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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글쓰기의 분투 -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글을 씁니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래리 W. 필립스 엮음, 차영지 옮김 / 스마트비즈니스 / 2025년 4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눈빛은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불빛처럼, 그 눈빛은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의 붕괴를 직감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부정하려는 누군가의 것이었다. 나는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며, 화려하고 낭만적인 화면의 이면에서 끝없이 가라앉는 자의 고독을 느꼈다. 사랑 이야기로 보기엔 너무도 깊고, 단지 허영과 몰락의 서사로 보기엔 어쩐지 비극적이었다. 1920년대, 물질 만능과 소비의 시대였던 미국. 그 시대를 살아간 인간 군상들은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허울 좋은 번영을 노래했지만, 무대 뒤편에는 언젠가 꺼질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불을 밝히려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명이 피츠제럴드였다고 믿는다.
‘재즈 시대’라 불리는 그 찬란한 시절은, 사실은 모래성 같았다. 눈부신 파티와 샴페인, 황금빛 드레스의 뒤편에는 결핍과 허무,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이 있었다. 피츠제럴드는 그걸 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그것만을 썼다. 젊은 시절의 성공, 명성과 부를 얻고자 한 열망, 그리고 끝끝내 문학으로 구원받고 싶었던 갈망. 그 모든 것이 그의 작품, 특히 <위대한 개츠비> 속에 농축되어 있다. 그는 미국 드림의 유령을 사랑했고, 결국 그 유령에 쫓겨 다녔다. 피츠제럴드에게 글쓰기는 부서진 자아를 붙잡고 현실을 견디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글쓰기의 분투>라는 책에 마음이 깊이 끌렸다. 작가로서의 피츠제럴드를 이해하려면, 그가 겪었던 실패와 몰락, 그리고 계속해서 글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을 들여다봐야 한다. 헤밍웨이처럼 육중한 문장으로 세계를 붙들려 한 것이 아니라, 피츠제럴드는 가녀리고 섬세한 언어로 무너지는 자신의 세계를 붙잡으려 했다. 그는 한때 젊고 아름다웠고, 한때 모든 것을 가졌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더 철저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있었다.
빛바랜 오후, 창문 너머로 바람이 지나간다. 피츠 제럴드가 글쓰기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이 문득 떠오른다. 그에게 글쓰기는 직업도, 화려한 명성의 수단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자체였고, 살아 있다는 증명이었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잿빛 영혼의 속삭임을 듣는 일과 같다. 그 속삭임은 늘 어떤 상처에서 비롯된다. 아픈 고양이 옆에서 글을 쓰던 그에게 삶은 한 편의 문학이자 한 편의 고통이었고, 글쓰기는 그 고통을 감당하기 위한 도구였다. 우리는 종종 아름답게 보이는 것에 이끌리지만, 제럴드는 아름다움조차 도려내야 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예술이란 그렇게 무자비해야 하며, 정확해야 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고백에는 끊임없는 결단과 포기가 있다. 어느 한 장면, 어느 한 인물을 버린다는 것은 창작만의 행위가 아닌, 자기 자신을 깎아내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그 결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결정을 내려야만 진짜 작가로서 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에게 무자비했고, 동시에 세상에 단 한 줄의 진실이라도 남기고자 애썼다. 그가 퇴고를 말할 때면, 나는 무너진 성벽을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장인을 떠올린다. 약한 곳을 보완하고, 다시 그다음 약한 곳을 찾아내는 반복된 노동 속에서 그는 완벽을 꿈꿨다. '충분히 괜찮은 것'을 잘라내는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을 테지만, 그는 언제나 더 나은 글을 위해 자신을 밀어붙였다. 그는 형용사가 아닌 동사로 문장을 움직이게 하라고 했다. 그의 말은 문장 교정의 조언을 넘어선다. 그것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멈춰선 단어들이 아니라, 움직이고 흔들리고 뛰어드는 삶의 언어. 그런 언어를 찾아내기 위한 그의 고뇌는 나의 마음에도 깊은 잔상을 남긴다.
무엇보다 그가 나에게 던진 가장 깊은 울림은 "작가는 자신이 속한 세대의 젊은이들과 다음 세대의 비평가들, 그리고 후대의 교육자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단지 시간의 구분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의 말이며, 지향성의 말이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시대와 소통하고자 했고, 그 글이 미래까지 살아남기를 바랐다. 문학은 인생의 연습이 아니라, 인생 자체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묻고, 고민하고, 두려워했다. '끝까지 밀고 나갈까? 아니면 돌아가야 하나?' 이 질문은 단지 소설 속 인물의 길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나의 삶에도, 나의 글에도 머물러 있다.
그는 말한다. 진정한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며, 그것을 다듬는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고. 그는 창조자였고, 동시에 분투자였다. 쓰는 모든 순간이 영혼의 씨름이었고, 문장 하나하나가 피와 같았다. 그런 글은 쉽게 쓰일 수 없다. 그런 글은 삶 전체를 걸어야만 다가설 수 있는 진실이 된다. 나는 그의 조언을 되뇌이며 어휘를 확장하고자 한다. 더 많은 단어, 더 섬세한 표현, 더 날카로운 시선을 가지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내 글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저 종이와 펜으로 내 세계를 건너갈 것이다. 그것이 작가라는 존재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 ‘밤은 부드러워라’처럼 부드러운 어둠 속에 우리만의 여운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 여운이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아주 오래도록 맴돌기를, 우리의 이름이 잊힌 이후에도 글의 진실이 남기를.
그래서 나는, 피츠 제럴드처럼 오늘도 써 내려간다. 말할 거리를 가지고, 잠 못 이루는 밤을 지나, 끊임없이 질문하고 다시 지우는 그 여정 위에서. 그 여정이 너무도 고단하고 때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단 한 줄의 문장이 누군가의 삶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그리고 마침내, 글이 나 자신이 되기를.