어떤 희망과 절망을 안겼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의 진보는 감정과 무관하지 않다. 환자의 눈물, 보호자의 간절함, 연구자의 집념이 하나로 얽혀 우리는 '치료'라는 희망을 한 뼘씩 확장해왔다.

이 책이 인상 깊은 이유는 영화라는 감성의 매체를 통해 의학의 세계를 재해석하고, 그것을 통해 진료실 밖의 더 넓은 삶을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셔터 아일랜드>의 경우, 정신과적 치료의 역사, 특히 전두엽절제수술과 같은 폭력적인 기술이 어떻게 정당화되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영화는 우리가 의료적 개입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무엇이 치료이고, 무엇이 통제인가? 누군가의 고통을 없앤다는 명목 아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간성을 침묵시켜왔는가?

영화는 때때로 실제보다 더 선명하게 인간을 그려낸다. <맨츄리안 캔디데이트>는 전쟁의 트라우마와 뇌과학적 조작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 영화는 정치와 과학, 의학이 어떻게 얽힐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책은 이 영화가 음모론만이 아니라, 의학이 가진 사회적 책임에 대한 경고임을 밝힌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전 읽었던 신경정신 전문의의 책이 떠올랐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는 환자에게 약물 치료만이 최선인 것처럼 설명했던 자신의 모습을, 이제는 너무 성급하고 단편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자책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하던 그가 생각났다. 그때의 그는 의사였지만, 충분히 인간이 되지 못했던 것을 고백하고 있었다. 의사도 한명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책은 영화라는 렌즈를 통해 의학의 무게를 감정의 언어로 번역한다. 그리고 이 번역은, 때로는 진료실에서 아무 말 없이 환자의 손을 잡고 있는 것만큼 강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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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의심하라, 그 끝에 답이 있다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근오 엮음 / 모티브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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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가 데카르트를 다시 꺼내든 이유는 철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삶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나는 과연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어떤 기준 위에서 내 생각을 세울 수 있는가를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질문은 데카르트가 던진 오래된 질문과 마주했다. "우리는 무엇을 의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이번에 그의 철학에 대해 조금은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신간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일단 의심하라, 그 끝에 답이 있다>였다. <병법서설>로 익히 알고 있었던 데카르트의 사상에 좀더 다가가고 싶다.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나는 누구이며, 왜 살아가고 있으며, 이 삶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 질문들은 때때로 두려움으로, 때로는 깊은 고독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러한 고요하고 불안한 물음 속에서 만난 철학자가 있었다. 르네 데카르트,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 사상가는 나에게 ‘생각하는 나’를 다시금 바라보게 해주었다. 그의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문장이지만, 그것은 단 하나의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말이 되었다. 의심을 밀고 밀어 결국 도달한 이 한 줄은, 세상의 모든 불확실함 속에서 내가 붙들 수 있는 하나의 닻이 되었고, 그 닻을 통해 나는 내 존재를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데카르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되, 스스로 의심하는 주체는 남겨두었다. 그것이 바로 생각하는 나 자신, 즉 존재의 확신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진정한 자유를 처음 마주했다. 그 누구의 말도, 그 어떤 기준도 아닌, 내가 사유하고 의심함으로써 내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자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철학을 시작했다. 믿어왔던 세계, 지각, 감정, 심지어 수학적 진리마저도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급진적인 회의의 끝에서 그가 붙잡은 단 하나의 진실은 바로, "의심하고 있는 나, 곧 생각하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외부의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한 확실성이었다. 나는 이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세상이 얼마나 흔들리든, 타인의 말이 얼마나 혼란을 일으키든, 내 안에서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이 단단한 출발점. 어쩌면 그것이 진짜 철학의 힘인지도 모른다. 지식을 쌓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혼란한 세계 속에서 중심을 잡기 위한 나침반. 데카르트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그 나침반을 세웠고, 나는 오늘 그 방향을 다시 들여다본다.

의심은 불안을 낳지만, 동시에 성찰을 낳는다. 데카르트가 제안한 방법적 회의는 회의주의가 아니다. 그는 의심을 파괴가 아닌 재건의 도구로 사용했다. 어쩌면 우리 삶 속의 모든 불안과 혼란 역시도 그런 식으로 새로운 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때로 내가 쓸모없다고 느끼고, 감정에 휘둘리며, 선택 앞에서 길을 잃는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말한다. 감정은 억눌러야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것이며, 진정한 평온은 감정 위에 세워진다고. 생각의 힘이 삶을 분명하게 만든다고.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거울을 통해 이성을 비추고 다시 삶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사유일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성적인 사고에 필요한 네 가지 원칙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단지 논리적인 절차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내면의 태도이기도 하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 나는 나에게 가장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할 존재였다. 왜 나는 늘 생각이 많을까. 나는 왜 이렇게 자주 흔들릴까. 데카르트는 이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던지는 것에서부터 삶의 방향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나를 속이는 것은 때로 나 자신이었고, 타인의 시선이었다. 타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데카르트는 타인의 인정이나 평가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더 깊은 시선을 두라고 말한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결국 나를 불안하게 만들고, 오해는 우리의 판단과 감정의 뒤엉킴에서 비롯된다. 미움받을 용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경계를 세우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그것은 이성의 힘으로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이며, 동시에 나를 진실하게 바라보는 용기이기도 하다.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고, 우리는 늘 기준 앞에 서게 된다. 데카르트는 말한다. 세상을 정복하려 하기보다는, 먼저 나 자신을 정복하라고. 이 말은 나를 부끄럽게 하면서도 다시 일으켜 세운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새로운 질문도 할 수 없으며, 삶은 같은 곳을 계속 맴돌 뿐이다. 그는 도덕과 윤리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말한다. 실천적 지혜란 단지 앎이 아니라 살아내는 방식이며, 그것은 곧 선택의 기준이 된다. 그 기준이 나에게 맞는 것인지, 타인의 기준에 휩쓸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종종 확신 없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순간들 앞에서 주저하지만, 데카르트는 그런 나에게 말한다. 확신이 없어도 나아가야 할 때가 있으며, 그때야말로 삶의 진짜 용기가 발휘되는 순간이라고. 그리고 나는 다시 고독을 떠올린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혼자가 되는 경험, 그것은 내가 나를 가장 깊이 만나는 시간이었다. 데카르트의 철학도 깊은 고독 속에서 피어났다. 혼자 견뎌야 했던 사유의 시간은, 그에게 진리를 향한 길을 열어주었고, 우리에게는 혼자 있는 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남겨주었다. 멈춤을 기회로 삼으라는 그의 말처럼, 나 또한 멈춘 시간 속에서 나의 감정, 나의 존재, 나의 삶을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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